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수요일 오후 2시의 약속2022.03.13.
오늘도 안 오시려나. 올리비아는 한숨을 삼켰다. 차는 식은 지 오래였다. 벌써 3시 반이었다. 수요일 오후 2시, 태자비 궁의 야외 정원에서의 차 한 잔. 3년 전부터 공식 약속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레오포드가 얼굴을 비추는 건 1년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약속을 어기는 날이면 하루 이틀 뒤에야 화려한 꽃다발이나 보석을 보내는 게 다였다. 몇 주 전부터는 꽃다발에 카드도 추가되었다.
- 유감이야 공녀. 갑자기 회의가 생겨서.
- 오랜만에 본 친우와 대화가 길어져 가지 못했네.
- 머리가 아파서 보지 못한 게 아쉽군.
올리비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실망감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매번 이랬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실망하고. 또 기대하고, 또, 실망하고.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시녀들의 시선이 따끔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해도 먹잇감을 보듯 날카로운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2개월 전 새로 황후의 체스 말이 된 체이즈 백작 부인의 시선이 그랬다. 지난번에도 황후로부터 태자를 사로잡지 못한다고 비난을 들었다. 더 이상 책을 잡힐 수는 없었다. 오늘은 정말 레오포드가 보고 싶었는데. 시원스레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근사한 제 약혼자. 밉다가도 또 보고 싶어졌다. 하긴, 레오포드가 아무리 올리비아를 기다리게 한다고 해도 저는 결코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었다. 아홉 살, 처음 보았을 때부터 올리비아는 레오포드가 좋았으니까.
“태자비가 되거라.”
그날은 레오포드의 열한 번째 생일이었다. 공작은 어린 올리비아를 향해 칼날처럼 시리게 말했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거 하나조차 못 해내지는 않겠지.”
공작의 눈매가 좁아졌다. 마치 어머니가 시장에서 고기를 볼 때처럼, 쓸모를 가늠하는 듯한 눈이었다. 올리비아의 심장이 훅 떨어졌다.
“잘, 할 수 있어요!”
공작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올리비아는 힘차게 대답했다. 처음이었다. 공작이 먼저 말을 걸어 준 것은. 제가 잘해 낸다면, 앞으로 아버지가 계속해서 말을 걸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부풀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화려한 연회장에 들어갔을 때 무참히 깨졌다.
“네가 그 마델레이네가의 사생아야?”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이들의 잔인한 말들은 계속되었다.
“쟤 때문에 공작 부인께서 돌아가셨다며?”
“맞아! 우리 엄마도 그러셨어.”
“적통이 아닌 게 여기는 왜 왔대?”
그 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는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그 아픈 장면은 천사처럼 아름다운 레오포드의 말 한마디로 구원되었으니까.
“예쁜 이름이네. 올리비아.”
스물이 된 지금도, 올리비아는 열한 살 레오포드의 다정한 웃음을 똑똑히 기억했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던 그곳에 나타난 진짜 천사. 그때부터 올리비아는 레오포드를 좋아했다. 장장 십일 년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다리게 해도 올리비아는 꾹 참았다. 언젠가는, 정말 곧. 제가 최선을 다한다면 레오포드가 다시 저를 봐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말이다. 아련한 옛 추억은 여전히 예뻤다. 피식 웃은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들이 주변으로 다가왔다. 가장 선두에 있는 체이즈 백작 부인이 말했다.
“출궁하시려는 겁니까? 황녀 전하께서 부르시던데, 빨리 가 보는 게 좋을 거예요.”
