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데이트 날의 기대는 솜사탕 같아서2022.03.27.
“언니, 어디 가세요?”
화창한 월요일이었다. 계단을 내려오던 에셀라가 올리비아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진한 초록색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의 얼굴이 오늘따라 들떠 보였다. 저런 얼굴을 할 때는 매주 수요일 태자와의 약속이 있는 날뿐이었는데. 올리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냥, 잠시 나갈 곳이 있어서.”
“그냥이라뇨. 아가씨. 태자 전하께서 따로 데이트를 신청하셔서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올리비아 대신 샐리가 잔뜩 뽐내듯 말했다.
“세상에! 태자 전하께서 언니를 엄청나게 좋아하시나 봐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계단을 단숨에 뛰어 내려온 에셀라의 눈에 자신감이 가득해서, 올리비아는 작게 웃었다.
“언니…….”
갑자기 에셀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응?”
“진짜 언니 웃는 거 너무 예쁜데! 이 정도면 오늘 태자 전하께서 언니한테 한 번 더 반하시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아가씨 웃는 모습은 정말 요정님 같다니까요!”
잔뜩 애정 어린 에셀라의 말에 찬양하듯 끼얹는 샐리의 말까지 듣자니 낯간지러워서 어떤 반응을 해야 할 줄 몰랐다. 마음속 한구석에서 뭉실뭉실하고 반짝이며 뜨겁고 달콤한 기분이 계속 올라왔다. 마치, 그래. 솜사탕 같아서. 너무 달았다. 레오포드도 똑같이 봐 주면 좋을 텐데. 가만히 올리비아를 바라보던 에셀라가 돌연 한숨을 쉬었다.
“언니.”
“응?”
“언니. 물론 어두운색도 예쁘지만, 화사하고 밝은색도 언니한테 정말 잘 어울릴 거예요. 저랑 다음에 드레스 같이 맞추러 가요!”
샐리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아가씨. 어두운 색깔만 좋아하시는데 아가씨에게는 밝고 화려한 것도 예쁠 거예요.”
올리비아는 애매하게 웃으며 제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오래전,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레오포드와의 기억 한 조각이 떠올랐다.
“공녀가 화사한 타입은 아니잖아.”
열네 살 약혼식 날, 흰색 드레스를 입은 제게 레오포드가 한 말이었다. 집에 돌아온 올리비아는 봉인하듯 흰색 드레스를 넣어 두었고, 다시는 화사한 색깔의 드레스를 입지 않았다.
“음, 그러면 이건 어때요?”
에셀라가 갑자기 분홍색 보석이 달린 목걸이를 뺐다. 그리고 올리비아의 목에 걸어 주었다. 올리비아가 거절할 새도 없이 에셀라가 올리비아를 현관 쪽으로 밀었다.
“봐요. 언니는 이렇게 화사한 것도 잘 어울린다니까요? 잘 다녀와서 데이트 이야기 꼭 들려 줘요! 알겠죠?”
문을 나서기 전, 올리비아가 에셀라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참을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빌려줘서 고마워. 잘 다녀올게.”
에셀라가 환하게 웃었다. 올리비아가 탄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에셀라가 전담 시녀인 베로니카에게 말했다.
“내가 언니한테 목걸이 빌려준 건 비밀이야. 알지?”
오라버니들이 안다면, 또 언니한테 심술을 부릴 테니까. 에셀라는 흥, 코웃음을 치며 큰 그림을 그렸다. 아직은 오라버니들의 방해에 밀리지만 제가 성공적인 데뷔탕트만 치르면, 언니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해맑게 웃는 아가씨를 바라보던 베로니카는 신음을 삼켰다. 모두가 다 아는 사실, 동시에 아가씨만 모르는 사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몰라야 할 진실.
“에셀라는 절대 몰라야 한다.”
