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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압도적인 남자 (87/89)


87. 압도적인 남자
2023.07.30.


지난 주, 기자 회견 준비로 유난히 바빴던 어느 날.

인수위 소속 김 대리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합병 계획 최종안이 마무리되어, 자리에 올려놓고 갔다는 것이다.

김 비서는 바삐 사무실로 돌아왔다. 텅 빈 사무실 안, 송 대리가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김 대리님 다녀가셨어요.’


‘네. 고마워요.’


‘저는 홍보팀에 전해줄 서류가 있어서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두툼한 서류 뭉치 하나를 들고 사무실을 나섰다. 자리에 앉은 김 비서는 계획안부터 살펴봤다.


‘아니, 이 사람이…….’

 
최종안이라고 준비해온 자료는 얼마 전, 태상에 의해 호되게 기각이 된 서류였다. 아무래도 실수로 파일을 잘못 전해준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핸드폰이 바쁘게 울려댔다.


‘김 비서님,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다른 서류를 놓고 간 것 같아요.’


‘네. 벌써 봤습니다. 그냥 이메일로 보내 주시죠. 이쪽에서 뽑겠습니다.’

 
자료를 받은 김 비서는 바삐 계획서를 출력했다. 태상이 회의에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인쇄가 완료된 종이 뭉치를 한 손으로 집어 들었다.

첫 페이지를 바라보는 김 비서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그러졌다.

흰 종이 가득, 마치는 말과 참고 자료가 적혀 있었다. 내용이 꽤나 익숙했다.


‘이건……?’

 
김 비서는 김 대리가 놓고 간 계획서를 펼쳤다. 마지막 페이지가 제 손에 들린 첫 장과 일치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었다. 송 비서는 제가 없는 사이 계획서를 복사한 거였다.

꽤 급했는지 마지막 페이지는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고.

그는 책상 위에 던지듯 서류를 놓고 복도로 뛰어 나갔다.

말도 안 하고 몰래 복사를 해 가다니.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지만 좋지 않은 의도임은 분명했다. 손에 들린 복사본을 되찾아야 했다.

김 비서는 헐레벌떡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일단, 홍보팀으로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송 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일은 벌써 어디에 주고 왔는지 손이 텅 비어 있었다.


‘김 비서님, 어디 가세요?’


‘아닙니다.’

 
그는 대충 고개를 저으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섣불리 추궁을 했다가 그대로 잡아떼면 곤란했다.

김 비서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참고 태상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태상은 의외로 태연한 반응이었다.


‘고립시키세요.’


‘네?’


‘업무에서 배제가 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겁니다. 제 주인에게 하소연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죠.’

 
분명, 이 회사 안 누군가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다. 감정적으로 잔뜩 동요한 상태로. 그러면 곧 누군가가 함께 흔들릴 것이다.

태상은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아니나 다를까.


‘아무래도 여론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기자회견은 좀 미루는 게 어떻겠니?’

 
얼마 뒤, 명옥이 어색한 웃음과 함께 사무실을 찾아왔다. 불안한 듯 요동치는 눈동자는 마치 제 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태상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싸움의 끝을 맺을 때가 되었다.


‘아니오.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멈출 수 없었다. 어떤 싸움을 어떻게 걸어오든 이번엔 끝을 내 줄 생각이었다.


 

***

남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연회장.

머큐리 홀에서는 곧, 에어 코리아와 한성 한공의 합병 기자 간담회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태상은 블랙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채 모습을 드러냈다. 미끈한 검은 실루엣이 마치 한 마리 검은 재규어 같았다. 그는 날렵한 눈을 빛내며 자리에 앉았다.


“인수 위원장 차태상입니다.”

더도 덜도 없이 깔끔한 소개였다. 그는 차분한 눈빛으로 홀 안을 천천히 훑었다. 담담하게 지나가는 시선이었지만 좌중을 압도하는 묵직함이 있었다.

잠시 후, 태상의 뒤를 따라 들어온 남자가 마이크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사회를 맡은 미디어 팀 김찬호 실장입니다. 먼 걸음 해 주신 기자님들께 감사 인사드리며 오늘의 간담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차태상 부사장의 인사말이 있겠습니다.”

그는 태상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자연스레 발언권을 넘겼다.


“한성 항공 인수에 대하여 그간 많은 궁금증이 있었던 거로 압니다. 오늘 이 자리가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태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이핑 소리가 총알처럼 울려 퍼졌다. 오늘 오전에 터진 폭로글 덕분에 회견에 임하는 기자들의 태도가 여느 때보다 뜨거웠다.

김 실장은 방어라도 하듯, 준비된 브리핑을 늘어놓았다.

금년도 경영 계획, 한성 항공 실적 등 기본적인 내용이 포함된 슬라이드가 차례대로 넘어갔다.

브리핑이 이어지는 내내 기자들은 단정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받아 적었다. 잠시 후, 슬라이드가 끝남과 동시에 조명이 다시 밝아졌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질의응답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점잖게 탐색하는 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말이었다. 기다렸다는 손이 비죽비죽 올라왔다.

김 실장은 얼굴이 익은 베테랑 기자 한 명을 처음으로 지목했다.