황녀의 호출이라니. 이번에는 또 무엇을 맡기려고 그럴까. 저번처럼 꽃 장식 같은 거면 좋을 텐데. 몇 달 전, 춘궁기에 빠졌던 황녀의 영지를 아무도 몰래 복구했던 일이 떠올랐다. 올리비아의 사재를 먼저 사용해 해결하라고 말한 뒤 연락이 되지 않던 황녀는 올리비아가 정말 사재를 사용해 복구한 뒤에야 아무 일 없다는 듯 나타났다. 올리비아에게 태자비 자질이 있는지 보겠다는 명목하에, 황녀는 늘 당당하게 제 일을 올리비아한테 미뤘다. 맥이 끊겼다는 백수정 광산, 또 그전에는 멸망한 왕국의 목걸이. 심지어는 신화로만 전해지는 새끼 용을 데려오라는 억지도 있었다. 또 한 번 말도 안 되는 명령이 떨어질까, 묵직한 걱정이 가슴에 얹혔다.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부인, 잠시 태자 궁에 들를 일이 있어 이후에 바로 찾아뵙지요.”
“태자 궁으로요? 거긴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지 않습니까, 공녀. 아무리 태자 전하가 뵙고 싶다고 해도, 체면은 지키셔야 하지 않,”
“부인.”
나지막하게 제 말을 자르는 낮은 목소리에 체이즈 백작 부인은 순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입을 벌린 채로 눈을 깜빡였다. 백작 부인은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마델레이네가의 더러운 사생아인데.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며 서릿발처럼 차가운 초록색 눈동자며. 부인은 저도 모르게 어, 작게 신음했다. 어느 순간이었다. 올리비아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신경 써 주어 고맙습니다.”
“아, 어, 아닙, 니다.”
가벼운 목례를 하는 올리비아의 모습에 부인이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올리비아가 빙그레 웃으며 돌아섰다. 우아한 뒷모습이 저만치 멀어졌을 때에서야, 부인은 올리비아가 태자 궁 방향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녀님. 잘 지내셨습니까?”
올리비아가 태자 궁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종장이 나왔다. 잠시 놀란 듯 보였지만 이내 노련하게 올리비아를 향해 인사했다. 놀란 만도 했다. 레오포드가 그 수많은 약속을 어겨도 올리비아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으니까.
“감사해요. 시종장. 태자 전하를 뵈러 왔어요.”
시종장은 바로 레오포드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거나 왔다는 것을 고하겠다는 말 대신 잠시 머뭇거렸다.
“태자 전하께서 출타 중이신가요?”
“……그게.”
시종장이 말을 주저했다. 좋지 않은 생각들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그 순간, 상냥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어머, 마델레이네 공녀님 아니세요?”
저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에 올리비아가 뒤를 돌았다.
“……공녀?”
레오포드의 목소리에 맥이 탁 풀렸다. 약속 내내 기다렸던 레오포드는 태자 궁의 후원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금발의 아름다운 영애와 함께.
“……제국의 작은 태양께 경배를. 올리비아 마델레이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올리비아는 흡, 숨을 잠시 끊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매를 올렸다. 입가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지만, 올리비아는 애써 다정하게 말했다.
“……그리고 에텔 영애도. 오랜만입니다.”
마리아 에텔 후작 영애. 에텔가의 사랑스러운 막내. ……그리고 귀족파인 에텔 후작 때문에 레오포드의 약혼에서 제외되었던 태자의 연인. 눈앞이 새하얗게 번지는 것 같았다. 올리비아는 드레스를 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레오포드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혹시나 정말로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염려한 제 자신이 바보 같을 정도였다. 레오포드가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나타나는 습관이었다.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이지?”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목소리였다. 순간 올리비아는 레오포드를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어제부터 들떠 있었던 제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주 조금, 슬펐다.
“……전하께서 안 오시기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하여 제가 왔어요. 손님이 오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마리아 에텔을 손님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올리비아는 자꾸만 딱딱해지는 목소리를 애써 누그러뜨렸다. 레오포드와 마리아는 멀리서 보기에도 정다운 관계를 뽐내듯 무척이나 가까웠다. 아무한테나 곁을 주지 않는 남자인데. 늘 저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레오포드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저렇게 쉽게 가까이에 있었다. 그것을 인지하자 마음 한편이 훅 떨어졌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연락도 없이.”
