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17. 가족에 대한 최선이 무너졌다 (17/151)


#017. 가족에 대한 최선이 무너졌다
2022.04.27.


에셀라가 알아 버렸다. 어떻게, 아니 어디까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졌다.

언젠가는 에셀라도 알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로 말하게 될 줄 알았다. 이렇게 갑작스레 무방비하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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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라. 내 말 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올리비아가 절박하게 에셀라를 불렀다. 퍼석하게 마른 목 안쪽이 긁히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졌다.

늘 애정을 담아 웃던 에셀라가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가가 붉게 짓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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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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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대지 마! 더러워!”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짝- 살 부딪히는 마찰음이 거셌다.

올리비아가 멍하니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느리게 손이 떨리는 건 손이 아파서가 아니었다.

경멸 섞인 에셀라의 말이 폐부를 훅 찔렀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다.

에셀라도 놀랐는지 숨을 급하게 들이마셨다. 올리비아는 입매에 힘을 주었다. 괜찮다고 웃어 주고 싶은데 입매가 덜덜 떨려서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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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안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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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하는 척하지 마. 언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새파랗게 날 선 비명 속 원망이 올리비아를 찔렀다.

아니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에셀라는 저 때문에 빼앗긴 걸지도 몰랐다. 다정하고 상냥하던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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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때문이었어. 엄마가 갑자기 사라진 게. 다 언니 때문이었다고!”

소리를 지르는 에셀라의 얼굴이 흠뻑 젖었다. 턱선을 따라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올리비아는 입술을 다문 채 입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적어도 에셀라 앞에서는 울 수 없었다. 보듬어 줄 수도 없고, 손도 잡아 줄 수 없는 입장에서 올리비아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눈물이 흐를까 눈에 힘을 주었는데도 바닥이 계속 번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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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언니도 아니야! 너 따위는! 나가 버려! 꼴도 보기 싫어!”

결국 에셀라가 악을 쓰며 엉엉 울었다.

침대에 엎드린 에셀라의 울음소리가 올리비아의 어깨를 무겁게 눌렀다. 에셀라를 향해 뻗어 나가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올리비아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그 짧은 거리를 비틀거렸다.

문이 열리기 무섭게 바깥에 서 있던 시녀들이 올리비아를 밀치듯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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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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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가! 다!”

비명 같은 에셀라의 말에 시녀들이 얼어붙었다. 햇살 같은 에셀라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게 다 첫째 공녀님 때문이다. 내쫓기듯 방을 나선 시녀들이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이럴 때까지 꼿꼿하게 걸어가는 건 뭐야. 다 저 여자 때문인데.

잔뜩 독 오른 시녀들은 미처 보지 못했다. 바짝 세운 어깨선이 덜덜 떨리는 것도, 어딘가 휘청거리는 걸음도. 맥없이 울음을 참는 붉은 눈가도.

* * *

어떻게 방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방문을 닫은 뒤 올리비아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분명히 아까까지만 해도 행복했는데. 꽃을 받고, 목걸이를 받고, 칭찬을 받고. 에셀라에게 줄 선물을 받고.

낯설게 찾아오는 행복이 불행의 전조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이미 한 번 겪었으면서 멍청하게 기뻐하기만 했다.

저를 공주라고 불러 주던 제이드와 에셀드가 파편처럼 깨져 올리비아를 찔렀다.

헤집어진 상처들 위로 뭉글뭉글한 고통이 몰려와 올리비아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먹먹하게 더운 호흡이 올리비아의 숨을 막았다.

언젠가는 다시 올 줄 알았다.

제이드도 에살라도. 한 번도 끼워 주지 않던 콘라드와 아버지까지도 함께하는 날이 올 줄 알았는데.

정작 에셀라마저 저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게 아팠다.

숨 쉬기가 힘들어 목 부근을 쓸어 보는데 딱딱한 게 만져졌다. 손가락으로 더듬어본 건 대공한테 선물 받은 핑크 다이아몬드 목걸이였다.

에셀라와 함께 하기로 했던 것.

올리비아가 숨을 뱉었다. 잔뜩 일렁이던 울음을 삼키고 눈물이 고이던 눈을 감았다 떴다.

아직 에셀라한테 제대로 말하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다 끝난 것처럼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올리비아는 허물어진 마음을 다시 다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덜덜 떨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시 에셀라한테 가서 말을 해야 했다.

그건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에셀라가 들어준다면 어쩌면. 미약한 희망이 움텄다.

그런데 올리비아가 복도로 나왔을 때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했다. 분주하기도 했고 급박한 것 같기도 했다. 이 모든 방향은 에셀라의 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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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은 어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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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가씨 혼절하셨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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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시더니. 몸도 약하신 분이.”

누군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뜩한 공포가 올리비아를 휘감았다.

에셀라가 혼절이라니.

