019. 가장 귀한 이를 대하는 방법
(19/151)
019. 가장 귀한 이를 대하는 방법
(19/151)
#019. 가장 귀한 이를 대하는 방법
2022.05.04.
늦은 밤 대공저의 응접실.
“아가씨께서 잠드셨습니다.”
보고를 마친 해나가 응접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응접실에서 대공은 느리게 숨을 뱉었다. 날카롭게 서 있던 신경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제 저택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노을이 넘실대던 시각, 황궁으로 떠난 올리비아가 사라졌다는 보고를 들었다.
경계가 삼엄한 황궁에서 올리비아가 혼자 사라졌다니. 대공은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는 것을 느꼈다.
눈이 뒤집힌 채 대공저의 전 병력이 그녀를 찾았다. 겨우 발견했을 때, 올리비아는 반짝이던 빛을 잃은 채 저를 올려다보았다.
“왜 여기에 계세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로브 자락을 꽉 쥐던 올리비아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울음을 참듯 덜덜 떨리던 목소리가 다시 떠오르자, 대공의 붉은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하마터면 혼자 울게 만들 뻔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다. 넘실거리는 위험한 살기를 갈무리하며, 대공은 테이블 위에 있는 편지들 중 가장 오래된 편지를 집어 들어 서명을 확인했다.
리브 그린.
대공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이 단정한 필체와 처음 마주쳤던 일 년 반 전이 떠올랐다.
백수정 광산을 목줄처럼 사용하던 황제에 의해 헤페르티와의 전쟁에 차출되었던 때였다. 삭막한 우편물 사이로 어느 날부터 보라색 편지 한 장이 함께 오기 시작했다.
매번 똑같은 문장이었다.
- 다치지 말고 무탈하세요. 리브 그린 드림.
구호품을 보내는 후원자로부터 온 편지였다. 편지가 다섯 번이 넘어갔을 때 대공은 의례적인 감사를 보냈다.
후원자의 편지 역시 구호를 위한 필수 요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대공이 답장을 보낸 뒤였다.
한동안 뜸하던 후원자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후원자의 편지는 조금 더 길어졌다.
감사를 표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꾹꾹 눌러 쓰인 편지. 그 편지를 시작으로 ‘리브 그린’과의 편지가 오가기 시작했다.
걱정 많고 차갑지만 정 많은 묘한 편지의 수신자.
반년쯤 편지가 오갔을 때 대공은 리브 그린을 그렇게 지칭했다.
편지를 볼 때마다 이 오묘한 후원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다.
금액을 후원하고 이름을 광고하는 귀족들과 달리 익명으로 최상품 구호품을 보내는 사람. 리브 그린의 구호품이 온 다음 날이면 늘 부족한 갑주와 막사포가 풍족해졌다. 심지어 모포 같은 것도.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보내 주는 익명의 후원자는 함부로 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언뜻 내비치는 이야기를 보니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유추해 볼 뿐이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기사들이 무사히 돌아오길 기도했다는 이야기. 혹은 동생이 아파서 속상했다는 이야기. 약혼자와 함께 데이트를 하며 이 행복한 순간이 부디 기사들에게도 빨리 돌아가길 바랐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
후원자는 늘 편지 마지막 단락에 이렇게 썼다.
- 기사님의 최선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리브 그린 드림.
생소한 말이었다. 제 최선이라. 편지를 읽을 때마다 대공은 그 묘한 단어를 곱씹곤 했다.
어머니가 그토록 아꼈던 백수정 광산을 되찾기 위해 전장을 전전했다. 황제로부터 수탈당해 땅에 떨어진 제 가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따지면 제 최선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걸 텐데도.
이상하게도 헛헛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 후로 제법 오랫동안 대공은 ‘최선’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제가 보낸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 제이드 마델레이네가 불처럼 화를 내며 편지를 찢는 것을 목격했다. 다혈질인 그가 화를 내는 거야 익숙했지만 화를 낸 뒤 스쳐 지나가듯 본 얼굴이 묘하게 슬퍼 보였다.
찢긴 편지의 발신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사생아. 반쪽짜리 마델레이네. 태자의 약혼녀. 막사를 떠도는 이야기에서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에 관한 이야기는 늘 부정적이었다.