올리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확인 사살이었다. 그사이, 시종장이 황급히 레오포드의 옆으로 다가가 소곤거렸다. 그제야 레오포드의 얼굴에 이해가 스쳐 지나갔다. 레오포드의 눈에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금세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벌써 수요일이었군.”
‘벌써’라. 올리비아는 대수롭지 않은 척 대답했다.
“네. 벌써, 수요일이네요.”
일주일 중 올리비아가 가장 기다렸던 날이 바로 수요일이었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을 안고 퇴궁을 할 때부터 다음 주 수요일을 기다렸다. 황후와 황녀의 부름을 받을 때도, 태자비 궁의 일을 처리하느라 입궁할 때에도, 얼굴 한번 보고 가고 싶다는 마음을 꾹꾹 누를 때도 수요일을 기다렸다. 약속에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레오포드가 혹시나 다른 날에 온 저를 달가워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 가장 최악인 줄 알았는데. ……약속 날인 것도 잊은 채 저를 보고 곤란한 얼굴을 하는 건 정말 생각도 못한 최악이었다. 머릿속이 엉키는 사이, 레오포드가 올리비아를 향해 걸어왔다.
“요즘 내가 정신이 없다 보니. 요일도 깜빡했네. 올리비아. 많이 기다렸어?”
“그리 오래는 아니었어요.”
“저런. 내 약혼녀께서 잔뜩 토라지신 모양이네.”
안타깝다는 듯 나직이 말한 레오포드가 손을 내밀며 근사하게 웃었다.
“데이트를 통해 만회하고 싶은데. 다음 주 월요일이 어떨까?”
“예쁜 이름이네. 올리비아.”
찬란히 햇살이 비춰 오는 탓일까. 아니면 다정한 목소리 때문일까. 분명히 화가 나고 속상한데도 옛 추억이 겹쳐졌다. 서러운 마음은 거절하라고 외쳤지만, 저 상냥한 목소리는 제 마음을 놓치지 않았다. 어차피 진 싸움이었다. 올리비아 마델레이네는 레오포드 프란츠를 사랑하고 있으며, 레오포드 프란츠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기꺼이요.”
올리비아가 레오포드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레오포드가 시원스레 웃으며 올리비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푸르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올리비아를 마주했다. 당연히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오만한 눈빛에도 올리비아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아릿거렸지만 올리비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곧 괜찮아질 거다. 전하께서도 노력을 하시니 곧 좋아질 거다. 저만치에서 찌르듯 저를 보는 마리아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올리비아는 무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올리비아는 몰랐다. 레오포드와 마리아가 걸어올 때, 매번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녀의 마음에 아주 조금, 실금이 갔다는 것을 말이다. 올리비아는 그 모든 것을 외면한 채로 환하게 웃었다. . . .
“바로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배웅은 시종장의 몫이었다. 시종장은 올리비아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올리비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왜 시종장이 잘못한 것처럼 굴까. 정작 레오포드는 마리아 에텔과 궁 안으로 들어갔는데.
“괜찮아요. 잠시 황녀 전하의 부름을 받았거든요. 볕도 좋으니, 산책을 좀 하죠.”
“녹음의 궁까지는 좀 멀지 않으십니까?”
“녹음의 궁이요?”
“네. 오늘 티 파티는 특별히 녹음의 궁에서 하고 싶으시다고.”
시종장이 아차, 한 듯 말끝을 흐렸다. 으레 티 파티 장소는 황녀 궁이었는데. 언질 하나 없던 걸 보면, 아무래도 오늘 황녀가 저를 골탕 먹이기로 단단히 결심한 모양이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걸어갈게요.”
