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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두 남자 사이의 여자 (85/89)


85. 두 남자 사이의 여자
2023.07.23.


***

처음으로 함께하는 식사자리.

차 회장은 식탁 끝 상석에, 명옥은 오른쪽 옆자리에 앉았다. 태상은 다정에게 차 회장 바로 옆 왼쪽 자리를 내어 주었다.


“수빈이는 정말 못 온다던?”

“네. 죄송해요. 며칠 전까지는 올 수 있다고 하더니 갑자기 일이 생겼다네요.”

“…….”

혹시나 했는데.

다정은 수빈이 오늘 자리에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술제에서, 그리고 회사에서. 완곡한 표현이긴 했지만 두 번이나 그의 마음을 거절했다.

늘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남자지만 저를 마주하기가 꽤 힘들 거였다.


“가족이라고 달랑 하나 더 있는데 오늘 못 온다는구나.”

차 회장이 미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수빈을 알고 있다고 답하려고 하는데 명옥이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그래요. 어차피 오늘 오고 말 것도 아닌데, 다음에 보면 되죠. 그렇죠?”

“네…… 그럼요.”

“음, 듣고 보니 또 그렇구나. 다정아, 또 언제 오련? 다음엔 집이 아니라 밖에서 볼까?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지?”

“네. 다음엔 밖에서 봐요. 저는…….”

대화 주제가 어벌쩡 다음 번 식사 약속으로 넘어가 버렸다. 다정은 바뀐 화제를 재빨리 따라잡았다.


“한식 가장 좋아해요. 나중에 맛있는 한정식 집에 데리고 가 주세요.”

“그래? 그거 잘 됐구나. 내 솜씨 좋은 집을 몇 아는데.”

차 회장이 껄껄 웃으며 식탁 중앙에 있는 커다란 접시 하나를 다정의 앞으로 옮겼다.


“이게 우리 집 특제 양념으로 만든 갈비인데 맛이 제법 괜찮단다.”

“할아버님 먼저 드세요.”

“나는 평생 물리도록 먹었어. 어서 먹으렴.”

“…….”

다정은 젓가락을 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어르신이 한술 뜨기도 전에 먼저 식사를 하는 건 예의가 아닌데.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갈비 조각이 제 밥 위로 올라올 기세였다.

다정은 태상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정말 맛있어. 먹어 봐.”

“…….”

구조 신호를 정말 찰떡같이 잘 못 이해한 태상이었다.

두 남자 사이에 낀 다정은 하는 수 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작은 갈빗살 한 조각을 베어 물자, 달콤한 양념과 육즙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드러우면서 담백한 게 얼마를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고기를 깔끔히 씹어 넘긴 다정은 환한 얼굴로 차 회장을 바라봤다.


“와…… 이거 정말 맛있어요. 제가 먹어본 갈비 중에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그래? 좀 싸 주련? 가져가서 더 먹게.”

“괜찮아요. 할아버님 많이 드세요.”

“내 그때도 이렇게 맛있는 밥 한 끼 먹이고 싶어 찾아간 거였는데…… 이 녀석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하, 할아버지!”

“응?”

다정이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아보았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태상은 어느새 단단히 굳은 눈동자로 차 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몰래 만나러 가셨다, 이거군요.”

“크, 크흠. 그러게 진작 좀 집에 데리고 오면 좀 좋아.”

“말 돌리지 마십시오.”

“그래, 내 한번 회사로 찾아갔다. 인사도 하고 얘기도 좀 나눌 겸.”

“…….”

차 회장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가 집요했다. 둘이서 나눈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시선이 분명했다.

차 회장은 움츠러드는 기색 하나 없이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힘들어도 꼭 붙어있으라 당부했다. 결혼 전에 어디 도망가는 건 아닌지 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저 몰래 그런 작당을 하셨군요.”

다정은 서늘해져가는 두 사람 사이에서 점점 쪼그라들었다. 하필이면 가운데 끼어 앉아 눈을 돌릴 데도 없었다.


“작당이라니. 우리가 그런 작당을 했니?”

차 회장이 커다란 갈비 조각 하나를 다정의 밥 위에 얹으며 말했다.

태상이 제 곁에서는 아무런 힘도 못 쓴다는 걸 이미 파악한 듯싶었다. 노장의 훌륭한 전략이었다.


“아, 아뇨. 아니죠. 그리고 제가 찾아뵀어야 했는데 먼저 와주셔서 얼마나 좋았는데요.”

“거 봐라. 아가도 좋았다지 않니. 다정아, 다음번엔 이 사나운 녀석은 집에 두고 너만 오렴, 알겠니?”

“네. 그럴…….”

“그러진 않을 겁니다.”

태상이 날렵하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태상 씨, 잘해 주시려고 그러는 건데 자꾸 왜 그래요.”

“…….”

“조금 진정해요.”

나긋나긋하게 말하자 태상의 눈매가 서서히 풀어졌다. 살짝 구겨진 앞머리에서 여전히 불만은 느껴졌지만 그래도 조금 전보다 훨씬 차분한 기색이었다.

제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남자치고 이 정도면 많이 애쓰고 있는 거였다.

다정은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려 그의 손등을 조심히 감쌌다.

칭찬하듯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살살 쓸자, 그가 작은 손을 단박에 움켜쥐었다.


