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러헤이른 거리의 남자2022.03.16.
“그러면 다음 주 월요일에도 태자 전하를 뵈러 오시는 거예요?”
마차가 궁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담 하녀인 샐리가 물었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샐리의 얼굴이 환해졌다. 에셀라와 동갑인 샐리는 마델레이네가에서 후원하던 보육원에서 온 하녀였다. 유독 저를 잘 따르는 모습이 에셀라와 비슷해 몇 번 챙겨 주었더니 전담 하녀를 맡겨도 괜찮을 정도로 성장했다.
“태자 전하께서도 아가씨를 참 좋아하시나 봐요.”
순진하게도 낭만적인 사랑을 찾는 샐리의 모습에 올리비아는 조금 웃었다. 하긴. 사랑 앞에서 순진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주 월요일에 함께 식사를 하지. 점심시간에 맞춰 마차를 보낼게.”
레오포드의 말이 귓전에 생생했다. 아버지께서도 이 사실을 알면 기뻐하실 텐데. 레오포드가 먼저 데이트를 신청한 건 처음이니까. 잘했다고 한마디 해 주시지 않을까? 계속 저를 외면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올리비아는 의식적으로 지우려 노력했다. 끝없이 뻗었던 황궁의 웅장한 모습이 끝나고, 창밖으로 화려하고 우아한 상점들이 보였다. 러헤이른 거리. 제도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자 유행을 선도하는 거리였다. . . . 화려한 부티크 거리, 샐리의 걸음이 느려졌다. 선망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건 부티크 입구에 전시된 화려한 드레스였다.
“그렇게 예뻐?”
“헤헤. 이번 마담 플루토 신작인가 봐요. 반짝거리고 너무 예쁘지 않아요?”
민망한 듯 웃던 샐리가 다시 눈을 반짝거렸다. 그 말에 올리비아도 유심히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옅은 분홍색에 치마 레이스가 풍성하게 잡힌 게 에셀라한테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했다. 에셀라가 저 드레스를 입는다고 생각하니 올리비아의 기분도 좋아졌다.
“샐리. 저기 부티크 다음 주 내로 저택에 오라고 해.”
“아가씨 드레스 맞추시게요? 세상에!”
“나 말고. 에셀라.”
뛸 듯 기뻐하던 샐리가 입술을 비죽였다. 공녀님을 모시게 되면 매일 부티크 순례를 다닌다고 들었는데 그건 다 거짓말이었다. 가족들 물건을 사느라 바쁜 아가씨는 정작 자신의 몫은 챙기지도 않았다.
“아가씨께서도 저렇게 화사한 색의 드레스 잘 어울리실 텐데.”
“나중에.”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다음을 기약했다. 샐리는 그 ‘나중에’가 5년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오늘도 일기장 사러 가셨다가 사서함에 가실 거죠?”
“응. 오늘은 편지가 왔으려나?”
장난스러운 올리비아의 말에 샐리는 아차 했다. 취미 하나 없는 아가씨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편지’가 오지 않은 지 벌써 6개월이 지났기 때문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샐리를 보며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바쁘겠지. 한창 전쟁이 막바지라고 하는데.”
샐리에게 하는 말은 사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일 년가량을 오가던 편지가 6개월이나 오지 않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였다. 그것도 수신자가 헤페르티와의 전쟁에 참여한 기사라면 더더욱.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 기사와 편지를 주고받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제이드가 전장으로 떠난 뒤 올리비아는 여러 번 구호품을 보냈다. 하지만 제이드는 올리비아의 이름으로 보낸 구호품을 모조리 돌려보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명을 써서 구호품을 보냈다. 그 구호품은 돌아오지 않는 걸 보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그 물건들을 제이드가 쓴다는 것만으로 좋았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제게 편지가 왔다. 전장에서 온 편지는 구호품에 대한 감사 인사였다. - 리브 그린 님께 감사를 담아. 그날 올리비아는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누군가가 제게 이렇게까지 고마움을 표하는 게 정말 어색해서 또 간지러웠다. 그렇게 계속 편지가 오갔었다. 육 개월 전, 편지가 끊어지기 전까지. 잘 지내고 있겠지. 승기를 잡았다고 하니 바빠서 그러겠지. 올리비아는 차곡차곡 보관해 둔 편지들을 떠올리며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오늘은 정말 편지가 왔으면 좋겠는데. 올리비아가 내심 기대를 품으며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매번 일기장을 사는 서점은 번화가의 외곽에 있었다. 번화가만 벗어났을 뿐인데 주변이 한결 조용해졌다.
“통행세! 귀하신 분이라 귀를 먹었나 왜 말을 못 알아먹어?!”
골목 저 안쪽에서 들려오는 험악한 고함이 들려왔다.
“아가씨, 아직도 통행세 받는 사람들이 있나 봐요.”
“그러게 말이다.”
