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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명옥의 선택 (89/89)


89. 명옥의 선택
2023.08.06.


명옥이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두 손을 빌듯이 모아 붙였다. 그러곤 허겁지겁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제, 제발 저희 이대로 내치지 말아주세요. 가, 가족이잖아요. 네? 제가 언제 한 번이라도 아버님 명 거역한 적 있었나요? 저요…… 재가도 안 하고 평생을 이 집안 며느리로 살았어요.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

차 회장은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그녀의 말을 멈춰 세웠다. 쓰린 추억에 젖어 있을 때 보이던 노곤한 인상은 온데간데없었다.


“착각하지 말거라. 내 긴긴 세월 너를 품은 건 먼저 간 내 아들을 위해서지 너와 수빈이를 위해서가 아니야.”

“……그이요?”

“그래. 먼저 간 불쌍한 내 새끼…… 안사람이 남의 씨를 품었다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못 본다.”

차 회장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피를 토하듯 말했다.

씨근거리는 숨이 불규칙하게 쏟아져 나왔고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생각만으로도 치욕스러운지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침묵이 내려앉은 공간 속, 간간이 터져 나오는 흐느낌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명옥은 머리를 한껏 조아리며 차 회장의 입에서 나올 최종 판결을 기다렸다.

이윽고 모래를 씹은 것처럼 버석한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 위로 흩뿌려졌다.


“떠나거라.”

“아, 아버님…….”

“조용히 떠나.”

차 회장은 싸늘한 시선으로 명옥을 바라보다가, 소파 옆 협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 번째 서랍을 열자 통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종이 책자가 명옥의 앞으로 던져졌다.


“이건 수빈이를 잘 보살피라고 주는 거다. 그 아이는 천 번 죽었다 깨어나도 내 아들 자식이야. 만약 그 입을 잘못 놀려 누구 하나라도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

“두 사람 다 무사하지 못할 게다.”

차 회장이 명옥의 그림자를 밞으며 일어섰다.


“한 달이다. 한 달 안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으흑……!”

차 회장은 그녀의 흐느낌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홀로 거실에 남겨진 명옥은 바닥에 들러붙어 엉엉 울음을 토해냈다. 그 모습이 악에 받쳐 울어재끼는 여름날 매미 같았다.

한참 후, 그녀가 화장과 눈물이 번져 엉망이 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점을 잃은 두 눈이 선뜩한 빛을 뿜어냈다.


“하, 하하…….”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발작적으로 웃다가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차 회장이 사라진 방향으로 향했다.


“나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버님께 평생을 바친 나에게…….”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였다. 명옥은 주먹을 한번 꽉 쥐더니 빠른 걸음으로 거실을 빠져나갔다.

중문을 지나 현관, 현관에서 정원을 지나기까지 그녀의 얼굴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즐거운 듯 보이다 이내 생각에 빠진 듯 집중했고, 분에 겨워 이를 갈기도 했다.

대문을 나섰을 때,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결연한 표정이었다. 명옥은 거친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최 실장, 할 일이 있어요. 당장 사무실로 들어와요.”

말라붙은 눈물 위로 뱀처럼 미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따사로운 햇볕이 들이치는 침실.

비행을 마치고 돌아온 다정은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휴식 시간 없이 버텨야 하는 긴 비행이라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꾸물꾸물거리며 베개에 머리를 파묻는데 텅 빈 옆자리가 허전했다.

보고 싶은데.

다정은 감기는 눈에 힘을 주고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기자 회견이 예정된 오늘, 태상은 침대가 아니라 화면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액정을 몇 번 두드리자, 메인 화면 여기저기를 장식한 태상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기사를 빠르게 훑어보고 첨부된 동영상 링크를 눌렀다.

작은 핸드폰 가득 태상의 모습이 들어찼다.


‘더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태상은 전장을 누비는 장수처럼 회견장을 휘어잡았다. 거침없었고, 위압적이었다.

다정은 한동안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분명 매일같이 보고, 만지는 태상인데 너무 낯설었다. 눈빛이 다르고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달랐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눈동자며 따뜻한 말만 하는 입술.

제가 아는 태상은 세상에서 가장 자상한 몸을 가진 남자였다. 하지만 작은 화면 속 그는 냉정한 지배자였다.

제 앞에서만 보여주는 따스한 모습은 도대체 어디서 끄집어내는 건지. 영상을 보는 내내 묘한 호기심이 올라왔다.

‘영진’

그때, 화면이 갑자기 바뀌며 익숙한 이름이 떠올랐다.

다정은 반가운 마음을 안고 전화를 받았다.


“응, 영진아.”

「누나, 비행 끝났어?」

“응. 집에 왔어.”

영진은 항상 제 스케줄을 확인하고 쉬는 시간에만 전화를 걸었다. 다정은 이불을 끌어안으며 전화기를 귀에 더 바싹 가져다댔다.


 


“왜?”

「나 형 전화번호 좀 알려달라고.」

“태상 씨?”

「응.」

“알려줄 수는 있는데, 네가 그건 왜?”

「고맙다고 말하려고. 우리 이번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가려고 했던 거, 형 덕분에 해외로 바뀌었거든. 형이 비행기 티켓 다 제공해 주기로 했대.」

“뭐? 그게 정말이야?”

「응. 그래서 지금 어디로 가느냐로 투표하고 난리야.」

다정은 멍하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태상이 저를 끔찍이 챙기는 건 일상이라 이미 익숙해진 터였다. 하지만 뒤에서 영진까지 보살피고 있는 줄을 몰랐다.