아가씨의 전담 시녀가 되었던 날 들었던 공작 각하의 명령이 아직도 귓전에 선했다. 사실 명령이 아니었더라도 베로니카는 아가씨가 그 사실에 대해 아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저렇게 화사한 아가씨가. 그토록 믿고 사랑하는 언니 때문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절대 알게 할 수 없었으니까. * * * 약속 장소는 러헤이른 거리의 커피 하우스였다. 안내된 자리에 앉은 채 올리비아는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핑크색 보석이 무척이나 예뻤다. 이렇게 화려한 게 정말 제게 잘 어울릴까. 순식간에 몰려오는 걱정에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에셀라가 잘 어울린다고 했으니 분명 레오포드의 눈에도 괜찮을 거였다. 황궁이 아닌 바깥에서 보는 첫 데이트였다. 레오포드를 떠올리던 올리비아의 입매가 절로 올라갔다. 레오포드도 오늘을 기대한다고 했으니까. 어젯밤 계속 들여다보았던 카드 내용이 떠올랐다. 매일이 딱 오늘 같기만 하면 좋을 텐데. 올리비아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렇게 에셀라와 놀고, 레오포드와 데이트를 하고. 그러다 보면 다 함께 화목하게 식사를 하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이 제게 웃어 주고. 행복한 생각이 자꾸만 번져 갔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달콤한데, 실제가 되면 얼마나 행복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올리비아가 있는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일찍 왔군, 영애.”
열린 문으로 레오포드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의 머리카락을 닮아 화려한 금빛의 옷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올리비아의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벅차올랐다. 상상보다 더 달콤해서. 꼭 솜사탕 같은 날이어서. 올리비아가 환하게 웃었다. 그 순간, 레오포드의 입매가 비틀렸다. . . .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늘 저렇게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한결같이 저를 사랑한다는 눈. 무언가를 바라듯 매번 간절한 얼굴로 저를 보면서도 투정을 삼키는 여자. 그래서 쉬운 여자. 레오포드는 서늘한 눈으로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열한 살, 어린 나이에 통보받듯이 치른 약혼식 때부터 저는 올리비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태자. 황실파에서 마델레이네의 첫째 공녀를 태자의 약혼녀로 밀어붙였어요. 태자도 알고 있죠? 그 초록 눈의 영애 말이에요. 감히 태자를 뭐로 보고.”
황후인 어머니의 말이 틀린 건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은 올리비아를 보고 반쪽짜리 마델레이네라고 했다. 마델레이네가 황실파의 수장만 아니었더라도, 하필 황실파와 귀족파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시기만 아니었더라도 절대로 성사되지 않았을 약혼이었다. 지난주 수요일 막무가내로 제 궁에 찾아왔던 올리비아가 떠올랐다. 연인인 마리아 에텔의 자리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함께 보내는 시간까지 빼앗다니. 레오포드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시겠죠. 전하. 오늘만큼은 그래도 공녀와 함께 시간 보내 주십시오. 마델레이네와의 관계도 있지 않습니까.”
오는 내내 부관이 했던 잔소리가 선했다. 계획대로라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올리비아를 달래는 시늉이라도 하겠지만. 이미 그럴 마음은 싹둑 잘려 나갔다. 레오포드가 씩 웃었다.
“그대는 늘 부지런하군.”
“아, 감사합,”
“오늘만큼은 내가 일찍 와서 그대를 기다리며 신사 행세라도 할 참이었는데. 매번 나를 늦은 사람으로 만드는군.”
말허리를 자르고 들어온 목소리에 불쾌감이 진득했다. 놀란 올리비아가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잘생긴 눈썹 한쪽이 비뚜름하게 추켜 올라갔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뭐가 잘못된 걸까? 분명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레오포드의 얼굴은 좋아 보였는데.
“그, 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그저 전하를 빨리 뵙고 싶은 마음에.”
“하하. 농담이었는데. 순진하긴.”
레오포드가 시원스레 웃으며 고개를 까딱했다. 벽에 서 있던 시종이 다가와 테이블 위에 뜨거운 티 포트와 찻잔, 그리고 다과를 세팅했다. 모든 것이 부드럽게 흘러가는 와중에서 이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올리비아 저 혼자였다. 정말…… 농담이었을까? 올리비아는 가만히 레오포드의 얼굴을 살폈다. 레오포드가 기품 있는 몸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향이 제법 괜찮네.”