말을 하면서 올리비아는 걸음을 옮겼다. 큰소리가 난 곳이 여기쯤이었던 것 같은데. 생각을 하며 바라본 골목 안쪽에는 우락부락한 남자들과 그사이에 둘러싸인 사람 한 명이 있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썼지만 남자들 사이에서도 훌쩍 큰 키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뻔해도 너무 뻔한 장면이었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패거리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앙? 뭐야? 어디서 나타난 겁대가리 없는 것들이지?”
“그것도 둘씩이나 말이지.”
느물거리는 웃음과 함께 두 명이 올리비아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이 잠시 멈칫했지만, 두 명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올리비아가 여상히 말했다.
“소문이 느린 모양이구나. 이 거리에서 함부로 통행세를 받다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쫙 퍼진 줄 알았는데.”
“뭐?”
“저 여자가 뭐라는 거야. 이봐, 귀족 아가씨. 이런 골목은 혼자 다니지 말라고 집에서 안 그러던?”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었다.
“어이, 내 말이 안, 악!!”
남자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벽으로 밀쳐졌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어딜 가든 귀족이 혼자 다니는 경우는 없었다. 무려 공녀이자 황태자의 약혼녀인 올리비아라면 더더욱. 올리비아가 가볍게 말했다.
“치안대로 보내세요.”
“예. 공녀님.”
호위 기사인 르인 경이 큰 보폭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나머지 남자들이 당황한 듯 소리치며 잭나이프를 빼 들었다. 로브를 쓴 사람을 향해 찌를 듯 겨누며 소리쳤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저런. 올리비아는 혀를 찼다. 진짜 기사인 르인 경은 칼에 예민했다.
“다, 다가오지 말라니, 으악!”
“아악! 이, 이런다고 가만, 악!”
르인 경이 다가가자 겁먹은 남자들이 마구잡이로 르인 경을 향해 칼을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단번에 남자들은 제압되었고, 기사들이 남자들을 줄줄이 연행했다.
“수고하셨어요.”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라는 듯 르인 경과 파트너인 데로본 경이 목례했다. 그리고 올리비아를 바라보다 골목 안쪽을 향해 힐끗 눈짓했다. 저자는 어떻게 하냐는 표시에 올리비아는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로브를 쓴 사람은 골목 안쪽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올리비아가 안쪽으로 향했다. 뒤에 있던 샐리가 화들짝 놀라 작게 말했다.
“아가씨! 직접 가시게요? 위험한 사람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네가 갈래?”
놀리듯 장단을 맞추자, 샐리는 무슨 목숨이라도 건 듯 결연하게 말했다.
“네! 제가, 제가 다녀올게요!”
올리비아가 옅게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르인 경과 데로본 경이 제 뒤를 따랐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샐리마저도 바짝 제 뒤를 쫓았다. 귀하신 분, 이라더니. 제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도 그치들은 통행세를 넉넉하게 받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의 로브에는 화려한 무늬가 수놓아져 있었지만 고급 제품에서 놓는 수는 아니었다.
“괜찮나요?”
“……폐를 끼쳤습니다. 덕분에,”
나지막하던 남자의 말이 뚝 끊겼다. 로브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쪽을 빤히 쳐다보는 듯했다. 뭐지? 이상한 침묵에 올리비아가 갸웃하는 사이 이내 남자가 천천히 올리비아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던 찰나였다. 갑자기 남자가 크게 휘청거리며 올리비아 쪽으로 기울어졌다. 놀란 올리비아가 저도 모르게 남자를 부축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르인 경과 데로본 경이 얼른 다가왔지만 남자는 바로 정신이라도 차린 듯 올리비아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아가씨!”
놀란 샐리가 올리비아의 앞을 막아선 사이. 데로본 경이 남자의 로브를 벗겼다. 막 성을 내던 샐리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렇게 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남자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까마귀 깃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흰 피부, 짙은 눈썹과 가늘게 휘어진 깊은 눈매 속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귀족적인 콧날 아래 모양 좋은 입술까지.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은 마치 신이 공들여 빚은 것처럼 완벽한 미모였다. 하지만 지금 모두를 숨죽이게 만든 건 남자의 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칼에 위협당한 후에도 무덤덤하던 목소리가 무색하게도, 남자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 잘게 떠는 붉은 눈이 올리비아와 마주했다. 갓 태어난 사슴이 처음으로 구원자를 만난 것처럼, 남자의 흰 얼굴 위로 다채로운 감정이 지나갔다. 약간의 무서움과 안도감이 지나고 고마움이 선연할 때. 그제야 남자가 웃었다. 가느다랗게 눈이 접히며 그 아래로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다. 처연한 눈물에 모두가 말을 잃은 사이 남자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리가 풀려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아찔했는데. 감사합니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남자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자태에 올리비아를 비롯한 모두가 당황한 나머지 두 가지 사실을 잊어버렸다. 남자가 처연하게 흘린 눈물 한 방울은 짜내듯 나온, 개미 오줌만 한 눈물 한 방울이었다는 사실과.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처럼 붉어진 눈매와 달리 눈동자는 오롯이 올리비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 이렇게 두 가지를 말이다. . . .
