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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아버지의 응접실 (10/151)


#010. 그토록 들어가고 싶었던 아버지의 응접실
2022.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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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상사가 생긴다 해도, 공작의 다른 딸이 오면 되긴 하겠지만요. 참으로 단단한 결속 아니겠어요?”

황후가 낭랑하게 말했다.

레오포드의 짝은 무조건 황실파의 영애가 될 것이었다. 가장 영예로운 자리, 동시에 황후의 똬리에 갇혀 말라 죽을 자리.

모두가 제 딸을 감추는 그 자리에 딸을 가져다 바친 비정한 아비가 바로 공작이었다.

귀한 막내딸은 감춘 채, 제국을 뒤집어 찾은 사생아를 내민 얼음 같은 남자.

그러니 공작은 제가 바라는 대로, 체스판 위의 말처럼 움직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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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보겠습니다.”

공작의 말 앞에 동의가 생략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알았다. 황후는 가는 공작의 뒷모습에 웃음 섞인 말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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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가요. 공작. 남들이 뭐라 하든 우리는 같은 편이잖아요.”

뒤로한 응접실에서 짜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공작, 지오반니 마델레이네는 이를 으득 갈았다.

올리비아. 그 애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기에 황후가 에셀라까지 들먹이게 만드는지.

저택으로 가야 했다. 그 애가 더 일을 망치기 전에.

.
.
.

공작이 나가기 무섭게 체이즈 백작 부인은 바닥에 털썩 엎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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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저는 정말 안 그랬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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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자네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

안쓰럽다는 목소리가 들린 순간 체이즈 백작 부인은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한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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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쩌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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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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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를 향한 증좌가 이리 많이 나오는데, 내가 굳이 자네를 품으면서 마델레이네와 척을 질 일은 없잖아. 안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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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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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제도에 올라와 피곤했을 테니, 몸을 추스를 겸 다시 체이즈령으로 내려가게.”

모든 게 착착 정리되었다. 황후는 떠밀리듯 나가는 체이즈 백작 부인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문이 닫혔을 때, 황후는 다시 소녀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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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었어. 시종장을 겁박하다니. 그 천한 게 제법이야.”

황후의 눈매 끝이 가늘게 좁아졌다. 반쪽짜리지만 마델레이네라 이건가? 흥. 그래 봤자 결국 반쪽짜리다.

그 어디에도 섞이지 못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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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폐하.”

시녀들 중 가장 측근인 오프템 후작 부인이 웃으며 황후의 손 위에 향유를 발랐다.

느슨하게 풀린 황후의 눈매를 확인한 오프템 후작 부인이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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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에텔 영애도 보통이 아니네요. 감히 태자 전하를 사칭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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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은 좀 위험했죠. 정말, 폐하께서 은덕을 베풀어 주지 않으셨더라면 그 사랑스러운 얼굴이 구겨졌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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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정말 폐하께서는 대단하세요. 어떻게 착 아시고는 그렇게 시녀를 보내 두셨을까요?”

황후는 너그럽게 웃으면서 마리아 에텔을 떠올렸다.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진 태자의 연인.

같은 귀족파로서 태자비로 올리지 못한 게 제법 아쉬웠지만, 이렇게 제 발로 재미있는 판을 짜 줄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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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에텔 영애가 카드를 부탁했었습니다.”

 
태자궁에 심어 놓은 시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한 번 크게 덮어 주었으니, 마리아 에텔이 제 말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황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제 손톱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을 새로 할 때가 되었다. 좀 더 길고, 좀 더 날카롭게 말이다.

* * *

창문 너머로 고개 숙이는 시종장이 보였다. 마차가 느리게 출발했다.

체이즈 백작 부인은 퇴궁했다고 한다. 며칠 내로 부인은 다시 영지로 돌아갈 것이다.

늘 황후가 썼던 방식처럼.

평소라면 올리비아도 모른 척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델레이네까지 함께 건든 이상. 이번 일은 아버지한테 말씀드려야 했다.

제 일만이라면 모를까. 목숨처럼 사랑하는 마델레이네의 일이라면 아버지 역시 화를 낼 것 같았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저를 위해서도 아주 조금은 화를 내 주시지 않을까.

올리비아가 피식 웃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더 컸지만 어쩔 수 없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뭐가 되었든, 아버지와 조금이나마 이야기할 이유가 생겼다.

올리비아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마부석 창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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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저기서 세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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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마차가 속도를 늦추고 완전히 멈췄을 때, 샐리가 커다랗게 올리비아를 부르며 마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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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어떻게 왔어?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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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샐리가 밭은 숨을 뱉었다. 잔뜩 긴장한 샐리의 얼굴에 올리비아는 심상찮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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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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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께서 아가씨를 찾으신대요!”

