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8. 갈 곳이 모두 사라졌을 때 (18/151)


#018. 갈 곳이 모두 사라졌을 때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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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의 태자비 궁. 정식 명칭은 티아제 궁이었지만 서늘한 달빛을 따다 칠한 것처럼 반짝이는 은빛 때문에 모두 별칭을 즐겨 불렀다.

이른 아침부터 태자비 궁이 발칵 뒤집혔다. 바로 궁과 똑같이 서늘한 은빛의 머리카락을 한 태자의 약혼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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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께서 짐도 없이 와서 며칠을 묵을 예정이라니. 무슨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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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꼭두새벽부터 문양도 없는 마차를 타고 황가에 왔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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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어딘가 운 것 같다던데.”

작위가 있는 시종과 시녀부터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세답방 하녀들까지 모이기만 하면 모두 마델레이네 공녀의 이야기를 했다.

발코니 아래층도 마찬가지였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차를 마시며 깔깔거리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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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도 벌겋게 부어서 연고를 받으셨다며?”

혹시나 해서 드레스는 혼자 갈아입었는데 그러길 잘했다. 제 어깨의 손자국을 본다면 저 즐거운 대화가 한층 더 풍성해졌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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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 크흠!”

옆에 시립해 있던 소프론 남작 부인의 헛기침이 점점 커졌다. 당황과 분노가 섞인 얼굴에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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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얼굴에 운 티가 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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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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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이지 않습니까.”

레오포드와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소프론 남작 부인도 알아차렸는지 손거울을 가져왔다. 거울을 비춰보던 올리비아가 눈가를 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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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것보다는 잠을 못 잔 듯 보이는 게 더 크군요. 화장할 준비를 해 주시겠어요?”

소프론 남작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바깥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올리비아는 혼자가 되었다.

참고 있던 한숨을 내뱉는 순간, 애써 힘주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다행이었다.

들불처럼 번지는 소문에 마델레이네가 섞이지 않아서.

그 와중에 마델레이네의 명예를 생각하는 제가 웃겼다. 올리비아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젯밤 공작가에서 저를 쫓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가족들은 제가 나온 것을 알기는 할까.

정작 오늘 아침에는 마중까지 받았는데 말이다. 입가에 스스로를 향한 조소가 고였다.

어스름한 새벽부터 열심히 손을 흔들며 또 뵐 수 있으면 좋겠다던 해나가 떠올랐다. 2층 통유리창 앞에 서 있던 대공까지도.

달리던 마차에서 멀어지던 대공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어젯밤 대공은 얼마든 있어도 괜찮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오늘만 해도 마차에 대공가의 문양이라도 있었다면 대공은 저와 엮인 채 추문에 휩싸였을 거다.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은인한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마델레이네는 보답에 명확하고…….

무심코 또 마델레이네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토록 바라왔던 가족들. 그리고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은 마델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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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있어서 다행이야.”

올리비아가 나직이 중얼거리며 바깥을 바라보았다. 높게 뜬 태양 아래 티아제 궁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아홉 살 때 약혼을 하면서부터 이 궁이 제 궁이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정식 입궁을 할 줄 알았던 곳이었는데. 이렇게 쫓기듯 먼저 들어왔다.

올리비아가 습관처럼 머리를 쓸었다. 손가락에 걸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보자 끊임없이 마델레이네가, 혼절했다는 에셀라가 연상되었다.

독한 말을 뱉고도 제풀에 놀라던 에셀라.

어려서부터 에셀라는 잔병치레가 많았다. 그럴 때면 늘 아버지와 콘라드의 눈을 피해 손을 잡으러 갔었다.

어제 제대로 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렇게 다시 손을 잡아 줄 수 있을까 고민하지는 않아도 되었을 테니까.

……말한다고 믿어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입속에서 말을 굴린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듯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실망이 아니었다.

이건 체념이었다.

늘 가족에게 외면당할 때마다 느꼈던 슬픔이, 고통이, 함께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없었다.

장장 십사 년 동안이나 그토록 노력하게 만든 제 원동력이 사그라들었다.

때늦은 자각에 올리비아는 숨을 삼켰다. 초록색 눈동자가 겁에 질린 것처럼 흔들렸다.

* * *

찬란하던 태양이 붉게 물들었다. 태자비 궁의 야외 정원에 있던 올리비아는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수요일의 약속 시간은 오늘도 훌쩍 지났지만 레오포드는 오지 않았다.

연회 때 첫 춤을 거절한 것에 대해 아직도 화가 난 걸지도 모른다. 두 번째 춤을 출 때 일부러 거칠게 대하던 레오포드가 떠올랐다.

춤이 끝나기 무섭게 뒤돌아갔던 모습도.

올리비아는 물끄러미 제 잔 속 식은 홍차를 바라보다가 따르지도 않은 빈 잔을 응시했다. 심장이 콩콩 뛰었다.

그래도 아직 레오포드한테는 바라고 싶었다.

기대를 걸고 싶었고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받고 싶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는데.

