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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차 회장의 진실 (88/89)


88. 차 회장의 진실
2023.08.03.


다시 장내가 조용해지고 태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에 저희 에어 코리아는 앞으로 각 노선, 각 클래스 별로 저희들이 만든 자체 상한선을 적용하여 운임 인상을 결정할 예정입니다. 물론, 상승의 이유 역시 정확하게 고지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100여개가 넘는 노선, 그리고 총 3개나 되는 클래스. 화면을 가득 채운 숫자 앞에 기자단은 할 말을 잃었다.

잠시 후, 다시 불이 켜지고 태상이 단상 중앙에 우뚝 섰다.

수십 개의 눈이 그에게 쏠렸다.


“여러분들이 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압니다. 가격을 올리고, 횡포를 부리고, 소비자를 업신여기는 그런 기업이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바로 그걸 묻는 거겠죠.”

그가 술렁이는 시선을 빨아들이며 말했다.


“있습니다. 그런 기업으로 남지 않을 자신.”

선언하듯 내려앉은 태상의 한 마디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다. 빽빽한 숫자가, 진심 어린 태도가 이미 충분한 답이 되고도 남았다.


“더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

“없으시면…….”

태상은 사회자를 향해 차분한 시선을 던졌다.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김 실장은 바삐 마이크를 잡았다.


“이,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석해주신 기자 여러분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기자 간담회가 끝이 났다. 바깥 날씨는 쨍하기만 한데, 연회장 내부는 마치 폭풍우라도 휩쓸고 지나간 분위기였다.


 

***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는 명옥의 눈동자가 당혹스러움으로 물들었다.


“최, 최종안이 아니었어……?”

쓸모 없는 자료 하나 때문에 목이 날아가게 생겼다니. 이렇게 황당하고 어이 없는 일은 또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건지, 답을 해 줄 수 있는 건 송 비서밖에 없었다.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은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명옥은 움찔하며 퍼뜩 고개를 들었다.


“뭐, 뭐야……?”

가볍게 열린 문틈으로 태상이 걸어들어왔다.

그가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올수록 명옥은 목이 조이는 것만 같았다.

분명 알고 있다. 처음부터 알고 있는 거였다.

떨리는 눈동자가 간신히 그에게 향했다.


“태, 태상아…….”

태상은 싸늘한 얼굴로 명옥을 내려다봤다. 차분한 눈동자가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정말 큰 실수를 했어.”

그가 허리를 낮추며 조용히 읊조렸다. 한 음절, 한 음절 씹어뱉듯 말하는 목소리가 섬뜩했다.


“나를 흠집 내는 건 괜찮지만 우리 회사는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그, 그게 무슨…….”

압도적인 분위기 탓에 명옥은 그가 반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간신히 말을 이었다.


“기자 회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랑은 상관없어. 엉뚱한 데 와서 화풀이 하지 마.”

“비서를 통해서 자료를 빼낸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도통 무슨 얘긴지…….”

명옥은 시선을 피한 채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 추궁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바였다. 내부 자료가 바깥에 나돌았으니 태상이 저를 먼저 의심할 건 뻔하다.

하지만 송 비서는 표면적으로 저와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가 물고 늘어진다고 한들 잡아뗄 자신이 있었다.


“모른 척해도 소용없습니다.”

태상이 날카롭게 그녀의 생각을 파고들었다.


“송 비서에게 이미 다 확인하고 오는 길이니까.”

“뭐, 뭐……?”

“그리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송지안 비서,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으니까.”

태상은 회사로 돌아와 제일 먼저 송 비서를 찾았다. 무거운 적막이 가득한 부사장실 안. 그녀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난 일주일 간, 그녀에게 가해진 무언의 압박은 그 어떤 추궁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쳐다보기를 십여 초. 결국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당신은 그때 멈췄어야 했어.”

태상이 허리를 조금 더 앞으로 숙였다. 해일 같은 검은 그림자가 명옥을 덮쳤다.


“내가 관용을 베풀었을 때.”

애써 세진 항공의 손을 빌리고, 입막음을 하기 위해 송 비서에게 거액을 지급하고.

수많은 노력이 결국 헛된 시도였던 거였다. 명옥은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태, 태상아…… 네가 뭔가 잘못 안 모양인데…….”

“거래 내역도 다 파악했으니까 긴말 할 거 없습니다.”

“아…… 그 돈? 그, 그 돈은…… 그건 내가 상여금으로…… 아니, 예전에 심부름을 시킨 적이 있는데…….”

명옥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의미 없는 말을 쏟아냈다.


“변명이라면 회장님 앞에 가서 하십시오.”

“……뭐?”

순간, 그녀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차 회장은 명예를 누구보다 중요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부자일지언정 떳떳하지 못하면 거지만도 못하다는 게 그의 신념일 정도로.

그리고 그런 신념은 회사 경영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부당하게 일궈낸 성과, 떳떳하지 못한 거래. 명예롭지 못한 일을 한 직원은 더 이상 그에게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이번 일이 알려진다면.

명옥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분명, 본부장 자리에서 내쳐지는 거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너, 너 설마 벌써 말씀드린 거 아니지? 알잖아, 회장님 성격. 이번 일 아시면 정말 가만 두시지 않을 거야.”

목소리가 절로 절박해졌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하…….”