올리비아의 심장이 쿵- 쿵- 거세게 뛰었다. 아버지가 저를 찾는다는 말은, 제가 마델레이네가로 온 뒤 처음 듣는 말이었다.

* * *

짙은 오크 색 문 앞에서, 올리비아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버지의 응접실. 14년 동안 제게 금지되었던 곳.

잘게 떨리는 주먹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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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아입니다.”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열렸다.

공작은 노을이 넘실대는 커다란 창 앞에 서 있었다.

노을빛이 너무 강한 탓에 공작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표정인지 알 수가 없어서, 올리비아는 괜히 주먹을 한 번 쥐었다 풀었다.

응접실은 고요했다. 올리비아는 두근대는 심장 부근을 손으로 꾹 누르며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아버지가 어디까지 들으셨을까. 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도 들으셨을까.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몰라서, 올리비아는 잠시 망설이다 입술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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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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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비.”

올리비아의 말허리를 자르고, 차디찬 목소리가 떨어졌다. 공작이 똑바로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노을을 등진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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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비가 될 것, 딱 그거 하나만 당부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목소리가 한 번, 애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시선이 또 한 번. 올리비아를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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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그거 하나 지키지 못해서 그런 추문을 뒤집어쓰고, 건방지게 태자궁을 뒤집으려고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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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뭔가 오해가 있는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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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가 늘 혼자 있는 네게 위로차 선물을 보냈다고 들었다. 그런데 고작 거기에 끼어 있는 카드를 보고 시종장을 협박해? 그러고도 네가 과연 태자비로서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

묵직한 음성이 날카롭게 올리비아를 공격했지만 올리비아는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지금 아버지는, 저를 오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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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카드가 아니었어요. 태자 전하를 사칭해 저를 우롱했고, 마델레이네를 모욕하는 카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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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왜 마델레이네를 모욕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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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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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들었나? 너를 우롱한 게, 왜 마델레이네를 모욕한 거냐고 물었다.”

형형한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남을 보듯 무감했다.

냉담하게 자르는 말에 올리비아는 폐부 깊숙한 곳을 찔린 듯 숨이 차올랐다.

정말, 정말 오랜만에 보는 아버지였다.

매일 아침마다 제 얼굴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고, 단 한 번도 응접실에 불러 준 적 없지만, 그거야 아직 제 노력이 아버지한테 닿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래도 혼자가 된 저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잠깐이나마 훌륭한 부인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주었고, 형제와 자매를 만나게 해 주었고, 예쁜 비단 드레스를 입게 해 주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 주었고, 또…….

아, 맞아. 가장 귀한 자리라는, 레오포드의 옆자리에 앉혀 주었다.

제가 레오포드를 좋아하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마델레이네의 공녀가 아니었더라면 앉지 못할, 귀한 자리라고 했다.

세면 셀수록 이유가 늘어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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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쩐지 목소리가 흔들려서 올리비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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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델레이네잖아요.”

공작을 향해 터져 나간 목소리가 떨렸다.

공작이 무감하게 올리비아를 바라본 순간, 올리비아는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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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마델레이네라고 주장하고 싶으면, 마델레이네답게 똑바로 굴어.”

아버지와 제 사이에는 아직도 선이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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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신 똑바로 하고. 그런 더러운 소문들. 다시는 마델레이네로 끌어들이지 말고.”

시린 눈빛, 모든 것이 다 제 탓이라는 듯 저를 미워하는 말들. 이 모든 것들이 팔을 붙잡힌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과 똑같은 상황이어서.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올리비아는 쥐어짜듯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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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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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런 소문들이 너를 뒤덮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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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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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네가 태자궁에서 저지른 일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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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냥.”

……마델레이네를 지키기 위한 제 노력이었다. 제가 무시당해도, 마델레이네는 그러면 안 되는 곳이니까.

마델레이네를 함께 지킨다면, 저도 아버지와 한 뼘은 가까워질 줄 알았는데.

공작이 힐난하듯 올리비아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바란 건 딱 한 뼘이었는데, 열 뼘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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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공작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올리비아는 돌아선 채 멍하니 응접실을 바라보았다.

매번 오크 문을 바라볼 때마다 이곳에는 뭐가 있나 궁금했는데.

벽난로 위에 걸린 초상화는 14년 전, 제가 들어오기 전에 그린 그대로였다. 환하게 웃는 공작 부인과 다정한 아버지, 그리고 개구쟁이처럼 웃는 콘라드와 제이드. 요정 같은 에셀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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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비껴간 듯, 14년 전 모습 그대로인 이곳에는.

그저, 저에 대한 미움이 가득해서.

