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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꽃의 의미 (6/151)

#006. 꽃의 의미2022.03.20.

남자가 좁은 길을 나서 사계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처음 온 걸 티 내듯 두리번거리던 남자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빠르게 달려갔다. 남자가 가는 방향에 독특한 기사 정복을 입은 갈색 머리 남자가 있었다. 정복에 달린 치렁치렁한 장식과 화려한 레이스는 연극에서나 볼 법했지만, 남자는 제 기사가 맞다는 것을 표 내듯 갈색 머리 남자를 얼싸안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의 입매에 옅은 미소가 올랐다 사라졌다.

1655065198876.jpg“샐리. 이제 가자.”

16550651988766.jpg“네. 아가씨.”

올리비아가 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샐리는 남자의 외모가 인상 깊었는지 줄곧 그에 대해 종알거렸다.

16550651988766.jpg“그러고 보니 그 남자. 자기 이름조차 안 밝혔네요. 아가씨께 귀한 선물을 드린다면서.”

1655065198876.jpg“어차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뭘.”

16550651988766.jpg“그래도요. 어쩌다가 다시 만난다면 정말 귀한 선물을 가져올지 누가 알겠어요.”

쨍한 햇살이 내리쬐자 올리비아의 은발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누구 머리가 저리 반짝일까, 무심코 돌아본 사람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볼수록 시선을 사로잡는 묘한 분위기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얼굴, 거기에 마델레이네가의 특징인 은발과 저 초록색 눈동자……! 올리비아를 알아본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올리비아는 우아하게 걸었다. 쏟아지는 시선들은 여러 갈래였다. 바늘처럼 콕콕 찌르는 차가운 눈초리와 호기심 어린 눈빛, 또는.

16550651988766.jpg“……저 아가씨가 ‘그’ 공녀님이라고?”

16550651988766.jpg“그래. 아주 생긴 것부터 요사스러운 기운이 폴폴 난다니까?”

저를 훑어보는 더러운 시선들. 몇 년 전, 당황해서 주변을 향해 감히! 라고 소리치던 샐리도 이제 의연한 태도로 올리비아를 따랐다. 적응한 듯싶었다. 고귀한 공녀이자 황태자비 자리를 약속받은 태자의 약혼녀. 동시에 몇 년째 도마 위에 오르내리는 사람. 그게 저였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올리비아는 내리쬐는 햇빛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서점은 다음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 . 마델레이네가의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마차를 힐끗거리며 끝까지 뒷말을 붙여 대던 사람들이 자연스레 흩어졌다. 다시 활기찬 일상으로 돌아간 사계의 정원 골목에서 두 명의 남자는 가만히 서 있었다. 레이스 정복을 입은 윈스터 칼터는 갈색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기사복에 레이스라니! 광대가 따로 없었다. 윈스터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 상관은 평소처럼 불손한 눈이라며 지적하는 대신 점처럼 멀어져 가는 마차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본 윈스터는 기사복에 대한 불평도 잊은 채 경악했다. 세상에.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상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그리움이었다. 참전하는 전쟁마다 승리로 이끌었던 전장의 승리자, 북부의 냉혹한 군주, 에드윈 비칸데르 로웰 대공에게 그리움이라니! 전장을 함께 전전한 지 5년이 넘었지만 대공이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은 처음 봤다. 살육귀라 불릴 정도로 가차 없는 사람이 저렇게 아련한 표정이라니. 그것도 그토록 증오하는 황제파의 수장 마델레이네 공작의 딸을 향해서. 등골에 오싹하니 소름이 돋았다. 윈스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16550651988766.jpg“전하. 따로 마델레이네가에 아는 분이 계십니까?”