다리가 풀려 벽을 짚으면서 올리비아는 에셀라의 방으로 걸었다. 저 멀리 방 앞에 서 있는 하녀들 너머로 공작이 보였다. 황급히 달려왔는지 늘 반듯하게 넘긴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공작이 올리비아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서늘한 기운에 올리비아가 몸을 잘게 떠는 사이 공작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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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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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정말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꾹꾹 누른 분노가 올리비아를 짓눌렀다. 번뜩이는 두 눈이 벨 듯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바쁘게 오가던 사용인들이 조용해진 채 슬금슬금 물러났지만 그조차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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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셀라만은 모르게 하라는 말조차 못 지키는 거냐.”

악문 잇새로 나오는 날 선 말. 차갑게 굳은 채 바라보는 자수정 색 눈.

부인이 죽고 에셀라가 아팠던 그날과 똑같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공작이 나직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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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징그러운 불행을 결국 에셀라한테까지 옮긴 거냐?”

쿵-.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어딘가 올리비아를 지탱하던 한 축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황급히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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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공작이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진심 같은 말이 연신 올리비아를 무너뜨리는 것은 신경 쓰지도 않은 대공이 올리비아를 지나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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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만 있다면. 너를 내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귀에서 이명이 삐- 하고 들리고 현실이 이상하게 멀어졌다.

이건 꿈일 거다.

에셀라가 혼절했다는 것도, 아버지가 제게 한 말도 모두 거짓일 거다.

그래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잠깐 미워하는 게 길어진 걸 테니까.

멍한 시야 너머에 허겁지겁 뛰어오던 콘라드가 보였다. 올리비아는 구원을 바라듯 콘라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늘 무표정한 얼굴에 걱정이 섞여 들어간 것을 발견한 순간, 올리비아의 기대가 부풀 새도 없이 콘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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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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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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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어머니로 모자라 에셀라까지 잡으려고 들어?”

어쩌면 저렇게 아버지를 닮았을까.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악몽이라면 깨어났으면 좋겠는데. 콘라드의 매서운 비난은 올리비아의 속을 계속 파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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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면 적으라고 했잖아. 제발 외워서라도 에셀라의 곁에 오지 말라고.”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경고를 마친 콘라드가 에셀라의 방으로 들어갔다. 올리비아는 두 번째 축마저 무너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토록 금이 가도 엉성하게 이어붙였던 기대가 지독하게 망가졌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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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

불처럼 흥분한 제이드의 목소리가 소리쳤다. 아래 계단부터 단숨에 뛰어 올라온 제이드가 우악스레 올리비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올리비아는 종이 인형처럼 제이드의 손짓에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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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했잖아. 에셀라한테는 들키지 말라고! 어떻게 너는 그거 하나 못 지켜?”

짐승처럼 으르렁대듯 말하는 제이드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성급한 분노가 오직 올리비아를 향했다. 올리비아는 흔들리는 대로 멍하니 제이드와 눈을 맞췄다.

그 순간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제가 그토록 바랐던 날은.

가족들이 저를 향해 웃어 주는 그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임을.

제 최선은 이렇게 보잘것없다는 것을.

숨이 막혔다. 올리비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이드의 손에 힘이 빠지는 것도 모른 채 올리비아는 제이드의 뒤로 시선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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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에셀라 보고 와서 다시 이야기해.”

낮게 위협하듯 말하던 제이드가 서둘러 에셀라의 방으로 간 사이.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목 부근을 더듬었다. 손에 걸리는 목걸이를 잡아 뜯었지만 단단한 잠금쇠가 풀리지 않았다.

숨이 쉬고 싶어서 올리비아는 무작정 걸었다.

스쳐 지나가는 흐릿한 시야에 언뜻 사용인들이 저를 동정하듯 바라보는 풍경이, 바짝 얼어붙은 샐리가 꽃을 들고 있던 게, 허겁지겁 뛰어 들어가는 의원이 걸렸다.

그리고 마지막은 1층에 걸린 초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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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하.”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마르기라도 했는지 초상화가 또렷이 보였다. 마델레이네 가족을 그린 초상화 속에서 혼자 어색하게 잔뜩 긴장한 어린 제 자신이.

가엾고, 어리석은 올리비아.

저렇게 어울리지 않는 게 훤히 보였는데.

이제까지 왜 몰랐을까.

올리비아가 허무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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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이는 계단 위와 달리 1층은 아무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문을 열고 저택을 나섰다.

정원 위로 새까만 밤이 펼쳐졌다. 어디로 가야 할까. 올리비아의 머릿속이 느리게 움직였다. 가까운 호텔이라도 좋았다. 어디든 이 저택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대문에 서 있던 기사들이 기척을 느꼈는지 의아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묵묵히 올리비아가 걷기만 하자 기사들 중 한 명이 문을 열었다.

높다란 대문이 열리고 한 발자국 저택 밖으로 나섰을 때. 올리비아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쉬었다. 가슴을 옥죄이던 끈이 한 겹 풀어진 듯 가냘픈 호흡이 가쁘던 찰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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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나른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왈칵 감정들이 몰아쳤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 대공이 있었다.

