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균열
(86/89)
86. 균열
(86/89)
86. 균열
2023.07.27.
조금 뒤, 태상의 뒷모습이 그럭저럭 멀어지자 차 회장이 인자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정아, 부모님께서 구산시에 계시다고 들었는데…… 맞니?”
“…….”
다정은 속으로 작게 놀랐다.
구산시는 부모님의 납골당이 위치한 곳이었다. 언젠가 태상에게 지나가듯 얘기를 했는데 그걸 전해들은 게 분명했다.
“네. 맞아요.”
“조만간 내 한번 가보려고 하는데…… 어떠냐, 괜찮겠니?”
“무, 물론이죠. 엄마, 아빠 다 너무 좋아하실 거예요.”
“그래. 그러시면 좋겠구나. 내가 가서 인사 잘 드리고 오마.”
“할아버지…….”
순간, 코끝이 절로 찡해졌다. 제가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겠노라 매일 같이 다짐했는데. 이렇게 든든한 할아버지가 생긴 걸 알면 정말 좋아하실 거였다.
웃는 모습으로 꿈에 찾아와 주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자 눈물이 찔끔 흘렀다.
“어이쿠, 네가 울면 태상이 저 녀석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란다.”
차 회장이 황급히 다가와 다정의 어깨를 감쌌다. 다정한 토닥임에도 불구하고 눈물방울은 점점 더 굵어만 갔다.
다정은 얼굴을 쓱쓱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말갛게 웃어 보이자 그 역시 주름진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저도 나중에 태상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갈게요.”
“그래…….”
차 회장이 태상이 사라진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풍파를 잔뜩 맞은 얼굴에 애잔함이 묻어났다.
다시 고개를 돌린 그가 다독이는 투로 입을 열었다.
“태상이가 제 속을 많이 안 보이지? 부모님 얘기도 안 하고.”
“…….”
“조금만 더 기다려 주렴. 제 약한 모습은 곧 죽어도 안 보이는 못난 녀석이라 그런단다.”
“네. 할아버님.”
“혹시라도 속 썩이는 거 있으면…….”
“알아요. 할아버지께 이르면 되는 거죠?”
“그래. 우리 손주며느리 장하다.”
다정은 쾌활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던 첫 인사가 생각보다 너무 포근했다.
***
늦은 밤, 창밖을 내다보는 명옥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며칠 뒤면 합병 기자 간담회가 열린다.
독과점 논란과 운임 인상에 대한 우려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 두 회사의 합병.
많은 쟁점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는 건 역시 요금 인상 건이었다. 이와 관련해 부사장실은, 가격 인상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요금 인상은 필요한 때에만 최소한으로 한다.’는 에어 코리아의 원칙을 지키겠다는 거였다.
이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엇갈렸다.
이래놓고 슬쩍 가격을 올리겠지, 라는 의견. 역량 있는 젊은 경영인은 뭔가 다를 것이다, 라는 기대. 두 가지 서로 다른 반응이 팽팽하게 맞섰다.
‘계획안이 터지면 볼만하겠네.’
명옥이 빼낸 인수 계획안은 가격 인상과 관련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서서히 할인율을 줄여 나가고, 합병 후 2년 이내에 요금을 5%까지 일괄 인상한다는 내용이었다.
명옥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내용이 퍼져 나가면 기자 회견장은 질의응답이 아니라 태상의 청문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즐거운 상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화장대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에 전화라니. 명옥은 의아한 얼굴로 방안을 가로질렀다.
‘송 대리.’
화면을 확인한 그녀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송 비서와 두 번 다시 연락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에요.”
명옥이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본부장님…….」
“당분간 연락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죄, 죄송해요. 그런데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어서…….」
“뭐 때문에요?”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까 봐서요.」
“하…….”
명옥이 길게 한숨을 뽑아냈다.
제 주변에는 왜 이렇게 유약한 사람밖에 없는 건지. 이 시간에 새파랗게 어린 비서의 칭얼거림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 제 처지가 답답했다.
“내가 말했죠? 그 자료는 벌써 믿을 만한 사람한테 넘겨줬다고. 송 비서는 입만 꾹 다물고 있으면 돼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요…….」
송 대리가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뭔가 좀 이상해요. 낌새가 이상하달까……?」
“낌새?”
「네. 요즘 들어 자꾸 업무에서 배제되는 느낌이에요. 중요한 프로젝트에서 제외된 거만 벌써 두 번째고 또…… 팀원들 분위기도 예전 같지 않고.」
송 대리는 반 년 전에 부사장실에 발령이 났다. 아직 핵심 업무에 투입되기는 조금 이른 시기. 가끔씩 그런 느낌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직 송 대리가 부사장실에서 인정을 못 받아서 그래요. 조금 더 기다리면…….”
「저…… 합병 관련 업무에서도 제외 되었어요.」
“뭐?”
순간, 명옥의 입꼬리가 뻣뻣하게 굳었다.
「김 비서님 말로는, 저한테 다른 업무를 할당할 예정이라서 그렇다는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당분간 부사장실에 급한 업무도 없고 지금 당장 인원이 부족해서 난리…….」
“그걸 왜 지금 말해!”
명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섰다는 건 분명 무언가 눈치챈 게 있다는 뜻인데.