대공은 아무 말도 없었다. 윈스터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 망할 놈의 황제 때문에 대공 전하가 전장을 구른 게 벌써 10년 차였다. 제도에서 곱게 자랐을 마델레이네 공녀와는 접점이 없을 게 뻔했다. 전장에 있는 마델레이네의 둘째 공자 제이드 마델레이네 부단장을 통해서라면 모를까. 윈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퇴각 명령도 무시하고 돌진하는 막무가내 제이드 마델레이네에 대해서라면 윈스터도 잘 알고 있었다. 대공과 매번 부딪히는 그가 본인의 여동생을 소개시켜 준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부단장이 공으로 된 것은 아닌지 능력은 나름 제법이었지만, 그놈의 불같은 성미는 대공이 아니라면 꺾을 수조차 없었다. 황궁 기사단만 아니었더라면 진작 쫓아냈을 텐데. 윈스터가 이를 아득 갈았다. 그러는 새 대공이 로브를 눌러쓰며 윈스터를 향해 슬쩍 몸을 돌렸다. 로브 아래로 희고 날카로운 턱선이 언뜻 보였다 말았다.

16550651988794.jpg“……윈스터.”

낮고 우아한 남자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사람을 누르듯 위압감 있는 목소리에 윈스터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곧추세웠다.

16550651988766.jpg“예.”

16550651988794.jpg“……황궁 가기 싫다.”

16550651988766.jpg“예?”

16550651988794.jpg“어차피 가봤자 공을 돌리라느니, 맹세를 하라느니 개소리만 할 텐데. 황제는 왜 죽지도 않,”

16550651988766.jpg“대, 아니 도련님!!!”

남자가 근사한 목소리로 투정을 부리자 윈스터는 질겁하며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큰 소리에 지나가는 몇몇이 윈스터를 힐끗거렸다. 하지만 윈스터한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다 못해 가슴 바깥으로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세상에, 비칸데르의 사람들로 즐비한 곳이라면 모를까 이 사람 많은 곳에서 황제를 두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은 한 치 흔들림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16550651988794.jpg“예의 없는 짓이야, 윈스터. 모시는 도련님의 말을 자르고 다른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소리를 지르다니. 이래서야 베서니가 본다면 경을 칠 텐데.”

대공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윈스터는 억울했다.

16550651988766.jpg“도련님이야말로. 제발 조금만이라도 저를 신경 써 주십시오. 이곳이 진영이나 대공가도 아니고. 집사님이야 보통 사람 간이 아니라서 괜찮을지 몰라도 저는 아주 평, 범, 한 사람입니다.”

16550651988794.jpg“평범한 사람? 술 마셔도 그래?”

그 말에 윈스터가 목을 움츠렸다. 술만 마셨다 하면 앞장서서 황제의 욕을 하던 제 모습이 떠올랐다.

16550651988766.jpg“저만 그러는 게 아니라 요리사님도 그러고 다 그러니까.”

흥. 대공이 코웃음을 쳤다. 윈스터는 얼른 입장을 바꿨다.

16550651988766.jpg“……생각해 보니 가기 싫으시긴 하시겠어요.”

16550651988794.jpg“그래도 예전만큼은 아니야.”

16550651988766.jpg“그럼요. 이제는 저희도 다 준비되었지 않습니까. 대공가가 얼마나 튼튼해졌습니까. 선대 대공비 전하의 백수정 광산만 돌려받는다면 전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뭐든 행해질 것입니다.”

윈스터가 굳건한 얼굴로 말했다. 로브 아래로 대공의 웃는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마주하던 윈스터가 힘겨운 나날 끝에 번성한 대공가를 떠올리며 감격하는 사이 대공은 마차가 사라진 곳을 다시 눈에 담았다. 붉은 눈동자 위로 기대감이 번졌다. 곧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듯 말이다. * * *

16550651988766.jpg“오셨습니까. 아가씨.”

1655065198876.jpg“응. 내가 없는 동안 별일이라도?”

올리비아의 말에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16550651988766.jpg“네. 조금 전, 황궁으로부터 꽃과 카드가 왔습니다. 언제나처럼 아가씨 방에 올려 두었습니다.”

