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 대공이 기사의 맹세를 바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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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대공이 기사의 맹세를 바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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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1. 대공이 기사의 맹세를 바칠 때
2022.04.06.
말도 안 돼.
올리비아의 입술이 작게 벌어지는 사이. 황제가 기사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올리비아가 아는 남자가 기사들을 대표하듯 황제를 향해 예를 갖췄다.
“제국의 태양께 경배를.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내 자랑스러운 기사들이 이제야 왔군. 자네들을 위한 연회인데 어찌 이리 늦었어.”
황제의 뼈 있는 말에 남자, 대공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송구합니다. 폐하께서 주관해 주시는 맹세에 일반 검을 사용할 수 없어, 비칸데르령에 있는 가보 아이라루텐을 가져왔습니다.”
대공이 제 검집을 가리켰다. 연회장에 퍼지는 근사한 목소리에 사람들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이내 소란스러워졌다.
“저게 그 검이야? 망국 로웰 왕가에서 대대로 내려왔다던 보물?”
“폐하께서 저 검을 그렇게 탐내셨는데. 그 아끼던 백수정 광산을 바칠지언정 저거는 그렇게 싸매고 안 드렸다며?”
“근데, 폐하께서 무슨 맹세를 주관하신다는 거야? 이거 전쟁 승리 연회 아니었어?”
의문 섞인 소란함이 일었다. 황제는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로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역시 기사란 모름지기 제가 영광을 바칠 수 있는 레이디를 두어야지. 내 대공이 오늘 걸맞은 레이디를 맞는다는 게 기쁘니 소원 하나를 꼭 들어주지.”
황제가 들어주는 소원이라니. 연회장 한쪽에서 소란이 일었지만, 대공은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황제가 은근하게 황녀를 향해 눈짓했다.
그 순간 사람들은 모두 다 이해했다. 결국 이 연회의 목적은 대공을 황실로 복속시키는 것이었다.
황제가 껄껄 웃었다.
“이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닌가. 우리 프란츠 제국을 지키는 대공이 늦게나마 레이디한테 기사의 맹세를 한다 하니. 자. 대공. 맹세를 하게.”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황녀가 어느새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기사 서품식 때마다 모든 기사들의 영광을 한 몸에 받던 황녀가 대공을 향해 몸을 튼 순간이었다.
대공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는 듯 주변을 쭉 훑었다. 어느 순간, 올리비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대공의 눈이 길게 휘어졌다.
올리비아는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대공이 더 빨랐다.
대공이 걸을 때마다 귀족들이 길을 내주었다. 그 끝에, 올리비아가 있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공녀.”
고혹적인 목소리가 올리비아의 이름을 불렀다. 대공이 유려한 몸짓으로 올리비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름을 밝힐 수 있어 영광입니다.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입니다.”
황제를 대하던 무표정이 깨진 채, 우아한 눈매 속 붉은 눈동자가 짓궂게 반짝였다. 입매 끝이 빙그레 올라가던 순간 어디에선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필요도 없을 자기소개가 무슨 말인지 바로 알아듣는 사람도.
“보검과 보석을 합친, 대륙에서 단 하나뿐인 ‘가장’ 귀한 검입니다.”
자랑 섞인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사람도 오직 올리비아와 대공 단둘뿐이었다.
“부디 제게. 당신의 검이 될 수 있는 영광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연회장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올리비아는 대공을 바라보았다.
사람 숨 막히게 하는 화려한 얼굴이, 봄처럼 다정함을 가득 담은 붉은 눈동자가 올리비아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했다.
러헤이른에서 처음 만났을 때도, 지난 월요일 태자궁에 갈 때도, 아니, 조금 전 제게 걸어올 때만 해도 한참을 올려다봐야 했는데.
누구든 올려다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고귀한 신분의, 영광스러운 명예를 거머쥔, 훤칠하게 큰 남자가 당연하다는 듯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올리비아의 선택에 무조건 따르겠다는 듯, 보기만 해도 귀한 검의 손잡이를 내미는 일 자체가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올리비아가 붉은 입술을 느리게 떼려던 참이었다.
“아쉽게도 맹세는 거둬야겠습니다. 대공.”
레오포드였다. 레오포드는 올리비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제 것이라고 선포하는 행동에 대공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지금 제가 마델레이네 공녀께 바치는 맹세에 끼어드신 겁니까?”
나지막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겁박하듯 레오포드에게로 향했다.
“그것도 황제 폐하의 승인까지 받은 맹세에?”
대공의 입매 끝이 비뚜름하게 올라갔다.
감히, 올려다보는 주제인데도 대공의 눈은 마치 내리찍는 것처럼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그 붉은 눈이 주는 위압감이 가당치도 않아서, 레오포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를 잡는 힘에 아픔을 느낀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레오포드를 올려다보았다. 레오포드는 올리비아를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태자가 나섰는지는 들어 보는 게 좋겠군.”
