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너만 아니었어도2022.03.09.
모든 게 달라졌다. 유모는 돌아오지 않았고 늘 빵과 고기,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먹었다. 옷장에는 화사한 드레스가 가득 찼다. 무엇보다 달라진 건.
“언, 니?”
우유 단 내가 나는, 어린 에셀라가 곁에 있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는 본 적이 없었다. 예쁜 은발 머리를 곱게 빗은 여자아이였다. 부인은 사과처럼 빨간 볼을 톡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응. 여기는 올리비아 언니. 여기는 에셀라.”
세 살이라는 에셀라는 너무 예뻐서 만지면 사르르 사라져 버릴 천사 같았다.
“천, 사 같아요.”
“에셀라. 올리비아가 너를 보고 천사라는구나.”
에셀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경이롭다는 듯 바라보던 올리비아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에셀라, 아가씨.”
“응?”
부인이 슬쩍 이맛살을 찌푸렸다.
“에셀라라고 불러. 어쨌든 너와는 자매가 되니까.”
“그렇지만, 유모가 아가씨라고 부르랬는데.”
“그 유모가 잘못 알려 준 거야.”
감히, 저렇게 예쁜 아이의 이름을 불러도 될까. 하지만 부인은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올리비아는 아주 작게 이름을 불렀다.
“에, 셀라.”
이름을 알아듣는지 에셀라가 환하게 웃었다. 기분이 이상해졌다. 고작 며칠 전만 해도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행복했다. 부인은 초상화도 보여 주었다. 천사 같은 소년 두 명이 서 있는 초상화였다.
“큰 애가 11살 콘라드. 둘째는 8살 제이드야. 에셀라처럼 오라버니라고 부르면 돼. 콘라드는 아카데미에 가 있고 제이드는 곧 돌아올 거야.”
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택에 짜랑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제이드?”
부인은 에셀라를 안은 그대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올리비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 뒤를 따랐다. 계단을 뛰어 올라온 남자아이가 부인의 드레스 자락에 와락 안겼다.
“제이드. 우리 아가. 잘 놀다 왔어?”
“치. 갑자기 할머니 댁에 보냈으면서. 엄마 미워.”
“미안, 아가. 그래도 엄마 보고 싶었지?”
“……응.”
은발의 남자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올리비아는 가슴이 울렁였다. 부인과 남자아이의 모습은 꼭 몇 달 전 어머니와 제 모습 같았다.
“근데 쟤는 누구야?”
남자아이가 올리비아를 바라보았다. 아, 음. 부인이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제이드. 올리비아야. ……동생이야.”
“동생? 에셀라 말고? 그런데 쟤가 에셀라보다 더 큰데?”
“응. 6살이거든.”
제이드는 아무 의심 없이 올리비아를 향해 활짝 웃었다. 올리비아는 그게 당연한 건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콘라드는 아니었다. * * *
“쟤, 내 동생 아니야.”
11살, 또래보다 훌쩍 큰 체구에 서늘한 눈매의 소년은 쏘아붙이듯 말했다. 차가운 말 한마디에 올리비아는 다시 선 바깥으로 밀려났다.
“콘라드.”
“쟤는 내 동생 아니고, 더러운,”
“콘라드!”
강한 음성에 올리비아가 움찔했다. 하지만 정작 콘라드는 아이답지 않은 눈으로 올리비아를 노려보았다.
“……올리비아. 잠깐 나가 있을래?”
“……네.”
부인의 방문을 닫고 나왔을 때, 제이드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너 뭐 묻었어?”
“아니, 요?”
“그런데 왜 형이 너보고 더럽다고 그러지?”
올리비아는 대답할 수 없었다. * * * 어느 날이었다. 부인이 오랜만에 외출을 나간다고 했다. 콘라드부터 에셀라까지 쭉 줄을 선 아이들의 뺨에 입을 맞춘 부인이 올리비아를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올리비아는 반짝이는 기대를 품었다. 어쩌면. 하지만 부인은 올리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제이드가 순진하게 물었다.
“왜 올리비아는 키스 안 해 줘?”
“마자.”
에셀라가 맞장구를 쳤다. 제이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올리비아도 엄마한테 부인이라고 부르고. 내 동생이라며?”
흐리게 웃던 부인이 올리비아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엄마는 이 애의 엄마가 아니니까.”
“응?”
“아니야. 엄마 다녀온다고.”
“응! 잘 다녀오세요!”
콘라드가 저를 노려보았지만, 올리비아는 그래도 좋았다. . . .
“짠! 내가 너희를 위해 동화를 썼어. 일주일이나 걸린 거야.”