오만하고 수치를 모르고 남의 것을 탐내는 여자.
그게 다인 줄 알았다. 어느 날 후원자의 편지가 두 통이 오기 전까지는.
한 번에 두 통이나 보내다니. 묘하게 기분이 좋아지던 때 대공은 편지 한 통이 잘못 배송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통은 리브 그린이 전장의 기사인 제게 보낸 것이었고.
다른 한 통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제이드 마델레이네에게 보낸 편지였다.
똑같이 단정한 필체에 고급스러운 편지지.
그토록 제 이야기를 숨겼던 리브 그린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대공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아팠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조차 행복했던 리브 그린이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니. 차라리 올리비아의 소문을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제가 아는 리브 그린과 현실의 올리비아의 처지가 정반대라는 사실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까. 한동안 고민하던 대공은 결국 편지를 보내기 전에 갑자기 전장을 옮겨야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편지를 보내도 리브 그린으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전쟁이 승리로 끝났을 무렵, 대공은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후원자한테 편지를 보냈다.
러헤이른 거리에서 만났으면 좋겠다고.
편지가 전해지지 않았어도 괜찮았다. 사교계에 들어서면 만나게 될 것이었으니까.
대공은 약속 장소로 향했다. 아주 조금의 기대를 담아서.
그리고 예기치 못하게 한 아가씨를 만났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상하게 눈이 가던, 초록색 눈이 아름다운 아가씨.
그 아가씨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라는 걸 알아챈 순간, 대공은 전율을 느꼈다.
황궁의 멍청이는 부족함 없이 자라서 가장 귀한 걸 못 알아보지만 저는 달랐다.
제 곁으로 온다면, 누구보다 귀히 대할 자신이 있었다.
요요하게 휘어진 눈매 속 붉은 눈동자가 진득해졌다.
* * *
어스름한 새벽이었다.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가던 해나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가씨?”
“안녕.”
침대에 앉아 있던 올리비아가 어색하게 웃었다. 해나는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어제 그렇게 늦게 들어오셨는데요?”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일찍 일어나는 건 습관이었다. 해야 할 일은 많았고 몸은 하나뿐이니 잠자는 시간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렇게 아침에 아무것도 안 하는 건 처음이었다. 늘 루틴처럼 제 일기를 보며 공녀로서의 생활을 점검했고 집 안을 살폈다. 하던 일들을 하지 않으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식사하러 가시겠어요? 저희 주방장님이 아가씨 오셨다고 신이 나셨어요. 어떤 음식을 가장 좋아하세요?”
드디어 할 일을 찾은 듯 해나가 다시 활기차게 말했다. 식사라. 제가 점검하지 않은 아침 식사를 먹는 건 처음이었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려다 잠시 멈칫했다. 해나가 의아하다는 듯 올리비아를 바라보았을 때, 얼굴이 조금 붉어진 올리비아가 말했다.
“전하께서도 매번 아침을 드셔?”
.
.
.
올리비아가 식당 문가에 선 채 안쪽을 기웃거렸다.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식당에 대공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그때 달라요. 드시는 날도 있고 안 드시는 날도 있고.”
해나의 대답이 떠올랐다. 오늘은 ‘안 드시는 날’인 듯했다.
다행이었다. 어제 그렇게 추태를 보이고 아침에 다시 보기에는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았는데 말이다.
“찾는 거라도 있어요?”
“전하께,”
무심코 대답하던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랐다. 뒤에 서 있던 대공이 화사하게 웃으며 올리비아한테 손을 내밀었다. 올리비아는 얼결에 손을 올렸다.
에스코트를 하듯 대공이 의자를 뺐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날 찾고 있었어요? 말했으면 더 일찍 왔을 텐데.”
마주 앉은 채 대공이 능글맞게 웃었다. 마치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전하.”
“네?”
“……어제 저를 데리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리비아는 최대한 또렷하게 말했다. 감사를 표할 때는 상대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부끄러움에 자꾸 고개가 숙어졌다.
“어느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당분간 전하께 폐를 끼치게 될 것 같아요.”
“…….”