1655065198876.jpg“고마워.”

약속을 어기는 날이면 레오포드는 꽃다발을 보내왔지만 당일에 온 건 처음이었다. 아까 마리아 에텔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서일까.

16550651988766.jpg“태자 전하께서는 오늘도 꽃을 보내 주신 거예요? 아가씨 꽃 때문에 일찍 오자고 그러신 거였군요!”

샐리가 활짝 웃으며 계단을 뛰어 올라가 문을 열었다. 방으로 들어서자 집사의 말대로였다. 테이블 위에는 꽃다발이 있었다. 평소의 화려한 꽃다발과는 달리 꽃송이가 작은 보라색 꽃이었다.

16550651988766.jpg“저 꽃은.”

샐리가 아는 척을 했다. 올리비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 사서함 속 편지의 상대인 기사로부터 받은 꽃과 똑같은 꽃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같은 꽃이 왔을까. 올리비아는 꽃다발을 들어 보았다. 꽃다발 속에는 몇 주 전부터 함께 오던 카드도 꽂혀 있었다. 오늘은 무슨 말이 쓰여 있을까. 늘 그랬듯 오늘 있었던 상황의 설명이겠지. 애써 기대감을 누르며 카드를 열던 올리비아의 눈이 커다래졌다. - 공녀가 이 꽃의 꽃말을 알면 좋을 텐데. 모를까 봐 함께 적어 넣지. 이 꽃의 꽃말은 ‘내 마음의 끝은 그대에게로’야. 다음 주 월요일을 기대하지. 카드에 적힌 문구가 레오포드의 말투로 들리는 것만 같았다. 처음이었다. 나오지 못한 상황에 대한 변명이 아닌 제 마음을 풀어 주려 애쓰는 레오포드의 카드는. 카드를 몇 번이나 읽는 사이 어느새 단단하던 응어리가 눈처럼 녹아 버렸다.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고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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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샐리가 놀리듯 한마디 했다.

16550651988766.jpg“오늘은 또 뭐라고 보내 주셨기에 아가씨 얼굴에 꽃물이 들었을까요?”

힐끗 바라본 거울 속 제 얼굴이 정말 상기되어 있었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1655065198876.jpg“전하께서 꽃말을 알려 주셨어.”

16550651988766.jpg“꽃말이요? 그 꽃말 ‘내 승리를 그대에게 보내 드립니다’ 맞죠?”

샐리가 더듬더듬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올리비아가 기사의 편지에 적혀 있던 꽃말을 읽어 줬던 적이 있었다. 올리비아는 대답 대신 웃었다. 이 보라색 꽃에 원래 알던 것과 다른 꽃말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레오포드가 알려 준 ‘내 마음의 끝은 그대에게로’라는 꽃말도 더할 나위 없이 감동적이었다. 그래. 제가 알던 레오포드는 이런 사람이었다. 그 어린 날에도 곤란에 빠져 있던 저를 구해 주던 다정한 남자. 지금도 상처받았을 자신을 위해 신경 써서 꽃말을 살피며 꽃을 보내 주는 남자. 올리비아는 꽃다발에 코를 가져다 댔다. 은은한 꽃 내음이 올라왔다. 녹녹해지는 기분에 올리비아는 저를 초라하게 만들던 레오포드의 행동들에 이유를 붙였다. 지금 레오포드가 저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도, 제가 아닌 마리아 에텔과 있는 것도 다 사정이 있어서라고 말이다. 연인과 갈라져야 하는 게 화가 나서. 혹은 반쪽짜리라고 불리는 제 불명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아직은 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일 거다. 이 모든 상황이 걷히면 레오포드는 저를 사랑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까.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 여섯 개의 카드가 보였다. 올리비아는 그 위에 새로운 카드를 얹었다. 차곡차곡 쌓인 카드를 보자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떠올랐지만 올리비아는 애써 외면했다. 꽃다발과 카드로는 달래지지 않는 쓸쓸함을 꾹꾹 누르며 다시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지나간 약속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야. 이렇게나마 나를 챙겨 주는 마음이 중요한 거지. 언젠가는 다 괜찮아질 거다. 제가 더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정말로 레오포드가 자신을 바라봐 줄 거였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꽃을 톡 건드렸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샐리가 말했다.

