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버티는 소녀와 황제가 키운 개2022.03.23.
제 데뷔탕트는 완벽할 줄로만 알았다. 데뷔탕트를 치르기 전까지는 올리비아도 그렇게 생각했다. 굶어 가며 다이어트를 하고, 드레스에 메이크업과 머리까지 정말 모든 게 잘 들어맞았다. 첫 왈츠가 시작되고 기대감으로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던 그때. 눈부시게 멋진 레오포드가 노르디안 후작 영애에게 첫 춤을 청하는 순간 모든 게 깨져 버렸지만 말이다. 알고 있었다. 레오포드는 저와의 약혼을 꺼려 했다는 것도, 황태자가 황제파인 마델레이네와 약혼해 불안할 귀족파를 달래기 위해 노르디안 후작 영애에게 첫 춤을 신청할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아는 것과 직접 겪는 것은 달랐다. 화려한 보석이나 반짝이는 드레스로도 오물이 묻은 것 같은 기분을 가릴 수는 없었다. 제국의 공녀, 황태자의 약혼녀라는 지위에도 불구하고 첫 데뷔탕트에서 그 누구에게도 춤 신청을 받지 못한 채 월 플라워가 되었다. 제발 누군가 자신에게 말 좀 걸어 주었으면 했었다. 제발, 한 번만 춤 신청을 해 주었으면 바랐다. 모두가 저를 보고 수군대는 것만 같았던 그때의 절박함이 기억났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공작도 콘라드도 제이드도 모두 저를 보지 않았다. 웃는 낯이 깨질 것만 같아서 드레스 자락만 꽉 쥐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자신이 데뷔탕트에서 추태를 부리지 않았다는 거다. 레오포드가 저를 쳐다볼 때마다 올리비아는 웃었다. 그렇게 하면 레오포드는 근사하게 웃어 주었다. 마델레이네 공녀답게. 언젠가는 태자비 자리에 오를 사람답게 의연하려 애쓴 보람이 있었다. 열두 곡의 왈츠가 이어지던 내내 드레스를 잡았던 손이 파리하게 질렸고, 집에 와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펑펑 울기는 했지만.
“올리비아.”
콘라드의 경고를 듣고 나서야, 올리비아는 해묵은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두 눈을 깜빡였다.
“아, 죄송해요. 데뷔탕트 생각이 나서.”
벌써 2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저는 이렇게 잘 성장했다. 가끔 저녁때마다 형제자매들과 함께 식사를 했고 어느 정도 집안의 실권도 받았다. 올리비아는 기대에 가득 찬 에셀라를 곁눈질로 보며 말했다.
“에셀라 너라면 나와는 비교도 될 수 없이 잘 해낼 거야.”
진심이었다. 에셀라의 뺨이 장밋빛으로 상기되었다.
“정말요? 그래도 저 데뷔탕트 할 때는 언니가 같이 가 줄 거죠?”
어린 영애들이 데뷔탕트를 치를 때는 으레 귀부인이나 데뷔를 한 레이디가 같이 가기도 했다. 올리비아는 반사적으로 콘라드를 바라보았다. 상냥하게 에셀라를 바라보던 콘라드가 한겨울의 북풍처럼 시린 얼굴로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꾹 다물린 입술이 말하지 않아도 안 된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어쩌지? 황궁 일이 바빠서 안 될 것 같은데.”
“바쁘다는데 어쩔 수 없지. 에셀라. 동행해 줄 좋은 레이디를 알아볼게.”
“네…….”
콘라드의 다독임에도 에셀라는 풀 죽은 얼굴로 음식을 깨작거렸다. 참으려 해도 서운한 티를 숨길 수 없었는지 결국 에셀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올라가 볼게요.”
기운 없는 걸음이 멀어지고, 식당이 조용해졌다. 콘라드가 가볍게 와인 잔을 흔들었다.
“올리비아.”
“네, 오라버,”
“누가 네 오라버니지?”
무심코 나간 말에 지독한 답변이 돌아왔다. 콘라드가 건조하게 말했다.