부인이 저택을 비운 첫날이었다. 스케치북을 들어 올린 제이드가 으스댔다. 며칠간 몰래 무언가를 그린다 싶더니. 삐뚤빼뚤한 글씨 아래 예쁜 공주님들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는 에셀라. 자수정 공주님이야. 그리고 여기는 올리비아.”
제이드가 환하게 웃으며 올리비아의 눈을 가리켰다.
“올리비아는 에메랄드 공주님이야.”
그 말에 올리비아는 심장이 벅차 울었다. 제이드가 당황했지만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에셀라는 영문도 모르고 울었다.
“언니, 울지 마. 흐엉.”
“야. 다 울지 마. 허엉.”
제이드가 울먹이며 올리비아와 에셀라를 끌어안았을 때. 따끈한 온기에 올리비아는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에셀라와 제이드, 그리고 부인만 있으면 다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였다.
“다, 너 때문이야!”
에셀라와 그림 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달려온 콘라드가 올리비아를 세게 밀쳤다. 얼결에 밀린 올리비아가 넘어졌다. 에셀라가 울음을 터트렸지만 콘라드는 에셀라를 달래지 않았다. 달랠 수가 없었다. 콘라드도 울고 있었으니까. 소년티가 나는 콘라드가 엉엉 울며 소리쳤다.
“너만 안 왔어도! 너만 없었어도! 우리 엄마가!”
번개가 쳤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친정인 하엘퀸 후작저에서 돌아오던 부인의 마차가 전복되었다고 했다. 그녀가 친정으로 간 이유는 공작과의 이혼 때문이었다. * * * 부인의 장례식을 마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비 오는 장례식 내내 방긋방긋 웃던 에셀라가 이상함을 눈치챈 듯 엄마를 찾았다. 아무리 유모와 하녀들이 에셀라를 달래도 소용없었다.
“엄마 어딨어?”
불안한 듯 큰 눈을 깜빡이던 에셀라가 울기 시작했다. 열린 문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올리비아가 살그머니 끼어들었다.
“언니!”
올리비아를 발견한 에셀라의 큰 눈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혔다.
“엄마가 안 와. 엄마 보고 싶어.”
엉엉 우는 에셀라를 보고, 올리비아는 문득 몇 주 전의 제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를 찾아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매일 밤 엄마를 그리워했던 올리비아 제 자신이. 올리비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에셀라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제야 에셀라가 엄마를 찾는 말을 줄였다. 얼른 올리비아를 내쫓으려던 유모와 하녀들이 아무 말 하지 못했다. 그 후로 에셀라는 자주 앓아누웠다.
“엄마, 엄마.”
천사처럼 예쁜 얼굴이 열에 들떠 엄마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불러도 부인은 “에셀라, 내 아가.” 하며 나타나지 않았다. 에셀라는 계속 엄마를 찾다 결국 입을 앙다물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여섯 살인 올리비아조차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애처로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제이드는 부인의 친정으로 갔다고 했고 콘라드는 방문을 닫은 채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침대 위에서 에셀라는 더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달콤한 젖내 내신 짭짜름한 눈물 냄새가 났다. 시선을 느낀 에셀라가 천천히 눈을 맞췄다. 보랏빛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다.
“언니, 엄마가, 안 와.”
앳된 목소리가 풀이 죽었다. 올리비아는 결국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이 애가 웃을까. 그렁그렁 울음이 맺힌 얼굴을 보며 떠오르는 말이라고는 올리비아가 가장 많이 들었던 유모의 말이었다.
“아가씨의 존재 자체가 마델레이네 가를 괴롭히고 있어요.”
“……미안해.”
“응?”
자그마한 목소리에 에셀라는 못 들은 듯 되물었다. 힘없이 깜빡이는 두 눈을 보니 올리비아는 자꾸만 울음이 차올랐다.
“언, 니가 미,”
그때였다. 방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올리비아가 문을 바라보았을 때, 형형한 기세의 공작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토록 무서운 얼굴은 처음 보았다. 겁을 먹은 올리비아가 무심결에 에셀라의 손을 꼭 잡았다. 잡아먹을 듯 무서운 눈으로 올리비아를 보던 공작이 올리비아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아!”
순간 같이 잡아당겨진 에셀라가 아픈 소리를 내었다. 올리비아는 얼른 에셀라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에셀라가 커다랗게 울기 시작했다. 팔목이 떨어져 나갈 듯 아팠다. 올리비아는 도움을 청하듯 하녀들과 집사를 바라보았지만 공작을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가씨. 울지 마세요.”
“아빠, 언니! 언니!”