올리비아는 의식적으로 숨을 쉬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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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떻게 방으로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드레스 차림으로 침대에 누운 채, 올리비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화려한 레이스가 가득한 비단 캐노피가 미끄러지듯 달려 있고 여기저기 쳐다보아도 값나가는 것투성이였지만.

속이 헛헛하게 비었다. 저녁 식사를 걸렀던가.

곰곰이 떠올리던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은 채 다시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각거리는 이불깃이 뺨을 차갑게 감쌌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만 같은 상태에서 올리비아는 그냥, 제가 바라는 것은 아주 작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종장처럼 뭐든 걸 정도의 애정은 아니더라도.

수고했다. 혹은 잘했다. 그 정도의 말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적어도. 벌벌 떨리는 손을 숨기던 제 최선이 그 정도의 가치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올리비아는 제 손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남자에게 받은 장갑을 계속 끼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아버지한테 손의 떨림이 보이지는 않았겠지. 화려하게 반짝이는 장갑이 먼저 보였겠지.

그러다 올리비아는 푸스스 웃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제 손의 떨림 따위를 볼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올리비아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 커다란 웃음이 잦아들었을 때.

올리비아의 얼굴이 아주 조금 일그러졌다 이내 이불깃에 폭 가려졌다.

새어 나오는 소리 하나 없이, 올리비아의 등이 가냘프게 떨렸다.

* * *

짝을 이루듯 맞잡은 손이 가득한 승전 연회장.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오늘도 혼자였다. 귀족들은 은근한 웃음으로 마델레이네 공녀를 눈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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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저렇게 파트너처럼 옷을 입고 혼자 있는 건 무슨 생각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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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말이에요. 차라리 저 옷을 입질 말지. 에텔 영애한테 태자 전하를 뺏겼다는 걸 광고하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의 말대로였다. 적색 제복을 입은 레오포드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마리아 에텔의 옆에 있었다.

적색 제복과 파트너복으로 맞춘, 붉은 드레스의 올리비아 옆이 아니라.

멀리 있던 레오포드와 눈이 마주쳤다. 레오포드의 한쪽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린 듯 근사한 눈웃음과 삐딱하면서도 매력적인 태도.

레오포드는 올리비아를 너무 잘 알아서. 그래서 이번 일도 그렇게 쉬운 모양이었다. 마리아 에텔과 함께 있는 것도, 태자궁에서 벌어졌던 일도 모두 다.

올리비아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앞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꼭꼭 감춘 이 수치심과 모멸감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 아버지와 콘라드가 보였다. 분명히 이야기가 들릴 텐데, 저를 향해 돌아보는 시늉 한번 하지 않았다.

이렇게 커다란 연회장에서 보니 정말 남 같아서. 내려가던 시선에 레이스 장갑이 걸렸다.

황궁에서 보내 준 보석과 드레스를 착용했지만, 장갑만큼은 남자가 준 이 장갑을 꼈다.

올리비아는 장갑 낀 손을 느리게 들어 보았다.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던 남자였는데.

그때였다. 묵직한 뿔 나팔 소리가 연회장을 압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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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녀 전하 드십니다.”

시종이 커다랗게 외쳤다. 모두가 황제와 황후, 황녀를 향해 예를 갖추며 말했다. 화려하게 꾸민 황제와 황후 뒤로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레이나 황녀가 보였다.

늘 화려한 것을 좋아하던 황녀답지 않은 드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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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태양과 달께 경배를.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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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다들 즐거운 날이니 어서 일어나지.”

분위기를 살리듯, 황제가 시원하게 웃으며 잔을 들었다. 그러다 티 나게 연회장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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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의 주인공들은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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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그게.”

가장 주변에 있던 황제궁의 시종장이 난처한 듯 황제를 향해 소곤거렸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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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직 안 와?”

연회장의 모두가 조용해졌다. 승전 연회라고는 하나, 황제와 황후보다 늦게 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불같은 성미를 터트리려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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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대공 전하와 황궁 기사단, 비칸데르 기사단 입장합니다!”

연회장을 울리는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벌컥 열린 문에서 정복 차림의 기사들이 위풍당당하게 들어왔다.

올리비아 역시 기사들의 행렬을 바라보며 제이드를 찾았다. 은빛의 머리카락이면 찾기 쉬울 텐데 워낙 사람이 많아서인지 보이지가 않았다.

순간, 행렬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고요해졌다. 사람들의 반응에 올리비아도 고개를 돌렸다.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기사들의 행렬 가장 앞에 있는 저 검은 정복의 남자.

훤칠한 키와 어둠도 반사될 정도로 새까만 머리카락. 붉은빛이 도는 루비색 눈동자. 감탄조차 삼키게 만드는 아름다운 얼굴.

저 남자는 분명. 제가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러헤이른에서 본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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