팽팽한 분위기를 황제가 중재했다. 레오포드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인 뒤 올리비아를 향해 다정하게 웃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이제야 저를 봐 주는 레오포드가 야속했다. 아픈 어깨라도 풀어 줬으면 했지만, 레오포드는 더 친밀한 척 어깨를 감쌌다.
처음으로 레오포드가 곁을 내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레오포드가 멀게 느껴졌다.
“공녀는 지금 내 약혼녀입니다. 미혼의 대공이 맹세를 바치면 내 약혼녀에게 추문이 붙을 수 있다는 생각 따위는 없는 겁니까?”
레오포드의 딱딱한 목소리에 귀족들이 웅성였다.
“아무래도 보기 좋지는 않죠. 가장 정숙해야 할 예비 태자비가.”
“지금도 공녀가 몰고 다니는 소문이 한두 개인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정말. 황후 폐하의 은덕으로 지금 약혼을 유지하는 것이면서.”
어느 순간 귀족들의 말이 끊겼다. 날카로운 기세가 귀족들을 찔렀다. 서늘한 기운이 귀족들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을 때.
“감히…….”
나지막한 한마디가 분위기를 압도했다. 대공의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내가 맹세를 드리는 공녀께 무슨 추문이 붙을 수 있을까?”
“그, 그것이…….”
그 어떤 귀족도 나서지 않았다. 대공은 낯을 바꾸며 올리비아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러면 해결이 되었을까요?”
“……맹세가 성립되면 첫 춤을 추어야 하는데 공녀와 동행 중인 내게 실례라고 생각하지는 않나?”
건조한 레오포드의 말에 올리비아의 몸이 티 나지 않게 굳었다.
동행이라기에는 마리아 에텔과 더 가까웠던 레오포드.
누가 보아도 약혼자로 대접받지 못하는 모습이 언급될까 올리비아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던 찰나였다.
“아, 난 또.”
아쉽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위해 공녀께서 일부러 혼자 와 주신 줄 알았는데.”
대공의 눈매 끝이 아주 잠시 장난스레 휘어졌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양, 태연하게 레오포드를 향해 말했다.
“불가피하게 태자 전하께서 다른 이와 동행하는 줄 알았는데. 이 모든 게 내 착각이었군요.”
“대공.”
레오포드가 경고하듯 대공을 불렀으나 대공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마음 넓은 태자 전하께서 설마 첫 춤 때문에 이러시는 건 아니겠죠.”
레오포드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러는 새, 대공이 올리비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농담처럼 덧붙였다.
“……뭐, 내가 공녀께 혼인이라도 청했다면 모를까.”
뭐?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지금 대공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대공!”
레오포드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하지만 대공은 오히려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듯 빤히 레오포드를 마주했다.
“오라버니. 예법에 맞지 않은 차림은 왜 이야기하지 않으세요.”
잔뜩 당겨진 분위기 위로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녀였다.
독 오른 표정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본 황녀가 금세 화사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맹세를 받는 레이디께서는 기사의 절개를 상징하는 흰 복장으로 맹세를 받으셔야 합니다. 또한 허락과 기쁨의 표시로 기사에게 꽃을 전달해야 하는데.”
말끝을 흐린 황녀가 올리비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오포드와 닮은 새파란 눈이 진득한 적의를 담고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공녀는 오늘도 준비가 미흡한 모양이네요.”
“맞아요. 기사 서임식 때 모든 레이디들은 흰옷을 입잖아요!”
“그러고 보니. 왜 그걸 생각 못 했을까요? 지금 이 자리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을 깨려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죠.”
높은 목소리들 사이로 비웃음이 섞여 들렸다. 올리비아는 힐끗 웃음이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샤민 백작 영애, 스타렌 남작 영애, 리베오른 후작 영애까지. 모두 황녀의 놀이 친구들이었다.
“단 한 번도 맹세를 받아 보지 못해서인지, 복장에 대해서도 잘 모르나 보군요. 하긴, 뭐 그게 공녀의 탓이겠습니까?”
모욕이나 다름없는 말이 웃음 사이에서 나왔다 사라졌다. 심장을 후벼 파듯 아픈 말인데.
늘 그렇듯 저만치 떨어진 아버지와 콘라드는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고,
“그러게. 대공. 어쩌겠나. 내 약혼녀가 준비가 안 되었다는데.”
레오포드마저도 황녀의 말에 동조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것보다 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저 붉은 눈이 더 신경 쓰였다.
말이 나온 곳을 바라볼 때는 그리도 차가우면서도, 몇 번 본 저를 대하는 눈빛이 따뜻해서.
웃긴 일이었다. 고작 저 시선 한 가닥이 뭐라고.
이 모든 게 얄궂게도 간지러워서. 올리비아는 느릿하게 입술을 떼었다.
“……처음 역사서에 기사의 맹세가 나온 게 리암 프란츠, 제국의 초대 황제와 올리카 프란츠 황후 때였습니다.”
이 상황 속에서 올리비아는 누구보다 우아하고 침착하게 말했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서 역사서가 왜 나온단 말인가 하던 귀족들 중 몇몇의 눈빛이 달라졌다.