명옥은 어깨에 힘을 풀며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녀는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발…… 제발 비밀로 해 줘, 응? 내가, 내가 이렇게 빌게.”

태상 앞에 선 명옥이 두 손을 싹싹 빌며 말했다. 잔뜩 일그러진 눈매에서 간절함이 철철 넘쳐흘렀다.

태상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일말의 동정도, 동요도 없는 눈빛.

명옥은 태상의 소맷자락을 와락 움켜쥐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래도 우리가 함께 지낸 세월이 있잖아. 이번 한 번만 넘어가주면 내가 정말 잘 할게. 앞으로는 죽은 듯이 살게. 응? 제발.”

태상은 미간을 설핏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추악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깔끔한 동작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제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

태상은 그 한 마디만 남긴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늦지 않게 찾아뵈십시오. 벌써 기다리고 계시니까.”

“너, 너…… 차태상 너 이 자식……!”

탁, 굳게 닫힌 문틈 사이로 악에 받친 고함과 욕설이 새어 나왔다.


 

***

한가로운 햇볕이 들이치는 오후, 차 회장은 손안에 든 바둑알을 빙글빙글 굴렸다.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쓰게 신음하기를 한참, 그는 신중하게 다음 수를 두었다.


“…….”

아무 말도 없이 벌써 20분째.

차 회장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장장 20분째 홀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정자세로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명옥은 피가 다 말라버릴 지경이었다.

할 말이 뻔히 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냉정하게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침묵에 명옥의 머릿속은 이미 최악의 상상으로 가득했다.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움켜쥐는데, 차 회장이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바둑도 인생이랑 똑같아.”

“네?”

한참 만에 입을 열자 쩍쩍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앞에 물이 버젓이 있는데 차마 마시지도 못하고, 명옥은 마른 침만 꿀떡 삼켰다.


“바둑은 상대보다 반집만 많아도 이기는 승부 놀이야. 그런데 꼭 남의 집을 부수러 가지. 그러다 내 걸 잃고 후회하고.”

“…….”

“안 그러냐?”

“아버님, 오해이셔요. 저는 송 비서라는 사람 얼굴도 잘 몰라요. 분명, 어디서 나쁜 제안을 받고 혼자 독단적으로…….”

더 참지 못하고 명옥이 급하게 말을 쏟아냈다. 그러자 노인이 근엄한 눈빛을 보내며 간사한 입을 막았다.


“명옥아.”

“……예. 아버님.”

“나는 너와 수빈이에게 많은 것을 내어 주었다.”

“…….”

“그런데도 태상이 것이 탐이 나던?”

“…….”

최대한 납작 엎드리자 백만 번도 넘게 다짐하고 왔건만.

수빈을 걸고넘어지는 차 회장의 말에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태상에 비하면 수빈이가 가진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회사 지분도 부동산도 하다못해 인맥도, 차 회장은 언제나 태상에게 모든 것을 밀어주었다.

수빈이 갖는 거라고는 태상이 가지고 간 큰 덩어리에서 떨어진 부스러기가 전부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부아가 치밀었다. 수빈을 위해 꾹 참고 참았던 억울함이 순간 화산처럼 폭발했다.


“아버님, 정말 해도 너무하셔요. 제가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네? 수빈이나 태상이나 가진 게 같다니요. 저한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세요. 네?”

“명옥아.”

근엄한 목소리가 넓은 거실을 가득 채웠다.


“넌 내가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냐?”

차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거실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명옥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득한 노인의 눈동자와 시선이 맞았다.


“나는 말이다…… 그래도 녀석을 내칠 수가 없었단다.”

“누, 누구 말씀이세요?”

“내 핏줄이 아닌 내 손자.”

“……!”

명옥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검은 동공이 어느새 공포로 바싹 조여 들어 있었다. 그녀는 뻣뻣하게 굳은 입술을 겨우겨우 움직였다.


“아, 아, 아버님…… 그, 그게 무슨…….”

“욕심만 내지 말지 그랬니, 욕심만.”

“…….”

“네가 부른 배를 하고서 내 아들의 조문객을 맞던 그날, 나는 너와 네 아이를 죽는 날까지 지키겠다 다짐했다.”

차 회장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안에 든 게 다른 집안 핏줄인 줄도 모르고.”

그는 아득한 눈동자로 지나간 시간을 들여다봤다. 고통도 슬픔도 무뎌진 얼굴에 남아 있는 건 떠난 이를 향한 옅은 그리움뿐이었다.


“다,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 그럴 리가…… 다 알았으면 어째서 지금까지…….”

명옥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간헐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장 난 목각인형 같은 그녀의 몸짓은 제가 처한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콩깍지는 연애하는 젊은이들이나 씌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구나.”

차 회장이 자조 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말했다.


“생김새가 달라도 외탁이려니, 성격이 유독 온순한 건 아비 없이 자라서 기가 죽어서 그러려니……. 수빈이 그 녀석에게 씐 콩깍지를 벗는데 시간이 참 오래도 걸렸어.”

“…….”

“미련했지. 어리석었고. 하지만 현실을 직시했을 땐 이미 늦었더구나. 기른 정이 뭔지, 내 그 녀석을 차마 내치지 못했어.”

“아, 아버님…… 죄, 죄, 죄송해요. 흐흑! 말씀…… 드리려고 했어요. 맹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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