“오전에 있었던 내부 폭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조조정과 임금 상승, 두 가지 모두 피할 수 없다는 내부 자료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데요?”

태상은 마이크를 살짝 가까이 끌어온 뒤, 테이블 위에서 손깍지를 꼈다. 여유롭게 단상을 누르는 듯한 몸짓이 조용하지만 압도적이었다.


“그 자료는 인수위 소속 한 개인의 의견이었을 뿐, 공식 입장은 아닙니다.”

“그래도 논의가 되었던 적은 있는 것이네요?”

“그렇습니다.”

태상이 담담하게 인정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김찬호 실장은 애가 조용히 애가 탔다.

공식적으로 논의했다고 인정을 해버리다니. 앞으로 그가 어떤 이야기를 하든 사람들은 요금 인상과 구조조정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일 것이다.

한 수가 아니라 열 수 정도 접고 들어가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김 실장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맨 앞줄에 앉은 기자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하나일보의 정은지 기자입니다. 통합 후 지배 구조 개편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일 텐데요. 구조조정은 없다는 초기 입장에 변화는 없으신가요?”

“없습니다.”

“지상 조업이나 예약, 발권까지 중복되는 영역이 많을 텐데요. 핵심 인력 이외에도 구조조정을 피해갈 수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기자님께서는 지난 2015년 에어 코리아가 겪은 경영난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질문을 하는 입장에서 받는 입장이 되자 그녀는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눈을 한번 빠르게 굴리더니 이내 정확한 답을 내어놓았다.


“……네. 알고 있습니다. 유가 파동으로 항공업계가 전반적으로 침체했던 해이죠.”

“그럼 당시에 계약 만료, 희망 퇴사라는 이름으로 정리 해고된 저희 에어 코리아 직원이 몇 명인지도 아십니까?”

“글쎄요. 정확한 수치는 모르지만…… 회사의 규모를 생각할 때 500여 명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 이런 걸 묻느냐는 의아함, 주목의 대상이 된 것에 대한 당혹스러움. 답을 하는 그녀의 눈썹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정확히 301명입니다.”

“…….”

순간, 홀 안이 다시 한번 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선뜩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이제는 또 무슨 말을 할지, 기자단은 흥미롭다는 눈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그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해고된 301명 중 270명이 현재 에어 코리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경영이 회복된 이듬해 말, 본사에서는 대대적인 경력직 채용을 진행하였습니다. 물론 에어 코리아에서 일했던 경력은 가장 높은 가산을 받았고요. 회사로 돌아오기를 희망하지 않았던 몇몇 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일터로 돌아오셨습니다.”

태상은 까만 눈동자를 단단히 굳히며 말을 이었다.


“회사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는 하지만 경영진 모두에게 그때의 일은 아직도 쓴 교훈으로 남아 있습니다.”

“…….”

“저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할 만큼 어리석지 않습니다. 정리해고는 없습니다.”

“……진정성 있는 대답, 감사드립니다.”

화물 운행을 늘려 수익 구조를 개선하겠다느니, 업무 재분배를 통해 효율적 운영을 하겠다느니.

허울 좋은 대답이 나올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가 건넨 답은 ‘진심’이었다.

오너 집안의 귀한 아드님인줄로만 알았는데 그는 사업을 키우는 기업가이자, 사람을 이끄는 리더였다.

그때,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독과점 논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단 이름이요?”

태상은 서늘한 눈으로 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자 남자가 입꼬리를 씰룩이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양일보의 윤정수 기자입니다. 시장 점유율 문제로 말이 많은데…… 이 점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결혼식 축사도 아니고 저는 한 말씀 하러 이 자리에 나온 게 아닙니다. 질문이 없다면 다른 분께 발언 기회를 넘기겠습니다.”

송곳보다 더 뾰족한 답변이 마이크를 타고 기세 좋게 흘러들었다. 울리는 목소리 사이사이로 동료 기자들의 비웃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남자는 목을 한번 크게 가다듬더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합병 후 에어 코리아는 전례 없는 공룡 항공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최종안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내부 자료에서도 요금 상승은 5% 선으로 논의가 되었고요. 독과점 현상으로 인한 운임 상승은 어떻게 막으실 생각인가요?”

“운임 인상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합리적인 선으로만 한다는 것이 에어 코리아의 방침입니다. 합병 여부와 관계없이 그 방침에 변함은 없습니다.”

“방침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남자는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내부 폭로가 반쪽짜리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제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졌다. 기자 회견에서 태상에게 망신을 주어야 한다는 제 역할이.


“그 부분은 저희 인수위도 오랜 시간 고민한 부분입니다.”

태상이 침착한 얼굴로 좌중을 바라봤다. 이제 최종안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를 밝힐 차례였다.


“항공사의 운임은 국토부에서 정하는 상한선 아래에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행 상한선은 그 기준선이 매우 높아 실질적으로 항공사에게 아무런 제동 장치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경영인으로서, 그저 경제 논리에 입각한 발언을 하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그러기엔 태상이 에어 코리아를 향해 품은 마음이 너무 컸다.

모두를 이해시키고 싶었고,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항공사로 남고 싶었다.

태상은 김 실장을 향해 가볍게 눈짓을 보냈다. 그는 빠르게 슬라이드 하나를 벽면에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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