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9. 도마뱀 꼬리 자르기2022.03.30.
마차가 출발했다. 반대편에 앉은 남자를 보자 새파란 분노가 식으며 현실이 밀려왔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와 함께 마차를 타다니. 이렇게 충동적인 행동은 저답지 않았다. 하긴. 저 남자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잘 모르는 여자의 황궁으로 가자는 말에 냉큼 마차를 가져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남자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사려 깊은 행동 탓일지도 몰랐다. 커피 하우스에서 나올 때에도 제게 로브를 빌려 주었으니까. 아무도 제가 마델레이네 공녀인 줄 몰랐을 거다. 올리비아는 무릎을 덮은 검은색 로브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꽃다발과 카드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레오포드를 사칭한 선물들.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꽃들과 선물들. 감히, 누가. 무슨 의도로. 지고한 태자를 사칭했을까. 감히 누가. 마델레이네를, 그리고 저를 업신여긴 걸까.
“받아요.”
“네?”
올리비아가 눈을 깜빡하는 사이, 남자가 자주색 벨벳 상자를 하나 내밀었다. 엉겁결에 상자를 받아 든 올리비아가 잠시 멈칫했다.
“어디서 난 거예요?”
“그야, 이 마차 안에서?”
“이게 뭔데요?”
“열어 보면 알겠죠?”
남자는 의뭉스럽게 웃으면서 잘도 빠져나갔다. 말장난 같은 대화에 올리비아는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 있는 건.
“장갑?”
올리비아가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독특하고 예쁜 디자인이었다. 촘촘하게 짜인 레이스가 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였다. 큼큼, 남자가 헛기침을 했다. 장갑을 보던 올리비아가 남자를 쳐다보았을 때, 남자가 올리비아를 향해 애교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정도면 지난번 내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겠죠? 난 정말 귀한 거라면 다 가지고 있으니 말만 해요.”
선물이라도 되는 걸까. 피식 웃으며 장갑을 끼려던 올리비아의 눈에 손등 위 손톱자국이 보였다. 설마 이걸 본 걸까? 올리비아가 얼른 장갑을 꼈다. 사이즈를 걱정했는데, 장갑 안에 손이 쏙 들어갔다. 꼭 맞춘 것처럼 말이다. 손을 들어 장갑을 바라보는데, 손가락 너머로 남자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들어서 올리비아는 손가락을 모았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지만 빤한 시선은 계속 느껴졌다. 어느덧 마차는 황궁으로 가는 외길로 접어들었다. 화려한 거리 대신, 견고한 성벽과 무장한 황실 기사단의 경비를 본 올리비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앞에서 내려 줘요.”
“말씀대로.”
남자는 마부석과 이어진 작은 창을 향해 올리비아의 말을 전했다. 마차는 황실의 성문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서서히 느려지던 마차가 멈췄다. 성문까지는 걸어가기에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남자는 로브의 모자를 끝까지 뒤집어썼다. 얼굴이 보이지 않자, 남자는 가문의 수행 기사처럼 보였다. 남자는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향해 에스코트를 하듯 손을 내밀었다. 에스코트를 받는 일이 어색해서, 올리비아는 잠시 그 커다란 손을 바라보다 가볍게 손을 올렸다. 얇디얇은 레이스 장갑, 그 한 겹 너머로 닿는 남자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커다랗고, 따뜻했다.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잠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예요. 내 이름.”
“올리비아. 예쁜 이름이에요.”
이름 뒤에 붙은 성 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남자가 말했다. 제가 공녀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남자의 태도에 올리비아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내가 나오면, 그쪽 이름을 알려 줄래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작게 덧붙였다.
“……내가 그쪽한테 나쁜 패는 아닐 거예요.”
마델레이네는 보답에 철저했으니까. 복수에는 더 명확했고.
“물론 아주 근사한 패겠지만, 아쉽게도 오늘은 어렵겠네요.”
당연히 그러겠다고 답할 줄 알았는데. 친절하게 굴던 남자가 선을 그었다. 올리비아는 애써 당황함을 숨겼다.
“그래요, 그럼.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이름을 알려 드리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오늘은 제가 이만 가 봐야 해서요.”
안타깝다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그제야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나오면, 그쪽 이름을 알려 줄래요?”
무슨 자신감으로 저 남자가 당연히 기다려 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질 것만 같아서, 올리비아가 손을 떼려 했다. 에스코트하듯 닿았던 남자의 손은 올리비아를 놓지 않았다. 올리비아가 돌아보자 남자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다음에 꼭 이름을 알려 줄게요. 가장 귀한 선물과 함께.”
“……공녀인 내가 못 구할 선물 같은 건 별로 없을 텐데요?”
“그러면, 모두가 부러워할 정도로 귀한 것 정도는 되어야 아가씨께서 받아 주시겠네요. 예를 들어서.”
남자가 느리게 말을 끌었다.