역시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자상한 남자였다.

다정은 번호를 알려주겠노라 말하고, 예의바르게 굴라며 당부를 했다. 그 후로 한동안은 서로의 안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경쾌한 농담과 타박이 주를 이루는데, 영진이 갑자기 한 톤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누나.」

“응?”

「이번 주에 진짜 올 거야?」

“이번 주? 아…… 간다니까.”

이번 주 토요일은 영진의 콩쿠르가 예정된 날이었다.

촉망받는 클래식 영재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 서울 국제 콩쿠르. 영진이 매년 참석하는 대회이자, 다정은 매년 응원을 가는 자리였다.


「시설도 별론데 왜 거기서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고막을 가볍게 건드렸다.

영진이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는 건 이번 대회가 세한 아트홀에서 열리기 때문이었다.

다정이 어린 시절 사고를 당했던 음악당, 세한 아트홀에서.


“피아노만 멀쩡하면 됐지 무슨 시설 타령이야.”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을 읽은 다정이 장난스럽게 말을 되받아쳤다.


「대기실도 별로고 건물 구조도 복잡해. 아무튼 맘에 안 들어.」

“누난 괜찮아. 어차피 대회 열리는 건 메인 홀이잖아. 별관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만 할 건데 뭐 어때.”

「그건 그렇긴 한데…… 형은? 형도 같이 와?」

“응. 같이 가기로 했어.”

다정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아, 그래? 잘됐네.」

덤덤한 척 말했지만 안심하는 기색이 잔뜩 묻어났다. 다정은 미소를 한껏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잘난 형아 꼭 데리고 갈 테니까 넌 피아노나 잘 쳐. 금상 못 받으면 일반 고등학교로 전학 시켜 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고.”

「금상 지겨워.」

말하는 투가 너무 가벼워 헛웃음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일등을 차지하는 게 지겹다니. 천재적인 재능과 싸가지의 만남은 역시 그리 좋은 조합이 아니었다.


“난 네 트로피로 도미노 하고 싶단 말이야. 아직 몇 개 더 있어야 하니까 잔말 말고 하나 더 받아와. 알겠지?”

「도미노는 지금도 할 수 있긴 한데…… 아무튼 알겠어. 토요일에 봐.」

영진은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며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


“…….”

통화가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록 다정은 한동안 핸드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서 누군가 희미하게 묻는 것 같았다.

괜찮겠냐고, 정말 그곳에 다시 갈 거냐고.

확인이라도 하듯 머릿속 목소리가 자꾸만 커졌다. 다정은 침대 위에 웅크려 앉은 채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강한 척할 상대가 없자 순식간에 연약한 본 모습이 나왔다. 울컥 올라오는 긴장에 어느새 손끝이 차가워졌다.

***

칠흑같이 어두운 방 안.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공기 중에 감돌았고, 얇은 소재의 여름 이불이 체온을 딱 맞게 유지해 주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호흡이 가빠졌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 다정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을 흘렸다.


‘울지 마.’

 
울지 말라는 말은 내가 울고 있다는 건지.

다정은 기억 저편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눈앞이 서서히 밝아지며 익숙한 그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늘 그렇듯 부모님은 영진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새로 산 구두 때문에 뒤꿈치가 까져서 아프다고 했고, 배가 고프다고 툴툴거리기까지 했는데.부모님은 무대를 향해 손을 흔들고, 사진을 찍느라 바빴다.

천재 동생 같은 거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정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무대를 노려보았다.

연미복을 입은 영진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어린 동생은 콩쿠르가 뭔지도 잘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피아노 앞에 앉는 게 좋은지, 연신 생글거리며 ‘이제 쳐도 돼요?’라는 눈빛으로 어른들을 바라볼 뿐.

잠시 후,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집에서도 맨날 들어 질릴 대로 질려버린 소리였다.

다정은 녹아내린 젤리처럼 의자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슬쩍 다리를 옆으로 뻗는데 통로가 발끝에 닿았다.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자리를 빠져나온 다정은 허리를 굽힌 채 계단을 올랐다. 모두의 시선이 무대로 향한지라 관심을 받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건 역시 억울했다.

찾으러 올 때까지 안 와.

다정은 객석을 한동안 노려보다 콘서트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파격적인 일탈에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한 번 정도는 부모님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었다.

로비로 나온 다정은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아 공연장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커피숍과 스낵바였다. 간단한 음식까지 팔고 있어 오랜 시간 머무르기에 딱 맞았지만 애석하게도 가지고 있는 돈이 없었다.

다정은 정문을 빠져나가 계단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앉았다.

새로 산 예쁜 원피스가 구겨지건 말건 상관없었다.

여기서 계속 있어야겠다.

축 처진 눈을 하고 몸을 웅크리는데, 한쪽에서 작업복을 입은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앞에 국밥이 괜찮다니까.”

“김 씨, 날도 더운데 무슨 국밥이야.”

목에 건 수건으로 턱을 쓱쓱 문지르는 아저씨들은 덩치도 크고 옷매무새도 단정치 못했다. 선생님과 아빠 말고 어른 남자를 본 일이 별로 없는 다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나왔나…….

갈 데도 없고 괜히 무서운 기분까지 들어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희미한 생각 하나가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간다는 건 어딘가 빈 장소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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