16550651988766.jpg“참, 아가씨. 저녁 준비 다 되었다는데. 바로 확인하실 거죠?”

  * * * 마델레이네 공작가의 저녁 식사에는 대체로 세 명만 자리했다. 콘라드, 올리비아, 그리고 에셀라. 뾰로통한 얼굴로 샐러드를 먹던 에셀라가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16550652065357.jpg“오라버니 저 정말 다 먹었어요. 끝!”

16550652065362.jpg“아직 절반도 안 먹었는데?”

콘라드가 에셀라의 접시를 눈짓했다. 손도 대지 않은 것처럼 멀쩡한 스테이크에 에셀라가 얼른 가니시를 먹는 체하며 말했다.

16550652065357.jpg“진짜 다 먹었다니까요? 원래 데뷔탕트 준비 때는 이 정도만 먹어야 해요.”

16550652065362.jpg“……새벽에 제이드한테 편지가 왔는데, 안 보고 싶은 거지?”

최후통첩 같은 콘라드의 말에 에셀라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콘라드가 씩 웃으며 에셀라의 접시를 눈짓했다. 에셀라가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연어 스테이크를 급하게 잘라 먹기 시작했다.

16550652065357.jpg“오라버니, 오늘따라 스테이크 정말 맛있네요. 그러니까 편지 줄 거죠?”

어설픈 연기에 콘라드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을 받자마자 에셀라가 밉지 않게 콘라드를 흘겨보았다.

16550652065357.jpg“진짜, 오라버니도. 제이드 오라버니 소식을 우리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그렇죠. 언니.”

갑자기 들어온 말에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콘라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뒤늦게 아차,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이드의 소식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황궁 제3기사단 부단장 제이드 마델레이네. 훌륭한 기사인 제이드는 1년 반 전, 헤페르티와의 전쟁에 자원해 남부 경계로 떠난 뒤로 본 적이 없었다. 다른 기사들은 승진이며 휴가며 잘만 복귀하는데, 제이드는 가끔 오가는 편지로만 소식을 보낼 뿐이었다. 이번에는 제게도 편지가 왔을까. 올리비아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1655065198876.jpg“저, 오라버니. 저도 편지 받으러 가도 될까요?”

16550652065362.jpg“……글쎄. 따로 받을 편지가 있었어?”

1655065198876.jpg“네?”

뼈 있는 말에 올리비아는 어쩐지 숨을 삼켜야 할 것 같았다. 콘라드가 농담을 하듯 눈을 휘었다. 하지만 가느다랗게 접힌 눈매 속 눈동자가 차가웠다.

16550652065362.jpg“아쉽게도 이번은 아닌가 봐. 너한테 온 편지는 없거든.”

1655065198876.jpg“……많이 바쁜가 보네요.”

올리비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라는 듯 에셀라를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콘라드의 한쪽 눈썹이 매섭게 올라갔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눈만 도록도록 굴리던 에셀라가 티 나게 화를 내기 시작했으니까.

16550652065357.jpg“아아니! 진짜 제이드 오라버니. 오면 내가 아주 뭐라고 할 거야. 진짜 팔 다친 거 아니면 봐주기 없어요. 다들. 알겠죠?”

당연하게도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에셀라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16550652065357.jpg“참, 언니! 언니 데뷔탕트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언니 데뷔탕트 준비 완벽했잖아요!”

완벽한 데뷔탕트라. 혀끝에서 굴러가는 말이 생소해서. 올리비아는 속으로 조소했다. 제 데뷔탕트는 엉망이라는 말이 더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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