레오포드의 미간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담은 눈매가 상냥하게 휘었다.
“그대가 단 걸 좋아했던 것 같은데.”
좋아했다. 열일곱의 어느 날, 레오포드가 살이 찐 것 같다고 이야기하기 전까지. 하지만 올리비아는 그 사실을 삼긴 채 웃었다. 레오포드의 미소가 순식간에 불안감을 잠식시켰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래. 정말 장난이었을 거야. 그게 아니라면 레오포드가 제게 그럴 이유는 없었다. 레오포드가 크림 과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입에서 바삭하게 녹는 설탕 크림이 마음에 드는지 표정이 부드러웠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 레오포드가 뜨거운 차를 마실 때 유일하게 찾는 달짝지근한 과자가 바로 바삭한 설탕 크림 과자였다. 미리 이야기를 해 놓길 잘했다. 올리비아는 풀린 기분으로 차를 마셨다. 오늘따라 차향이 좋았다.
“아. 그게 빠졌군. 베르탱.”
“예. 전하.”
하지스 백작이 얼른 레오포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엇이 빠졌다는 걸까. 올리비아가 테이블 위를 살피던 순간이었다.
“무화과로 만든 잼. 빨리 가져와.”
“……예.”
하지스 백작의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그토록 충성스러운 사람의 얼굴에 언뜻 스치고 간 이상한 표정이 못내 걸렸다. 무화과 잼이라, 레오포드가 무화과 잼을 좋아했던,
“하필 빠져도 공녀가 좋아하는 게 빠지다니.”
쯔, 혀를 차는 소리에 문득 떠올랐다. 에텔 후작이 새로이 과수원을 구매했다는 소식이.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막내딸 마리아 에텔이 좋아하는 무화과를 가득 심기 위해서라고. 그러니까……. 찬물을 맞은 기분이었다. 올리비아는 레오포드를 바라보았다. 레오포드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상냥하게 끝을 휜 눈매 속 새파란 눈동자가 시리게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찻잔을 감싼 손바닥에 닿는 온도가 차가운지 뜨거운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무슨 의도일까. 제가 무슨 반응을 보이기를 바라는 걸까. 이전까지 레오포드는 약속을 잘 지키는 편은 아니었지만, 상냥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꽃과 선물을, 그리고 카드를 보냈고. 바쁜 시간을 쪼개서 오늘을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
“예쁜 이름이네. 올리비아.”
아홉 살, 처음 만난 레오포드의 생일날부터 찬란한 구원을 보여 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겨우 이런 것뿐이었다.
“……제가 무화과를 좋아했군요.”
올리비아는 꼭 남 말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올리비아가 찻잔에서 손을 떼었다. 테이블 밑으로 뺀 양손 끝이 아프게 서로를 꼬집었다.
“아니었나?”
레오포드가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화과 철에는 제법 즐겨 먹습니다.”
레오포드가 피식 웃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눈가가 뜨거웠다. 앞에 보이는 레오포드의 모습이 조금이라도 부옇게 흐려질까 올리비아는 손톱을 더 날카롭게 세워 제 손을 찔렀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추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아서. 올리비아는 등에 힘을 주었다.
“올리비아.”
“네. 전하.”
제 입에서 나간 목소리가 딱딱했다. 다행이었다. 울먹거리는 건 그야말로 최악이었으니까.
“뺨이 생기가 없어. 어디 아픈가?”
걱정스러운 말투 속에 담긴 진의가 선명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피곤해 보이는군. 오늘은 이만 들어가지.”
결국, 오늘 레오포드의 뜻은 이거였다. 올리비아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풍성하게 말아 올린 속눈썹이 눅눅하게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시종이 테이블 위에 무화과 잼을 올려놓았다. 그 잼을 보자 우습게도 오히려 웃음이 났다.
“역시.”
“응?”
“……전하는 상냥하시네요.”