“제국의 경계선을 지정했던, 아스팔테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초대 황제께서는 피 묻은 갑주 그대로 초대 황후를 끌어안으셨습니다.”
올리비아가 부드럽게 어깨를 뺐다. 레오포드가 올리비아를 가두듯 힘을 주었지만, 올리비아는 장갑 낀 손으로 레오포드의 손을 조심스레 떼었다.
“황제께서 안전히 오시기를 바라며 기도를 드리던 황후의 흰 드레스는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레오포드를 뒤로하고 올리비아는 대공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 저를 마주하는 눈을 끝까지 바라보면서, 올리비아는 빙그레 웃었다.
“황후께서는 장갑만은 새하얀 그대로인 채 재단에 바쳤던 꽃을 황제께 드렸다고 합니다.”
화려한 샹들리에 빛에 올리비아의 흰 장갑이 반짝이는 걸 모두가 확인했다.
영애들의 말이 맞았다. 스물이 될 때까지 그 어떤 기사도 제게 맹세를 바친 적이 없었다.
매번 서임식 때마다 흰 드레스 차림으로 참석했지만, 올리비아는 벽의 꽃처럼 늘 가만히 있었다.
연회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태자의 약혼녀였고 동시에 공녀였으니까.
맹세를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법을 모른다는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제 예법은 늘 완벽했고, 앞으로도 완벽할 것이었으니까.
그게 마델레이네로서, 올리비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고서의 예법을 따른다면, 지금 제 차림보다 완벽한 재연은 없겠네요.”
올리비아가 제 드레스 자락을 슬쩍 들어 보였다. 순백의 레이스 장갑이 반짝이는 가운데, 짙게 가라앉은 적색의 드레스는 피에 젖었다는 초대 황후의 흰 드레스를 대신하기에 충분했다.
“감사합니다. 태자 전하. 그리고 황녀 전하.”
서늘하게 올리비아를 쏘아보는 레오포드와 달리 레이나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존경하는 두 전하의 확실한 정리 덕분에 잡음 없이 제가 맹세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은 가짜였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덕분에 논란은 불식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꽃은!”
황녀 대신 리베오른 후작 영애가 소리쳤다.
“감히 대공 전하의 정절에 한철 시들 꽃을 바칠 수 없어, 이 보석으로 제 마음을 대체합니다.”
올리비아는 머리카락을 고정했던 보석 핀을 빼었다. 화려한 은발이 부드럽게 쏟아졌다.
샹들리에 빛에 반짝이는 보라색 꽃과 초록색 꽃받침 머리핀은 에셀라가 이번 연회를 위해 제게 선물한 것이었다.
에셀라의 선물이 이렇게 쓰일 줄은 전혀 몰랐지만. 나중에 부탁을 한다면 보석 핀을 다른 보석으로 바꿀 수는 있을 것이었다. 이상하게도 대공은 제 부탁을 들어줄 것만 같았다.
대공의 손바닥 위에 보석 핀을 올린 올리비아가 대공과 시선을 마주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올리비아가 대공의 손에 있던 보검을 잡았다. 차가울 것 같았던 검 손잡이를 손바닥으로 감싸자 기이한 온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대공 전하의 영광됨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부디 제 기쁨이 다시 전하의 영광에 속하길.”
보검을 감싸 안은 채, 올리비아가 대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어디에선가부터 우렁찬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공이 환하게 웃으며 꿇었던 자세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아, 실례합니다. 공녀.”
올리비아의 어깨를 감싸듯 대공이 제 쪽으로 쓰러졌다. 훅 끼친 온기를 느끼기도 전에 남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바로 몸을 떼었다. 어디에선가 경악과 비슷한 소리가 났지만 올리비아는 개의치 않았다.
“생각보다 오랫동안 꿇어앉아 있었다 보니 다리가 저려서 말이죠.”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훌륭한 기사시라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다리가 연약하신 모양이네요.”
“그러게요. 그나저나. 매번 아가씨께서는 이 연약한 나를 구하시네요.”
넘어질 뻔한 걸 구하고, 통행세를 빼앗길 뻔한 걸 구하시더니.
“그러니 구해 주신 김에, 한 번 더 구해 주세요. 내게 아가씨와 함께 첫 춤을 추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대공이 올리비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리가 저리시다는 분이 바로 춤을 추실 수 있으신가요?”
“금방 괜찮아졌네요.”
대공이 뻔뻔하게 말했다. 올리비아는 잠시 난감하다는 얼굴로 딱 대공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제가 춤에는 소질이 없습니다.”
“저야 좋은데요?”
대공이 환하게 웃었다.
“저는 몸으로 하는 거에는 다 능하니. 이번에야말로 제가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겠네요.”
올리비아가 느리게 대공의 손을 잡았다. 묘한 긴장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퍼지는 사이 뒤에서 근사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축하해. 올리비아. 내 약혼녀께서 기어이 제국 제일의 기사한테 영광을 받으셨군.”
레오포드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표 내듯 형형한 눈이 대공을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