“……다시 한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해를 끼칠 것 같지는 않았는지, 르인 경과 데로본 경이 다시 멀찍이 떨어졌다. 이제야 조금 진정이 된 듯, 남자가 로브 끝을 잡고 눈가를 콕콕 찍었다. 창피한 듯 멋쩍게 웃었지만, 목소리는 근사했고 시선은 또렷했다. 아름다운 얼굴에 웃을 때마다 고귀한 기품이 언뜻 비쳤다. 올리비아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제국의 귀족이라면. ……나를 향해 이렇게 웃을 리는 없을 텐데. 열두 살 때 제국의 귀족 연감을 완벽하게 외운 올리비아도 처음 보는 남자였다. 귀족 연감에 빠진 귀족이라면 처형되었거나, 아니면…… 비칸데르 대공가거나. 새까만 머리카락과 붉은빛이 도는 루비색 눈동자. 누군가가 떠오르는 외모의 특징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비칸데르 대공이 떠오르다니. 3년을 넘기며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던 헤페르티와의 전쟁을 승리로 물들이는 전쟁 영웅. 핏빛 눈동자와 어둠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으로 모두를 겁에 질리게 한다는 그가 저 무해하게 웃는 남자와 동일인일 리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터에 있을 대공이 이 러헤이른 거리 뒷골목에서 시정잡배한테 둘러싸여 통행세나 요구받는다니. 말도 안 된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조차 못 할 남자가 순하게 웃었다. 올리비아가 등을 곧추세우고 태연한 낯으로 남자를 마주했다. 저 남자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마델레이네 공녀이자 태자의 약혼자였다. 제가 먼저 시선을 피할 이는 이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얼른 예의를 차리고 헤어지려는데 올리비아의 말에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사래를 쳤다.
“도움뿐이 아니에요. 나를 구해 주신 걸요.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남자가 설핏 아쉽다는 듯 웃었다.
“내 기사가 마차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만 안다면 정말 바로 보답이라도 할 텐데.”
눈 번쩍 뜨고도 코 베이는 줄 모른다는 이 러헤이른에서 혼자 골목을 서성이고 있더라니. 용병도 아닌 기사와 함께 온 것을 보면 부를 축적한 신흥 귀족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얼굴을 모르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보다, 기사와는 어디에서 헤어졌어요?”
“분수대가 있고 마차가 많은 곳이요.”
러헤이른 거리에 분수대는 많았지만 마차까지 많은 곳은 한 곳. 사계의 정원이었다. 다행히 바로 뒤였다. 햇빛이 무르익은 시간이었다. 사계의 정원 쪽으로 나가는 길로 접어들자 물소리와 함께 짜랑한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도록 해요. 거의 다 왔으니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거예요.”
“같이 안 가세요? 정말 거짓말이 아니라 내가 기사만 찾으면 귀한 것들을 선물할 수 있는데.”
“마음만 받을게요.”
“그러면 다음을 기약하는 건요?”
“그것도 어렵겠네요.”
딱 떨어지는 대답이었지만 남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러면 저는 또 한 번 행운을 기대해야겠네요.”
참 재미있는 남자다. 저를 만날 게 행운이라니. 그 누구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에 낯이 간지러워 고개를 숙이고 싶을 정도였다. 낯이 확 붉어질 법한 말을 하고서도 남자는 다정하게 웃었다. 아까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졌다. 어머. 뒤에 서 있던 샐리가 호들갑을 떨었다. 저 역시 약혼자가 없었으면 저렇게 설레 했을까. 문득 오늘 낮의 레오포드가 떠올랐다. 마리아 에텔과 함께 있던 제 약혼자. 입이 써서. 올리비아가 일부러 옅게 웃었다. 하지만 남자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다시 만난다면 말이죠.”
정말 만약에요. 남자가 얼른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부디 내게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어요?”
올리비아는 순간 숨을 삼켰다. 너무 이상했다. 누군가 제게 허락을 구하는 이런 상황은. 손을 들어 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무언가 왈칵왈칵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속이 어지러웠다. 이 처음 보는 남자의 말 한마디가 뭐라고. 남자는 말 없는 올리비아를 재촉하거나 더 말을 늘어놓지 않았다. 대신 대답을 기다리는 듯 가만히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일부러 턱을 치켜올리고 거만하게 말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눈이 높아요.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받지 않을 텐데 말이죠.”
“그거 잘되었네요.”
남자의 눈매가 시원스레 접혔다. 붉은 입매 끝에 달큼한 웃음이 걸렸다.
“나는 언제나 탐을 내는 자거든요. 자연히 내게는 가장 마음을 들여야 구할 수 있는, 귀한 것들이 가득하지 않겠어요?”
귀한 것, 이라고 말하는 남자의 발음이 어쩐지 묘해서. 올리비아는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가느다란 눈매 속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가 도발하듯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