“제가 여기에서 뭐든 할 게 있다면 알려주세요. 그래도 쓸모없지는 않을 겁니다.”
공작가와 태자비 궁의 재정을 관리했다. 황녀의 일도 해결한 전적이 있고.
그래서 뭐든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비쳤는데 대공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제가 또 뭔가를 잘못한 걸까?
그러다 대공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정말 다 할 수 있다고 했죠? 난 세 가지나 바랄 건데?”
“……불법적인 것은 제외하고요.”
조금 겁이 난 올리비아가 선을 그었다. 대공이 낮게 웃었다. 귓가를 간질이듯 다정한 웃음소리에 올리비아의 긴장이 풀어졌다. 대공의 눈에 짓궂은 장난이 서렸다.
“첫째. 식사는 꼬박꼬박 하기. 둘째. 잠은 푹 자기. 셋째. 아가씨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이왕이면 나를 좀 부려 주면 좋고.”
“…….”
“해 줄 수 있죠?”
달콤한 목소리가 올리비아를 향해 물었다.
손익을 따지던 계산만 익숙한 올리비아에게 무작정 뭐든 해 주려는 남자의 등장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농담일까 진담일까 진위를 가늠하지 않아도 저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가슴이 뻐근해졌다. 무릎 위 올려 둔 주먹을 꽉 쥐었는데도 콧날이 시큰했다.
이러다 정말 추태를 보일 것 같아서. 올리비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뜨문뜨문 이어지는 작은 목소리에 대공이 귀를 기울였다. 단어를 조합하던 대공의 얼굴이 설핏 일그러졌다.
“……지금, 나보고 나가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올리비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무슨! 지금 조금 창피해서 잠깐 자리 좀 비켜 달라는 말이었는데. 심각한 오역에 올리비아가 되레 놀랐을 때였다.
“푸하하하.”
호탕한 웃음소리가 식당을 울렸다.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문가를 바라보았다. 기척도 없었는데 어느새 왔는지 갈색 머리 기사를 비롯해 사용인들이 죽 서 있었다.
다들 웃음을 꾹 참고 있는 사이 갈색 머리 기사만 분위기를 못 타고 웃고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모셔와서 흐흐.”
“……윈스터 칼터. 무슨 일로 왔지?”
이를 악문 대공이 느릿하게 기사를 불렀을 때, 흐느끼듯 웃던 윈스터가 웃음을 멈췄다. 그리고 아하하, 눈치를 보았다.
“아까 시간 맞춰서 아가씨께 인사를 하라고 하셔서 왔습니다. 하하하.”
“……참. 이럴 때는 말을 잘 들어.”
낭패라는 듯 대공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대공이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대공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어제 말했죠? 대공저의 모두가 목 빠지게 아가씨를 기다린다고.”
그 말대로였다. 해나를 비롯해서 대공저의 사용인들이 눈을 반짝거린 채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들이 간지러워서 올리비아가 웃음을 터트렸다.
* * *
훈훈한 대공저와 달리 마델레이네 공작가는 싸늘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깨어난 에셀라가 문을 걸어 잠갔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에 시녀 베로니카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게 다 큰 공녀님 때문이었다. 베로니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리비아의 닫힌 방문을 바라보았다.
베로니카의 머릿속에는 그날 밤, 올리비아가 모진 말을 들었던 기억은 싹 사라졌다. 저택의 다른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마담 플루토의 상점에서 재단사가 왔는데요.”
하녀 한 명이 뛰어와서 소곤거렸다. 베로니카가 짜증스레 하녀를 노려보았다.
“분위기 파악 못 해? 얼른 돌려보내.”
“그게……. 올리비아 아가씨께서 에셀라 아가씨의 옷을 맞추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해서요.”
하녀가 쩔쩔맸다. 순간 베로니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마침 재단사가 계단을 올라왔다. 여러 가지 패턴들을 끙끙거리며 들고 오던 재단사가 자랑스레 외쳤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공녀님께서 에셀라 마델레이네 공녀님을 위해 저희 플루토에 주문하셨습니다!”
이내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늘 반겨 주는 분위기에 익숙하던 재단사가 어리둥절해져서 눈치를 보았다.
“저, 무슨 일 있나요?”