당황한 듯 유모가 에셀라를 달랬지만 에셀라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저를 바라보고 서럽게 우는 에셀라를 향해 올리비아가 손을 뻗었다. 얼른 에셀라한테 가야 하는데. 방 밖으로 끌려 나온 올리비아가 발버둥을 쳤다.
“놔 주세요! 에셀라한테 가,”
쾅- 커다란 문이 닫혔다. 제게 손을 뻗으며 울던 에셀라가 문에 가려졌다. 가야 하는데. 올리비아가 원망 어린 눈으로 공작을 올려보려던 때였다.
“감히.”
잇새로 나오는 공작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웠다. 순식간에 올리비아가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감히 내 딸을 이름으로 불러?”
공작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꼭 무서운 산짐승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부러질 듯 세게 잡힌 팔의 통증조차 잊고 올리비아가 덜덜 떨었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은 제 아버지인데. 왜 이렇게 나를 세상에서 가장 미운 것처럼 보는 걸까.
“아, 아빠.”
“누가. 누가 네 아빠야.”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만큼이나 공작의 말이 날카로웠다. 순식간에 그어진 선에 올리비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공작이 감정을 억누르듯 나지막하게 말했다.
“잘 들어.”
“…….”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다시는.”
“…….”
“에셀라에게 말 걸지 마.”
“하, 하지만.”
부인이 저보고 언니라고 했는 걸요. 에셀라의 언니. ‘언니’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공작에 대한 공포가 잦아들었다.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어 공작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입 안 가득 차오른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너만 아니었어도.”
공작이 짜내듯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올리비아의 숨이 턱 막혔다. 조금 전 제 팔을 부술 듯 잡던 공작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진심으로 슬퍼하듯 보랏빛 눈동자가 떨렸다.
“……헤이즐은 살아 있었을 거야.”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이 올리비아의 심장을 쿵- 때렸다. 입 안을 채웠던 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 불행이, 나를, 내 집을 이렇게 만들었어.”
“…….”
“에셀라한테까지 그 불행을 옮기지 마.”
으스러져라 팔을 잡았던 공작이 천천히 손을 떼었다. 그리고 무심한 시선을 거둬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렸을 때, 에셀라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빠, 언니, 언니 왜 내쫓았어.”
“에셀라. 울지 말렴.”
문이 닫히기 전, 에셀라를 달래는 공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저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올리비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린 탓이기도 했고 팔이 아프기도 했다. 그제야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저 따뜻한 방 안과는 전혀 다른 느낌. 지나가는 하녀들과 하인들이 올리비아를 힐끔거렸다. 하지만 누구 하나 올리비아를 달래 주거나 일으켜 주지 않았다. 올리비아는 고개를 숙인 채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부인이 사 준 드레스의 소매가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 드레스를 받을 때만 해도 굉장히 좋았는데. 이렇게 귀한 걸 제가 받아도 되냐고 물었을 때 부인이 아주 조금 웃어 주기도 했는데.
“……흐윽, 흑.”
서러운 울음이 터져 나왔다. 팔이 아팠고, 에셀라의 울음이 아팠고, 공작의 말이 아팠다.
“……는 아무것, 도 안 했, 는데.”
뒤늦게서야 사라졌던 말들이 울음으로 나왔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부인은 제게 잘못이 없다고 했는데.
“너만 아니었어도.”
괴로운 듯 일그러진 공작의 얼굴이 생생했다. 공작은 오해를 하고 있는 거다.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저 이 저택에 온 것뿐인데. 하지만 공작의 말이 계속해서 올리비아를 괴롭혔다. 정말이면, 어떻게 하지? 덜컥 겁이 몰려왔다. 엄마가, 공작 부인이 보고 싶어서 올리비아가 엉엉 울었다. 눈이 붓고 목이 건조해질 때까지. 그때까지도 올리비아를 달래 주는 사람은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다. * * *
“……님, 공녀님.”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올리비아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마차 너머로 황궁이 보였다. 샐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도착했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러게.”
올리비아가 중얼거렸다. 꼭 꿈을 꾼 것 같았다. 부인이 저택에 있을 때의 기억, 모두가 화목하고 평화로웠다는 때는 어땠을까 하는 생각. 너만 없었더라면…… 하고 가정하는 공작의 말까지. 만약 제가 마델레이네에 입성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부인이 살아 있었을까? 그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은 꼭 올리비아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겼다. 하지만 지금 누가 뭐라 해도 올리비아는 마델레이네의 장녀였다. 또한 황태자인 레오포드 프란츠의 약혼녀이기도 했다. 비록 가족도, 레오포드도 아직까지 저를 진심으로 대하지는 않지만, 올리비아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사랑했다. 최선을 다한다면 이루어진다는 엄마의 말이 틀릴 리가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