“똑바로 자각해야지.”
“…….”
“넌, 그냥 마델레이네의 구성원일 뿐이야.”
참 아프게도 말한다. 가족이 아닌, 마델레이네의 구성원. 그 한 단어가 콘라드와 저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다. 콘라드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올리비아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훤히 알았다. 충격을 완화하듯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기 무섭게 더 아픈 말이 올리비아를 찔렀다.
“그러니 에셀라에게 선을 지켜. 감히 누구와 말을 섞으려고 해. 에셀라를 너와 동격으로 떨어뜨릴 셈이야?”
“감히 너 따위가 누구랑 말을 섞어. 에셀라까지 우리 엄마처럼 만들려고? 네 소문을 에셀라한테까지 묻히려고?”
각인처럼 콘라드의 말이 떠올랐다. 저 말 한마디에 그토록 에셀라와 놀고 싶었던 어린 올리비아는 미련 없이 그 욕심을 버렸다. 사교계의 소문이 얼마나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지 올리비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에셀라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건, 올리비아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대답.”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아버지의 말대로 인정받는 태자비가 된다면. 그때는 달라질 거다. 무사히 태자비가 된 제 노력을 본다면 콘라드도 저를 가족으로 받아 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대답해야 했다. 올리비아는 감각 없는 주먹을 다시 한번 꽉 쥐며 하기 싫은 대답을 했다.
“……네.”
그제야 성이 조금 풀리는 듯 콘라드가 식당 문을 턱짓했다.
“나가 봐.”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오라버니.”
마지막에 붙인 말은 진심 반, 제 복수 반이었다. 도망치듯 식당을 나선 올리비아가 빠르게 문을 닫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올리비아는 숨을 들이마신 후 천천히 뱉었다. 어머니의 습관이었다. 힘들어도 한 번 숨을 제대로 쉬면 다시 힘이 난다고 했다. 올리비아는 이 습관에 하나를 더 붙였다. 사랑받는 태자비가 되자고 스스로한테 다짐하는 것. 이제는 정말 그 방법밖에 없었다. 태자비가 된다면 가족도 레오포드도 전부 다. 저에게 환하게 웃어 줄 테니까. 올리비아는 마지막 희망을 잡은 채 계속 웃으려 노력했다. 웃음의 끝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외면한 채로 말이다. . . . 와인 잔 안에서 붉은 와인이 출렁였다. 혼자 식당에 남은 콘라드는 하, 기가 찬다는 듯 탁한 숨을 뱉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볼게요. 좋은 하루 되세요. ……오라버니.”
올리비아는 제집에 들어온 재앙이었다. 그 애 때문에 다정하던 부모님은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되었고, 결국 그 애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반쪽짜리 마델레이네. 하지만 에셀라 대신 살얼음판 같은 황궁에 가서 망나니 황태자의 옆에 붙어 있어야 할 마델레이네의 핏줄. 그게 올리비아의 전부였다. 딱 거기까지만 제 위치를 지키면 족할 것을. 꼭 무언가를 바라듯, 초록색 눈으로 저를, 아버지를, 제이드를, 에셀라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콘라드는 기대가 올라올 때마다 싹을 잘랐다. 저 애는,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와인의 끝 맛이 썼다. 성가신 기분을 환기하듯, 콘라드는 품에서 제이드의 편지를 꺼냈다. 받자마자 읽어 보았던 편지에는 밀린 근황이 적혀 있었다. 외무부 일을 하며 이미 보고받았던 일이지만, 콘라드는 마지막을 다시 한번 읽었다. - ……승리를 확정 지었어. 몇 가지 일만 해결되면 곧 귀환할 거야. 늘 고마워 형. 아버지와 에셀라를 잘 부탁해. 당연하게도 올리비아에 대한 말은 없었다. 가족의 테두리 안에 없는 아이를 부탁할 이유 따위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콘라드는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다시 접었다. 마지막 문장 가운데, 무언가를 잘못 쓴 것처럼 지우듯 펜으로 몇 번이나 덧칠된 부분 따위는, 그 아래 희미하게 쓰인 ‘올리’라는 글자 따위는. 콘라드가 알 바 아니었다. * * * 화려한 응접실 안, 황제는 황좌에 앉았다. 황금과 마노로 장식된 가장 고귀한 자리는 바로 그를 위한 자리였다. 황가의 혈통답게 화려한 금발과 새파란 눈동자의 황제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막강한 부와 권력. 그 모든 게 제 발아래였다. 특히 제게는 ‘놈’이 있었다. 황제는 여유롭게 고개를 까딱였다. 시종장이 문을 열자 검은 로브를 쓴 장신의 남자가 응접실로 걸어 들어왔다.