올리비아는 걸음을 옮겼다. 궁의 정원은 아름다웠고, 햇살은 따스했다. 올리비아는 가만히 숨을 참다가 후, 뱉었다. 이상했다. 평소라면 숨 한 번 참았다 뱉으면 다 괜찮아졌는데. 아침부터 답답한 속은 풀리지 않았다. 발 가는 대로 걷다 보니 벌써 녹음의 궁까지 다다랐다. 저 멀리 티 파티를 즐기고 있는 영애들이 보였다. 가장 상석에 앉은 황녀, 레이나가 기분 좋은 듯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주변을 두루 살피던 황녀가 올리비아를 발견했다. 영애들도 기척을 느꼈는지 웃음소리가 멈추고, 이내 곱지 않은 눈길들이 쏟아졌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공녀.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내 오라버니와의 만남이 썩 즐겁지 않았나 보죠?”
농담조로 던지는 말이 매서웠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다만, 태자 전하께서 황녀 전하의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어서 가 보라고 하셔서요.”
이게 꾸며 낸 이야기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황녀도 피식 웃고 테이블 한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리베오른 후작 영애보다 상석인 빈자리. 의도가 빤히 보이는 자리 구성이었다. 황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 티 파티에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가 되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작은 공녀의 건강 상태는 호전되었나요?”
“……송구합니다. 아시다시피 막내의 몸이 약해서.”
“저런. 안타까워라.”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황녀가 탄식했다. 올리비아는 탐색하듯 황녀를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황녀가 에셀라를 거론하는 빈도가 높아졌다. 공작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에셀라의 사교계 진출도 늦추고 있는 판에, 에셀라가 이곳에 오지 않을 거라는 건 황녀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무슨 의도일까.
“이 티 파티에 공녀가 함께한다면 좋을 텐데.”
“아이참, 전하. 바로 앞에도 공녀가 서 있잖습니까.”
“아!”
황녀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다처럼 아름다운 눈이 새까만 악의로 번들거렸다. 오늘은 이거구나. 황녀가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내가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공녀. 차가 다 식기는 했지만, 함께하겠어요?”
“어머, 아쉽지만 공녀께서 함께하기는 어려울 듯싶습니다. 오늘의 테마는 봄날인데. 공녀께서는……”
리베오른 후작 영애가 바쁘게 올리비아를 훑었다. 옆에서 다른 영애들이 덧붙였다.
“늪이네요. 저 찐득찐득하게 어두운 회색 드레스라니.”
“그러고 보면 공녀는 화사한 걸 싫어하나 봐요. 한 번도 화려한 걸 입는 걸 본 적이 없네요.”
“실례예요. 마거릿. 화사한 색감이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연습이라도 한 듯 합이 딱딱 맞았다. 한참이나 말을 하던 영애들이 교묘하게 올리비아를 훑어보았다. 제가 상처받기를 기대하는 영애들 사이에서, 올리비아는 쓴웃음을 삼켰다. 연회의 시선들에 비하면 이건 디저트 수준이었다. 혼자만 서 있는다는 모욕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삼킬 수 있었다.
“어머.”
그때,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회의가 끝났는지 귀족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저만치 다가오는 무리 앞에 아버지가 보였다. 올리비아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아,”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올리비아를 외면했다. 다른 귀족들이 혼자 서 있는 올리비아를 슬쩍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이상한 풍경에 끼어드는 귀족은 없었다. 귀족들이 다 지나갔을 때, 영애들이 다시 해사하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사람들의 쑥덕임이 올리비아를 훑고 지나갔다.
“공작이 정말 바쁘신 모양이야. 공녀.”
황녀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모르게 차올랐던 기대가 거품처럼 사그라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오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비참해졌다. 정말 무언가 얹히기라도 한 걸까. 올리비아는 다시 후, 숨을 뱉었다. 계속 꾹꾹 참아 온 마음에 감기처럼 탈이 난 거라고, 올리비아는 가볍게 넘기려 애썼다. 유난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