“보검과 보석을 합친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검이라든가.”
“……기대하죠.”
남자가 주겠다고 한 선물보다, 한 번 더 저 남자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올리비아는 뾰족하게 올라왔던 심술을 가라앉혔다. 손이 떨어지고, 올리비아는 황궁을 향해 걸었다. 올리비아를 알아본 기사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태자궁으로 가고 싶은데, 마차를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 * *
“공녀님. 오늘 여기는 어쩐 일로. 태자 전하께서는 공녀님을 뵈러 러헤이른 거리로 가셨습니다만.”
태자궁에 당도하자마자, 도열한 시종들의 앞에 선 시종장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올리비아를 맞이했다. 길이 엇갈린 건지, 아니면 레오포드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는지. 수많은 걱정이 시종장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자 전하는 뵙고 오는 길이에요. 시종장. 그것보다. 내가 확인해야 할 게 있더군요.”
“예. 공녀님.”
노련한 시종장은 바로 주변을 물린 채 올리비아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소리 한 점 새어 나갈 일 없는 태자궁 응접실의 문이 닫혔다. 올리비아는 티 테이블 앞 소파에 앉은 채 시종장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시종장은 아마 알 거예요. 수요일 약속에 오지 않으신 날이면 늘 태자 전하께서 꽃과 선물을 보내셨다는 것을.”
“네. 공녀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태자 전하께서는 모르시더군요.”
시종장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를 능멸하려 한 사람이 시종장인가요?”
“공녀님, 아닙니다. 능멸이라뇨. 저는 그저.”
시종장이 말을 잇지 못했다.
“카드를 보낸 사람도 시종장인가요?”
“무슨 카드,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듯 시종장의 말이 잠시 끊어졌다. 올리비아가 차갑게 웃었다.
“태자궁에서 보내는 선물에 감히 전하를 사칭한 카드가 섞여 있는 것도 몰랐군요. 시종장은.”
“그, 그게 무슨!”
시종장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응접실에서 일어나는 폭풍을 뒤로하고, 태자궁의 시녀 한 명이 소리를 죽인 채 후원을 가로질렀다. 시녀가 향하는 곳은 황후궁 방향이었다. . . .
“그러니까.”
올리비아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 보았다.
“태자궁에서 내게 선물을 보낸 것은 맞지만, 누가 보냈는지 밝힐 수는 없고. 카드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
“……그게 시종장이 말할 수 있는 전부인가요?”
“……죄송합니다. 공녀님.”
“시종장.”
“……예. 공녀님.”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종장 같은 사람을 제법 좋아합니다.”
시종장은 대답 대신 올리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뜬금없는 말에 무슨 의도인지 가늠하는 눈이었다. 레오포드가 어렸을 때부터 그를 보필한, 굳건한 시종장.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선물이든 꽃이든. 사실 무엇이 중요합니까. 누가 무슨 의도로 보냈든, 태자궁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내 마음을 달래 주었으면 그 가치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공녀님.”
“하지만 카드는 아닙니다.”
카드 이야기가 나오자 시종장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정말로 모르겠다는 저 눈빛을, 올리비아는 믿을 수 없었다. 시종장처럼 충직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이 궁에서 감히 황족을, 그것도 태자 전하를 사칭한 카드를 공녀님께 보낸다는, 그런 일이.”
“일어났죠. 시종장은 카드가 배달된 것도 몰랐고. 그러니 오늘 같은 날, 내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장이 나서지 않는다면 내가 밝힐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겠죠. 아직 정식 태자비도 아닌, 공녀인 내가 태자 전하의 시종장에게 명령할 권한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 시종장이 제일 잘 알 테지요.”
올리비아가 쓰게 웃었다. 시종장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권한을 받은 티아제 궁의 시종들에게는 월권을 행사하면 좀 어떻습니까? 기껏해야 공녀가 패악을 떨었다고만 소문이 나겠죠. 그리고 알겠지만 두 달 전, 시종장의 막내아들이 티아제 궁의 견습 시종장으로 입궁했습니다.”
“……!!!”
단단한 가면 같은 시종장의 얼굴이 순식간에 깨졌다.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시종장은 파들파들 떨리는 두 손을 모아 꽉 쥐었다. 1년 전 공녀가 태자비 궁인 티아제 궁의 실권을 부여받았다. 보통 약혼을 한 뒤 2년 내로 궁의 실권을 받던 역대 약혼녀들에 비하면 한참 늦은 시작이었다. 황후는 공녀의 실력이 부족함을 핑계 삼았다. 하지만 공녀가 황녀의 일을 도맡아 할 정도의 실력이 있다는 것 정도는 시종장들은 다 알았다. 실권을 잡자마자 공녀가 한 일이 바로 견습 시종장을 뽑는 일이었다. 경력이 없는 아이들도 티아제 궁으로 보낼 수 있다는 이야기에 모든 시종장이 제 일가를 보냈다. 시종장은 가장 어린 막내아들을 보냈다. 늦둥이로 태어난 아들은 작위도 재산도 물려받을 게 변변치 않았으니까. 모든 시종장들은 제 수족을 태자비 궁에 심는 줄로만 알았다. 결국 그게 족쇄로 돌아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 시종장들이 계산했듯, 공녀도 셈을 따졌을 줄이야. 올리비아가 평온하게 시종장을 바라보았다. 그 잔잔함 아래, 서릿발처럼 차가운 질책이 쏟아졌다.