올리비아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문득 저만치 걸어가는 시녀 한 명이 보였다. 수많은 시녀들 중 유독 그 시녀가 눈에 띈 건 그녀가 들고 가는 티 포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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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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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공녀님.”

가까이 시립해 있던 소프론 남작 부인이 다가왔다. 올리비아는 시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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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시녀가 들고 가는 게 내 티 포트 맞죠.”

초록색 꽃이 양각으로 새겨진 티 포트는 도자기로 유명한 거스윈 왕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태자비 궁의 티 포트 중 올리비아가 가장 아끼는 티 포트기도 했다.

저건 제국에서 딱 두 세트밖에 없었다. 지금 올리비아 앞에 한 세트. 그리고 저기 한 세트.

티 포트를 손질하는 날도 아닌데 어딜 가져가는 건지 물으려는데 소프론 남작 부인이 과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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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게……. 그게.”

불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올리비아가 벌떡 일어났다. 소프론 남작 부인이 갑자기 올리비아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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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공녀님! 어디를 가시려고 그러세요.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남작 부인의 손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을 보자 올리비아의 불안함은 확신으로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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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갈게요. 부인.”

심장이 쿵쿵 뛰는데 목소리는 더없이 태연했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남작 부인이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올리비아는 어느 정도 알아차렸다.

지금 간다면 어쩌면.

레오포드에게조차 바라지 못하게 될 거라는 것을.

왜 이렇게 지독한 일들은 한 번에 오는 걸까. 올리비아는 누군가에게라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답을 내야 하는 건 올리비아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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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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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가 태자비 궁으로 들어왔다면서요.”

투정을 부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췄다. 마리아 에텔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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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더군.”

기분 나쁜 듯 레오포드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이내 애교를 부리는 마리아 에텔의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번졌다.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든 올리비아와 정반대였다.

올리비아가 있던 야외 후원에서 고작 5분 거리에 떨어진 화원에서 레오포드와 마리아 에텔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올리비아가 가장 아끼는 티 포트로, 올리비아의 궁에서.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궁은 제게 허락된 궁이었다. 레오포드가 무슨 말을 하든 이건 부당했다.

올리비아가 이를 악문 채 앞으로 걸어 나가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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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세요. 레오포드?”

마리아 에텔이 레오포드의 이름을 부른 순간. 올리비아는 굳어 버렸다.

약혼녀인 저조차 지고한 태자의 이름을 부른 적 없었다. 하지만 주변에 시립한 시종들은 익숙한 것처럼 아무 말도 없었다. 심지어 보좌관인 하지스 백작조차도 말이다.

마리아 에텔이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겼다. 레오포드가 마리아 에텔의 금발을 한 줌 잡아 입을 맞췄다.

다행이었다. 레오포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늘 짜증스레 저를 보는 새파란 눈빛이 마리아 에텔을 사랑하듯 보면 정말 무너졌을지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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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궁이 꼭 저를 닮았다 하셨잖아요. 이렇게 노을이 물든 날이면 꼭 제 금발처럼 찬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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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말이지.”

멍청한 소리였다. 여긴 은빛의 태자비 궁이었다. 당장이라도 반발을 하고 싶은데. 레오포드와 마리아 에텔, 그 너머로 노을 진 태자비 궁이 정말 금빛으로 빛났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늘 제 것인 줄 알았고, 저를 닮았던 궁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올리비아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건 꿈속일지도 모른다. 대공저의 이불이 너무 포근해서 지금도 자고 있는 건 아닐까.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리듯 마리아 에텔이 종알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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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마다 이곳에서 태자 전하와 있는 게 좋았는데. 이러면 제가 약혼자 같았거든요.”

심장이 선뜩해졌다. 늘 바빴던 레오포드는 저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곳에서 마리아 에텔을 만났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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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가 이곳으로 들어온다면, 이렇게 보기는 힘들겠죠?”

바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마리아 에텔이 말끝을 늘였다.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 왈칵 올라왔다. 본능이 얼른 뒤돌아서라고 경고했다. 빨리 어디론가 도망가라고.

하지만 올리비아가 움직이는 것보다 레오포드의 말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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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단호하게 부정한 레오포드가 목울대를 울리며 웃었다. 올리비아가 가장 좋아하는 웃음소리 끝에 나직한 선고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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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가 주제 파악을 잘해. 절대로 그대에게 폐 끼치는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쿵.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감정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올리비아의 모든 기대들이 무너졌다.

한 번만 돌아봐 주길 바랐던 가족들도, 사랑을 갈구했던 약혼자도.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꼭 데뷔탕트 같았다. 웃지 않으면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서 꾹꾹 눌러 참던 그 날.

그날도 제 스스로한테 중얼거렸다.

바보 같은 올리비아. 멍청한 올리비아.

오지 말걸.

그토록 바랐던 모든 것들이 파도를 맞은 모래성처럼 쓰러졌다.

제 짝사랑의 끝은 결국 이렇게 끔찍한 거였다.

올리비아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엄마 말대로 숨을 참았는데도 고통이 밀려왔다. 괜찮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는 틀렸다. 최선을 다해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걸 자각했을 때 지독한 비참함이 올리비아를 휘감았다.