“……미안하지만 오늘은.”
베로니카가 이마를 짚으며 말할 때였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고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야.”
베로니카가 깜짝 놀랐다. 이틀 만이었다. 공작이 애원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에셀라가 이틀 만에야 수척하게 마른 얼굴로 나왔다.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은 베로니카가 말하기도 전에 재단사가 대답했다.
“에셀라 마델레이네 공녀님께 인사드립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공녀님께서 선물로 저희를 보내셨어요!”
에셀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베로니카가 얼른 화를 내듯 말했다.
“나갔으면서 이런 식으로 들어오려는 걸까요?”
베로니카의 말에 시녀들이 눈치를 보며 하나둘 올리비아를 흉봤다.
“잘못을 덮기 위해서 이렇게 물질 공세를 하다니!”
“분명 나가자마자 다시 들어올 생각으로 어제 예약했겠죠.”
“뭔가 착오가 생긴 것 같은데.”
재단사가 당황한 얼굴로 내역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지지난 주 수요일에 예약된 주문입니다. 저희가 지난주에 오기로 했었는데 일정이 맞지 않아서 오늘 온다고 전달드렸거든요.”
재단사의 말에 순간 모두가 움찔했다. 지지난 주 수요일이라면. 이런 일이 생기기도 전에 그 바쁜 마담 플루토의 예약을 잡은 셈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올리비아를 몰아가던 시녀들이 주춤했다.
“거짓말!”
베로니카가 저도 모르게 외쳤다. 늘 공작 각하와 첫째 공자님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게 틀렸을 리 없었다.
“정말입니다!”
갑자기 어디에선가 시녀 한 명이 나타났다. 울었는지 얼굴이 잔뜩 부은 시녀는 올리비아의 전담 시녀 샐리였다.
“저희 아가씨께서 지지난 주에 에셀라 아가씨께 잘 어울릴 것 같다며 예약한 곳입니다.”
울먹거리던 샐리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다른 건 잘 모르겠지만 저희 아가씨 정말로 무슨 수 때문에 여기를 예약한 건 아닙니다. 매번 아가씨께서는 에셀라 아가씨를 생각하셨어요. 정말입니다.”
그날 제가 따라나섰어야 했는데. 샐리가 엉엉 울었다.
어디로 가셨는지 소식 한번 전해 주지 않는 아가씨가 원망스러웠다. 공작가에서 제 아가씨를 미워하는 것은 알았지만 벌써 이틀이나 들어오지 않았는데 찾지도 않다니.
서러움이 왈칵 몰려왔다. 주저앉아 우는 샐리와 당황한 시녀들, 그리고 이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재단사를 뒤로한 채 에셀라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커튼을 친 방은 어두웠다.
에셀라는 눈을 꼭 감았다. 계속 다른 생각을 하려고 해도 황녀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어떻게 어머니를 죽게 만든 무희의 딸을 친언니처럼 대하죠?”
귀를 막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새까맣게 빛이 죽었던 보랏빛 눈동자 위로 다시 눈물이 고였다.
언니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차라리 정말 남이었으면 진심으로 미워했을 텐데.
하나밖에 없는 언니였다. 늘 손을 잡아 주고 저를 걱정해 주던 제 자랑스러운 언니.
어느 날부터 언니는 저를 멀리했지만 괜찮았다. 오라버니들이 언니를 괴롭힐 때도 제가 지켜 줄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정말 언니 때문에 엄마가…….
끔찍한 가정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메슥거렸다. 왈칵왈칵 몰려오는 원망과 지독한 미움에 치가 떨렸다.
다시 침대로 돌아가던 에셀라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게 띄었다. 제대로 닫히지 않은 벨벳 상자 속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
에셀라는 무심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제가 올리비아한테 걸어 주었던 분홍색 보석 목걸이가 떠올랐다.
그런 행복이 가득하기를 바랐었는데. 에셀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언니가 다 망쳤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가 다 망쳤다.
홧김에 목걸이를 집어 들기 위해 휙 들어 올렸던 팔이 느리게 떨어졌다. 독기 가득하게 올리비아를 저주하던 얼굴이 허물어졌다.
결국 다시 에셀라가 울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