“드디어 왔군. 이번 전쟁의 주역이.”
황제가 호탕한 웃음소리를 내며 웃지 않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느릿하게 로브를 벗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얼굴이, 붉은 루비색 눈동자가 드러났을 때. 황제는 저도 모르게 낮게 탄식했다.
“……제 어미를 꼭 빼닮았군.”
선대 대공비와 다른 점이라면 웃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늘 상냥하게 웃던 대공비의 얼굴이 떠올라 황제가 한쪽 입매를 올렸다. 하긴. 선대 대공이 실종된 뒤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을 때 대공비를 억지로 이 황궁에 유폐했다. 그때 그녀도 꼭 저런 식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지금 아무런 감정 없이 무릎을 꿇은 채 황제를 올려다보는 그녀의 아들처럼.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응접실을 울리는 목소리가 소름 끼치게 차가웠다. 황제는 기민한 눈으로 남자, 에드윈 로웰 비칸데르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키운 개. 남자를 두고 암암리에 도는 별명. 그 만족스러운 별칭에 황제의 눈이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텅 빈 눈동자며, 제가 무슨 일을 명해도 완벽하게 처리하는 일솜씨까지. 작위만 대공이지, 하는 짓은 암살 패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제가 시켰던 일들을 떠올리자 황제는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로 희열을 느꼈다. 그 고고하고 고귀한 ‘비칸데르’가 겨우 암살 패와 다를 바 없는 짓을 하다니. ‘비칸데르’를 저렇게 길들이기까지 장장 10년이 걸렸다. 초대 황제와 군주의 맹세를 한 이후 황량하고 추운 겨울 산 같은 북부의 비칸데르령을 하사받은 비칸데르 대공가. 뛰어난 검술 실력을 믿고 오만하게 굴던 눈엣가시 같은 놈들. 북부의 쓸모없는 땅에서 광산과 금맥까지 발견한 놈들은 순식간에 황실의 권위를 넘봤다. 자연히 목이 뻣뻣했던 전 비칸데르 대공이 떠올랐다. 제 것이라 생각했던 망국의 공주를 대공비로 맞이한, 그 재수 없던 놈. 그 둘의 목을 끝내 꺾어 버린 게 바로 저였다. 희번덕 빛나는 눈을 깜빡이며, 황제가 자애롭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도 대공이 늘 선봉에 섰다 들었네. 역시 비칸데르야.”
“과찬이십니다.”
“이제 곧 대공이 정식으로 올라올 텐데, 화려한 승전 연회를 열어야겠어. 그때 대공이 황실에 바칠 진귀한 전리품들이 기대되는군.”
“복귀한 다음 바로 황실로 옮기겠습니다.”
“그래. 기대하겠네. 그러고 보니. 공이 벌써 스무 살이 넘지 않았나. 이제 혼인을 해서 후사를 공고히 해야 할 텐데 말이지.”
황제가 은근하게 운을 떼었다.
“……아직은 생각 없습니다.”
“어허, 그러지 말고. 안 그래도 비칸데르의 직계는 대공밖에 없지 않나. 이럴수록 직계의 핏줄을 튼튼히 해야지.”