비서 하나가 단독으로 자료를 빼냈다고 생각할 리는 없다. 설마 그 계획서가 제 손에 들어온 것까지 파악했을까.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뭐 들은 얘기는 없어? 차태상이나 김 비서나…… 아니면 같이 일하는 다른 비서들 하는 얘기라도?”
「모르겠어요…….」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죄, 죄송해요. 다들 저만 오면 얘기를 멈춰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볼 수도 없었어요.」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 생기기 전에 저 다른 곳으로 발령 좀 내 주시면 안 될까요? 본부장님께서 인사팀에 말을 넣으면…….」
명옥은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이런 쓸데없는 통화에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계획을 전부 취소해야 한다. 송 비서의 짓이라는 게 발각된 이상, 이 자료는 절대 터뜨려서는 안 됐다.
연락처를 뒤진 그녀는 김 상무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느긋하면서 고압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아, 김 상무. 미안해요. 쉬는 데 방해해서.”
명옥은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지난 번 만남에서도 느꼈지만 남자는 그다지 다루기 쉬운 타입의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전에 준 그 자료 말이에요. 그거 어떻게 됐나 해서.”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하시죠? 나한테 완전히 맡긴다고 하지 않았나요?」
역시, 대답보다 뾰족한 추궁이 먼저 튀어나왔다.
“왜긴요. 나도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아야죠.”
「……플랜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적당한 시점에 터뜨릴 거고, 동시에 여론 몰이도 좀 할 거예요.」
명옥은 마른침을 삼켰다. 평소 같으면 기쁨의 미소를 지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저기…… 김 상무, 애써준 건 고마운데 아무래도 계획을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왜죠?」
“차태상이 눈치를 챈 것 같아요. 내 쪽에서 계획서에 손을 댔다는 걸.”
전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명옥이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듣고 있어요? 얼른 취소해야 한다니까. 이번 일은 회장님도 주목하는 건이라 정말 크게 문제가 될 수 있다고요.”
「그것 참 큰일이네요.」
“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본부장님께.」
“뭐, 뭐라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물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명옥은 뻣뻣하게 굳어져 눈만 깜빡거렸다.
「기획안을 본부장님이 빼돌렸지 제가 빼돌렸나요? 제가 나설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기, 김 상무…… 이런 식으로 도망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내가 한 짓이라는 게 발각되면 내 입에서 김 상무 이름은 안 나올 것 같아요?”
「글쎄요. 그 말을 누가 믿을까요? 제가 했다는 증거는 하나도 없는데.」
명옥은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화가 치밀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맞았다. 꼬리를 밟힌 건 저 하나뿐이고 그는 아직도 제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상황이었다.
“……기, 기사가 터지면 차태상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뒤에 누가 있는지 확인할 사람이라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차태상을 방패막이로 삼아 도망을 가려고 하다니.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본부장님, 죄송하지만 제가 일 처리 하나는 깔끔한 편이라서요. 아무리 파도 제 이름 안 나옵니다.」
“…….”
「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 아시잖아요? 저, 치고 올라오는 동생들 탓에 회장님 뵐 낯도 없는 놈인 거. 이런 기회라도 잡아야죠. 그럼, 끊습니다.」
“자, 잠깐만요. 김……!”
다급한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명옥은 핸드폰을 쥔 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참을 수 없는 분노, 배신감, 그리고 앞일에 대한 공포까지. 수많은 감정이 피를 솟구치게 했다.
“아아악!!”
‘퍽!’
울분에 찬 비명을 내지르던 그녀가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흘러나왔다.
***
기자 간담회로 향하는 차 안, 태상은 굳은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아니길 바랐는데,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랐는데. 결국 내부 자료는 외부에 공개됐다.
그것도 아주 허울 좋은 포장과 함께.
‘에어 코리아와 한성 한공의 합병을 막아주십시오.’
에어 코리아의 직원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게시글은 두 회사의 합병을 막아달라는 간곡한 읍소문이자 폭로문이었다.
그가 두 항공사의 합병을 반대하는 이유는 고용 불안정이었다.
파일럿과 같은 전문 인력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리해고를 피할 수 없을 거라는 거였다.
언뜻 들으면 개인의 비극인 것 같은 이야기. 하지만 그는 국민 모두가 관심을 가질 법한 내용을 근거로 끌어다 썼다.
「회사가 커지고 더 많은 이윤을 낼 수 있다는데, 반대할 직원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직원이기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런 눈 가리고 아웅은 더 이상 봐 줄 수가 없습니다. 현재 인수위에서는 합병 후, 인금 인상을 기본 골자로 하는 계획안을 추진 중에…….」
더 볼 것도 없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내용은 태상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넣는 그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잔뜩 배어났다.
다른 건 몰라도 회사에 대한 애착만큼은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저는 명옥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무슨 수를 쓰지 못하게 일부러 기자 회견 직전에 터뜨린 것 같습니다.”
“그랬겠죠.”
“면목 없습니다.”
김 비서는 기사를 보던 태블릿 PC를 꽉 움켜쥐었다. 비서실에서 이번 일이 시작됐다는 점에서, 그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김 비서님 잘못이 아닙니다.”
“…….”
“제가 선택한 겁니다.”
단호한 태상의 목소리가 차 안에 낮게 울렸다. 김 비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