“감히, 마델레이네를 욕보였습니다. 이래도 내가 가만히 있어야 합니까?”
“고, 공녀님.”
시종장이 허겁지겁 올리비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한 번만 자비를. 공녀님. 부디, 한 번만 자비를.”
그래서 올리비아는 더 다정한 척 말했다.
“시종장.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말했듯, 저는 시종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시종장의 얼굴을 봐서 꽃과 선물을 보낸 이가 누구인지 묻지 않겠습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공녀님.”
“대신 카드를 꽂은 이가 누군지 색출하세요.”
“예. 예. 공녀님.”
“물론, 이건 내가 시종장한테 드리는 부탁입니다.”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다. 시종장은 허겁지겁 응접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올리비아는 조용해진 응접실 안에서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았다. 태자궁의 시종장은 네 궁의 시종장 중 저를 가장 가엾이 본 사람이었다. 그가 저를 얕잡아 보지 않았다면,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막내아들을 언급하자 파랗게 질리던 시종장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묘해졌다. 원래 아버지란 다 그럴까? 그렇게까지 제 아이를 보호하려 할까? 머릿속에 제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본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늘 저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던 아버지. 올리비아는 입술을 달싹이다 어서 시종장이 범인을 잡아 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종장이 범인이라고 데려온 시녀는 올리비아의 예상과 달리 아주 쉽게 입을 열었다.
“저는 그저, 체이즈 백작 부인께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이에요! 살려 주세요. 공녀님. 잘못했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울면서 싹싹 비는 시녀는 고작 열서너 살이나 되었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아이였다. 체이즈 백작 부인이라. 태자비 궁에서 저를 얕보던 백작 부인이었다. 황후의 수족 같은 시녀. 올리비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황후께서 도마뱀 꼬리를 자르실 모양이구나. * * * 그 시간, 지오반니 마델레이네 공작은 황후궁의 응접실로 들어섰다. 황후가 반갑게 웃으며 공작을 맞이했다. 장미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지만, 공작은 황후의 본성이 독 바른 가시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제국의 달께 경배를.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공작의 인사에 보좌관 헉슬리 경이 꽃다발을 황후의 앞에 바쳤다.
“어머, 이렇게 근사한 꽃이라니.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방문해 주어 고마워요. 공작.”
“말씀하실 게 있다고 들었습니다.”
공작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황후는 난감하다는 얼굴로 공작의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 뻔한 시선에 공작은 넌덜머리를 느끼면서도 제 뒤를 바라보았다. 시립한 황후의 시녀들 중 유독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떠는 여자가 있었다. 황후의 사람들을 다 아는 공작에게도 낯선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새로 왔다던 체이즈 백작 부인. 황후는 곤란한 듯 말을 꺼냈다.
“민망한 소문이지만 공작도 들었을 겁니다. 올리비아, 그 고운 아이가 수요일 오후를 홀로 보내고 있다고 말이죠.”
올리비아. 그 이름이 나오기 무섭게 공작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 석상 같은 남자가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약점에 황후는 진심으로 즐거웠다. 세상에. 제국 제일의 강직하고 아내에게 진심이었던 ‘그’ 지오반니 마델레이네가 사생아를 만들 줄 누가 알았을까. 황후는 십사 년 전,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귀족파인 제 가문과 대립하는 황실파의 기둥 마델레이네가 이렇게 날 서듯 구는 건 황후의 몇 없는 기쁨이었다.
“정말 유감입니다. 내가 태자한테 더 잘 이야기해야 하는 건데.”
“말씀하실 게 그뿐이라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참.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까.”
황후는 계속해서 말을 끌면서 공작의 속내를 가늠했다.
“올리비아의 섭섭함을 달래 주고자 태자궁의 시종장에게 선물을 챙겨 줄 것을 일렀더니, 시녀가 사사로이 위로의 말을 덧붙였지 뭡니까.”
“…….”
“그 애 마음은 알겠지만 서운함에 그리 날뛰다가는 이런저런 말이 돌지 않겠어요? 그래도 아버지가 하는 말이라면 듣겠죠. 저는 겨우 이런 일로 올리비아를 못 보고 싶지 않습니다.”
빙빙 돌려 말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올리비아한테 가만히 있으라 압력을 넣으라는 것. 황후가 요사스레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