커다란 마차를 등지고 대공이 손을 흔들었다. 손에 들린 보석 핀이 달빛에 반짝이는 사이, 대공이 기분 좋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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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 보석 핀 때문에 나를 마중 나온,”

대공의 말이 뚝 끊겼다. 분명히 초상화는 잘 보였는데. 이상하게 대공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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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저녁이에요. 대공 전하.”

덤덤한 목소리가 이리저리 갈라졌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할 때마다 올리비아는 잔기침을 했다. 목이 따끔거렸다.

대공이 단숨에 달려와 올리비아의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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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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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라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올리비아는 띄엄띄엄 말하다가 조금 웃었다. 대공의 걱정 어린 얼굴이 웃겼다.

저 남자는 왜 맨날 저렇게 자신을 보는지 모르겠다.

왜 혼자서 애달픈 표정을 지을까.

제 가족도 보여 주지 않는 얼굴을.

이건 충동이었다. 대공만 보면 갑자기 생기는 충동.

올리비아가 빙그레 입꼬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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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게 어느 정도까지 잘해주실 수 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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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해 줄 수 없는 게 손가락에 꼽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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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저 좀 도와주세요.”

갈 곳이 없거든요.

올리비아는 입속으로 말을 삼키고 웃었다.

터질 듯 붉은 눈매 속 눈물조차 말라붙은 녹색 눈동자를 마주한 대공은 올리비아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 * *

이곳이 대공저구나.

화려하고 우아한 방. 올리비아는 어딘가 멍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철옹성 같은 대공저의 대문 안에는 음침한 소굴이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정작 들어온 곳은 여느 저택 부럽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진 저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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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푹 쉬어요. 아가씨가 편안하게 지내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올리비아는 대공의 말을 곱씹다 설핏 웃었다.

대공은 눈치가 빨랐다. 예의상 말하는 “제집이다 생각하고 편하게 지내라”는 말이 빠졌다.

아마도 조금은 들킨 모양이었다. 제가 왜 이 시간에 저택에서 나왔는지.

올리비아의 입술 새로 무거운 한숨이 나왔다. 긴장이 풀리자 어깨와 손등이 욱신거렸다. 붉게 부은 손등을 올리비아는 애써 외면했다.

대신 아까보다 훨씬 맑아진 머릿속에 여러가지 계획을 그렸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가 대답하자 하녀 한 명이 들어왔다. 머리카락이 밝은 밀짚 색이라는 걸 제외한다면 샐리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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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를 뵙습니다. 대공저의 하녀, 해나입니다. 불편한 거나 필요하신 건 없으신지 여쭤보러 왔습니다.”

잔뜩 긴장한 얼굴이 앳되었다. 올리비아가 웃자 해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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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하고 좋아. 고마워요.”

정말이었다. 드레스 하나 안 가져왔는데 옷장을 가득 채운 드레스와 잠옷용 슬립, 외출용 구두에 보석들까지. 대공저는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딱 제 치수에 맞는 것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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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편히 하세요. 아가씨께서는 이 대공저 모두의 귀한 손님이세요. 혹시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 이 줄을 잡아당겨 주세요. 무엇이든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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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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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하께서 아가씨가 원하시는 거라면 뭐든 수행하라 하셨습니다!”

해나의 얼굴이 조금 들떠 있었다. 그 얼굴에 올리비아는 작은 부탁을 했다. 부탁을 들은 해나가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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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내일 새벽 같은 아침에 출발하신다고요? 그것도 문양 없는 마차로요? 그걸로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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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 넘치지.”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해나가 나갔을 때, 불 꺼진 방 안에서 올리비아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무너진 속이 헛헛했다.

잠이 들 수 없는 밤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들에 올리비아는 이를 악물었다.

울지 말자.

하지만 새까만 어둠이 밀려나고 햇살이 들기 전 가장 컴컴할 때.

아무도 모르게 올리비아의 눈가가 아주 조금 젖어 들었다.

* * *

통유리로 어렴풋한 아침이 몰려왔다. 대공은 창밖을 응시했다. 마차 한 대가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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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께서는 황궁으로 향하셨습니다.”

하워드가 깍듯하게 보고했다. 대공은 마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깥을 보았다. 마차가 사라졌을 때, 대공은 손에 들고 있던 쪽지를 내려다보았다.

- 베풀어 주신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아직까지는 태자 전하의 약혼녀로 당분간 거처를 태자비 궁으로 결정했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초대해드리겠습니다. 늘 친절하신 분께.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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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똑 부러지는 아가씨야. 예전이나 지금이나.”

고혹적인 중얼거림 끝에 한숨이 섞였다. 대공이 그리운 눈으로 책상 위를 훑었다. 고운 색상의 편지들이 한가득 올려져 있었다. 우아한 필체로 쓰인 발신인은 ‘리브 그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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