그 친절이 제게까지 오지 않은 게 아쉽지만 말이다. 올리비아가 옅게 웃었다. 레오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올리비아는 가볍게 제 뒤를 눈짓했다. 하지스 백작을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숙인 와중에, 구경하듯 저를 바라보던 가장 나이 어린 시종이 화들짝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따로 시간을 내 주시고. 그러니, 오늘은 꽃 안 보내셔도 괜찮아요.”
이건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더 이상 꽃으로 위로받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꽃? 보내 주길 바라며 하는 말인가?”
레오포드가 피식 웃었을 때, 올리비아는 또 한 번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게 어떤 꽃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걸까, 공녀?”
레오포드의 말이 느리게 들렸다. 그 꽃은 레오포드가 보내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 것이라 생각했고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황궁에서 오는 꽃이었고, 귀한 선물에 카드까지 있었으니까.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자리에서 일어나던 레오포드는 올리비아에게 관심이 없었다. 일어나지 않는 올리비아를 본 레오포드가 빙그레 웃었다.
“저런. 내 약혼녀는 몸도 약하군. 조금 쉬었다 나가지. 그리고 올리비아, 꽃이 받고 싶으면 줄 때까지 기다리는 법을 좀 배우는 건 어때? 레이디답게. 참, 그나저나.”
순간, 레오포드가 올리비아 위로 몸을 기울였다. 느릿한 손이 올리비아의 목걸이 보석을 톡, 건드렸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그대한테 화사한 색은 정말 별로라고.”
다정하게 꾸민 목소리에 몸에서 힘이 빠졌다. 레오포드가 돌아섰다.
한순간의 썰물처럼 모두가 빠져나갔다. 탁, 문이 닫혔을 때 응접실에 남은 건 올리비아 혼자였다. 이 조용한 곳에서 올리비아는 비참한 기분을 누르고 사실만을 곱씹었다. 몇 번이나 온 귀한 선물도, 말려도 말려도 방을 가득 채우는 꽃도. 저를 설레게 만들었던 꽃말과 다정한 위로를 담았던 카드까지도. 전부 레오포드가 보낸 게 아니구나. 하. 입술을 비집고 탁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명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솜사탕 같았는데. 진창에 처박힌 것만 같았다. 허탈했다. 아니, 허탈하다 못해 피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기분이었다. 제가 다정함이라고 믿었던 꽃이, 카드가 모두 거짓말이라서. 레오포드를 위해 꾸민 이 모든 시간이 부정당해서. 에셀라가 목걸이를 걸어 준 응원까지 무시당해서. 먹먹하게 몰려오는 감정 속에서 올리비아는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았다. 멍청하게 울지 마.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올리비아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냉정하게 굴어야 했다. 감히. 누가 제게 이런 도발을 했는지부터 알아야 했으니까. 물기 어린 눈을 몇 번 깜빡이자 투명한 초록빛 눈동자가 시리게 빛났다.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 문으로 걸어갔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한 와중에 올리비아는 흐트러지는 머릿속을 가다듬었다. 약속 시간으로부터 반 시각도 흐르지 않았다. 샐리한테는 동전을 챙겨 주며 놀다 오라고 했고, 마부에게는 몇 시간 뒤에 올 것을 당부했다. 모습을 숨긴 호위 기사가 전부였다. 커피 하우스의 마차를 빌리기에는 소문이 나는 위험 부담이 따르고, 사설 마차를 기다리자니 시간이 걸렸다. 아무도 모르게 제가 태자궁으로 갈 방법은…… 올리비아가 문을 열고 응접실을 나갈 때였다.
“아가씨?”
복도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퍼졌다.
“어떻게 여기에서 보죠?”
그 남자였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한, 순하기 짝이 없는 남자. 그 남자는 이 만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고 웃었다. 저 무해한 웃음이라면.
“……내게 선물을 준다고 했죠?”
올리비아의 목소리 끝이 아주 조금 갈라졌다. 남자의 눈이 기민하게 올리비아를 살폈다. 올리비아의 손등 위 날 선 손톱자국을 발견했을 때, 붉은 눈동자가 잠시 싸늘하게 식었다.
“……물론이죠. 아가씨. 내가 무엇을 해 드리면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