정말로 갈 곳이 없어졌다. 그 어디에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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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만, 저희 커피 하우스 마감 시간이어서요.”

 
사위가 어둑하게 가라앉은 러헤이른 거리. 커피 하우스를 나온 올리비아는 로브를 더 꼭꼭 여몄다. 머리카락을 숨기자 아무도 마델레이네 공녀라고 알아보지 못했다. 가까이에 있던 커피 하우스 종업원조차도.

떠들썩한 술집 거리를 등진 채 올리비아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불 꺼진 보석상을 지나 문 닫은 상점가로. 그리고 골목으로.

드러난 뺨 위로 닿는 밤공기가 서늘했다. 어둑한 골목으로 접어들수록 이상한 냄새가 함께 나기 시작했다. 생리적인 공포가 올라왔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본능이 올리비아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기시감이 느껴지는 거리에 올리비아가 걸음을 멈췄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어딘가 익숙한 곳.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골목에 선 채 올리비아는 가만히 주변을 살피다가 바람 빠지는 것처럼 허탈하게 웃었다.

구획 정리로 판잣집들이 사라진 곳. 이곳은 제가 떠나왔던 터닝벨이었다.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집들이 환영처럼 보였다. 올리비아가 선 곳은 엄마와 함께 살던 집의 자리였다.

결국 돌아온 곳이 겨우 여기였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좁은 골목에 퍼지던 짜랑한 웃음소리가 점점 허물어졌을 때, 올리비아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갈 곳이 없어졌다.

그토록 노력했는데도 결국 올리비아가 마음 편하게 온 곳은 이 더럽고 냄새나는 골목 안이었다.

고되게 걸었던 다리가 풀렸다. 올리비아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값비싼 드레스 자락에 구정물이 묻었지만 아무런 상관없었다.

이제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정리된 한 문장이 올리비아를 쿵 때렸다. 올리비아는 무릎을 감싼 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모든 게 무의미했다. 제 몸이 텅 빈 상태처럼 느껴져서 울 수조차 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이렇게 있다 사라지면 좋을 텐데. 올리비아가 쓸쓸하게 웃을 때였다.

멀리서 다급히 달리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졌다. 올리비아의 몸이 본능적으로 굳었다. 구획은 정리되었지만 아직도 부랑자가 떠돌지 몰랐다. 생각하지 않은 공포가 몰려왔다.

누구라도 제발 도와줬으면 좋겠는데.

본능적으로 생각하다 문득, 올리비아는 처음으로 도움을 바랐던 데뷔탕트가 떠올랐다. 제발, 수도 없이 바랐던 제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포기가 익숙해졌다. 올리비아가 입술을 깨문 채 부디 발소리가 지나가길 빌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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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은 즐거웠어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희미한 달빛 아래 보이는 얼굴은 대공이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딱딱하게 굳어 있던 대공의 얼굴에 안도가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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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코트하려고 대기 중이었는데. 여기에도 볼일이 있는 거예요? 쌀쌀할 텐데 일어나는 건 어때요?”

농담을 던지는 목소리가 점점 풀어졌다. 대공은 스스럼없이 올리비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고급스럽고 두툼한 로브를 올리비아에게 둘러준 뒤에야 대공이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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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이 맞닿은 순간 붉은 눈이 애틋하게 저를 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현실성 없는 일의 연속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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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기에 계세요?”

올리비아가 느리게 말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형편없었지만 대공은 비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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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아가씨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대공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하다는 말에 올리비아는 혼란스러웠다.

아무도 저를 구해 준 적 없는데. 대공은 왜 자꾸 불쑥불쑥 나타나 저를 도와줄까.

심장이 두근거렸다. 기대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면서도 올리비아는 대공을 바라보다 입술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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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가 여기 있다고 해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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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서요.”

말문이 막혔다. 저 남자는 대체 누구기에, 왜 저렇게 저를 다정하게 보는 걸까. 왜 저를 이렇게 귀하게 대해 주는 걸까.

입술을 깨물었는데도 왈칵 울음이 번졌다. 남자의 얼굴이 부옇게 흐려졌다.

대공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너무 귀해서 손도 대지 못하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남자가 웃겨서, 또 좋아서.

올리비아가 울음 섞인 투정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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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곳이 없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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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요.”

남자가 단박에 부정하며 올리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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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저의 모두는 오늘 아가씨께서 외출을 나가시는 순간부터 손꼽아 돌아오시길 바랐거든요. 물론 제가 제일 바랐답니다.”

그 와중에도 급하게 덧붙이는 말이 웃겨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울음을 허물고 웃었다. 그 옅은 웃음마저도 반갑다는 듯 남자가 빙그레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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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도 저와 함께 가 주시겠어요?”

올리비아는 남자의 손을 바라보았다.

정말 저 손을 잡아도 괜찮을까.

짧게 고민하던 올리비아가 대공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동시에 대공이 벅찬 얼굴을 했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제 마음속 새로 싹튼 기대를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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