황제의 말에 로브 아래 주먹이 힘줄이 돋을 만큼 세게 쥐어졌다. 황제는 눈치채지 못하고 제 기분에 취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생각해 보니 대공은 데뷔탕트도 못 치르지 않았나. 기사 서임식도 약식으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황제는 기억나지 않는 척 말끝을 흐렸다. 데뷔탕트 때는 동부로 기어오르는 세르아치 족을 무찌르고 있었고, 기사 서품식은 도망간 어느 황족 사령관을 대신하기 위해 피를 뒤집어쓴 상태에서 겨우 받았다는 걸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쯔, 그놈이 도망가지만 않았더라도 비칸데르의 이름이 이렇게까지 널리 퍼지지는 않았을 텐데. 황제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그래서 더욱더 탐이 났다. 지금까지야 제가 내돌린 대로 순순히 전쟁터를 떠돌았지만 지금은 머리가 굵은 스물하나였다. 이미 제국에는 비칸데르의 명성이 높았고 어느 순간부터 세력이 모였다. 언제고 승냥이가 제게 기어오를지 모르는 법이었다. 그러니 확실한 목줄을 하나 더 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기사라면 모름지기 제 레이디가 있는 법이지. 마침 이번 승전 연회 때 황녀가 그대를 위한 꽃을 준비했다는데.”
그리고 결혼으로 인한 족쇄라면, 풀리지도 않을 괜찮은 패였다. 전대 대공 부인을 빼닮은 대공이 제 가족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마지막까지 저를 외면하던 망국의 공주가 저승에서 본다면 피라도 토하지 않을까. 유쾌해진 황제가 목소리를 낮추고 꾀어내듯 슬슬 말했다.
“……대공이 알면 좋아할 소식이 하나 있는데. 그 로웰의 백수정 광산이 지금 황녀의 몫이 되었지 뭔가.”
선대 대공비였던 그녀가 로웰 왕국의 마지막 자산이라고 소중히 여기던 광산. 동시에 대공을 옭아매는 목줄. 그 한 단어에 대공의 눈이 번뜩였다. 그제야 황제가 여유롭게 웃으며 덧붙였다.
“명의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부부라면 황궁의 승인 없이도 광산을 둘러볼 수 있지 않겠나?”
전쟁터에서 실종된 선대 비칸데르 대공에 대한 책임 배상으로 받아 낸 백수정 광산에 저놈이 이렇게까지 집착할 줄이야. 전쟁터만 도는 놈이라 그런지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스무 번이 넘게 ‘백수정 광산’을 내걸었건만 매번 저렇게 눈을 빛내다니. 그것도 족히 15년째 말라붙은 광산에 말이다. 계속되는 대공의 집착이 이상해서 백수정 광산을 구석구석 뒤져 보기도 했다. 뛰어난 마법사와 지질학자가 파견되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폐광산이라는 보고뿐이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작년에는 황녀에게 조사를 맡겼다. 몇 년 새 부쩍 성장한 황녀는 춘궁기에 허덕이는 영지까지도 말끔히 복구하더니 백수정 광산도 확실하게 조사했다. 하지만 역시나 맥이 끊긴 지 오래라는 앞서와 똑같은 보고였다. 황제는 고생한 황녀에게 백수정 광산을 하사했다. 이미 백수정 생산량이 바닥난 폐광산이지만,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열 살 때부터 전장을 전전한 놈이니 어머니의 마지막 유산을 물려받고 싶은 거겠지. 어차피 줄 마음은 단 한 점도 없었다. 그저 지금처럼 희망을 가득 바른 미끼로 대공을 계속 움직이게 할 원동력으로 이용할 계획이었다. ……영원히 말이다. 황제는 오만에 젖어 웃었다. 그 오만은 황제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다. 껄껄 웃는 황제를, 대공이 비웃는 시린 눈으로 바라보았는지 모르게 말이다. 그리고 그날, 프란츠 제국 전역에 호외가 돌았다. 비칸데르 대공이 승기를 잡았던 헤페르티와의 전쟁이 승리로 끝났다는 기쁜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