 
그때, 연신 물만 들이켜던 명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조련사가 따로 없네, 맹수 조련사.”

“아…… 네.”

그녀가 하는 말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차태상이라는 맹수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 말만 듣고, 저만 바라보는 조금 이상한 맹수.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썩이는데 차 회장이 갑자기 대화의 방향을 틀었다.


“한시라도 빨리 식을 올려야겠구나.”

“네?”

다소 다급해 보이는 차 회장의 태도에 다정이 놀라 새된 소리를 냈다.


“다정아, 너는 아무것도 준비할 것 없으니 날짜만 고르렴.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그, 그게…….”

다정이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다정은 이 결혼이 조금 늦춰져도 좋겠다는 앙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짜로 하는 계약일 땐 날짜 따위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진짜 연인이 된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하루하루가 설렜고 연애를 하며 느끼는 달달한 행복이 좋았다. 이 달콤한 관계에 조금 더 오래 취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에 선뜻 답을 못 하고 있는데 명옥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빨리는 못 하죠.”

“……?”

뜬금없는 그녀의 한 마디에 모두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어머, 다들 잊으셨어요? 미국에 사는 태상이 큰고모, 수술 때문에 한동안 한국 못 들어오시잖아요.”

“괜찮다. 비행기 한 번 못 탈 정도는 아니야.”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어제 통화해 봤는데 요즘 들어 상태가 급격하게 안 좋아지셨대요.”

“그게 정말이냐?”

“네. 아버님께서 걱정할까 봐 말씀을 안 하신 모양이더라고요. 주치의가 당분간 긴 여행은 무리라고 했대요.”

“음…….”

차 회장은 쓰게 신음하며 시선을 떨궜다. 쨍하게 맑던 얼굴이 먹구름이라도 드리운 듯 어두워졌다.

그 모습을 본 명옥은 입꼬리를 한 번 씰룩이고, 태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너 요새 한성 한공 합병 때문에 눈코 뜰 새도 없잖니?”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이것보다 훨씬 바빴던 적도 많고요.”

“알아서 하긴. 몸이 두 개도 아닌데……. 신혼여행이라도 제대로 가고 싶으면 결혼은 그 다음에 하는 게 나아. 여자가 결혼에 대한 로망이 얼마나 큰데,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하는 거 아니다?”

“…….”

마지막 말만큼은 효과가 있었는지 태상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르기를 잠시,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의 시선이 예비 신부에게 모였다.

다정은 제가 대화의 마무리를 지어야 함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는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 태상 씨가 무리해서 일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고요.”

“……솔직하게 말해도 돼.”

태상이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정말이에요. 저는 천천히 하는 게 더 좋아요. 여유롭게 결혼 준비도 하고, 신혼여행도 길게 가고.”

싱긋 웃으며 말하자 태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식은 조금 천천히 올리도록 하자꾸나. 한성 한공 일 마무리 짓고 하객들도 다 올 수 있을 때.”

“네. 할아버님.”

다정이 단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차 회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식탁을 한번 둘러봤다.

하나, 둘. 맛있는 반찬들이 전부 다 다정 앞에 놓였다.


 

***

식사를 마친 후, 차 회장은 바둑을 두자며 태상을 서재로 불렀다.

다정을 혼자 둘 수 없다며 태상이 끝까지 거절하자, 차 회장은 제법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결국, 또 다정이 나설 차례였다. 다정은 그를 달래듯 설득해 겨우 서재로 들여보냈다. 하지만 제 앞에 놓인 과일 접시를 다 비우기도 전, 태상이 불쑥 서재 문을 열고 나왔다.


“아니, 한 판만 더 두자는데도.”

“집으로 프로 바둑 기사 보내드리겠습니다. 실컷 두십시오.”

“녀석하고는. 다정이 잠깐 혼자 둔 게 그리 걱정이 되는 게냐?”

태상은 묻는 말에 대꾸도 없이 다정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자.”

“벌써요?”

“태상아, 너무 감싸고 돌면 가족들하고 친해질 틈이 없단다.”

명옥이 타이르듯 말했다. 태상은 노려보듯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렸다. 지켜본 결과, 두 사람의 관계는 차 회장 앞에서 조금 누그러지는 경향이 있었다.


“인사했고, 밥 먹었습니다. 더 이상 머무를 이유 없어요.”

“딱딱하기는. 다정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름처럼 다정한 남자를 찾아보는 게 어때요?”

명옥이 장난스럽게 눈매를 휘며 말했다. 그러자 차 회장이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빠르게 다정에게 다가왔다.


“큰일 날 소리! 다정아, 못 들은 거다. 저런 쉰 소리는 귀담아들으면 안 돼. 알겠지?”

“네. 그럼요. 장난인 거 알아요. 고정하세요. 할아버지.”

더 머물렀다간 집안에 큰 분란을 초래할 것 같았다. 다정은 단정하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인사를 받던 차 회장은 태상과 저를 따라 신발을 신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데 그가 굳이 현관 앞까지 따라나섰다.


“태상이 넌 먼저 차에 가 있거라.”

“또 뒤에서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요.”

태상이 다정을 제 어깨 뒤로 숨기며 말했다.


“그냥 잘 가라고 인사나 하려는 거야.”

“제 앞에서 하시면 됩니다.”

“다정아, 이 할아비가 자꾸 너한테 의지해서 미안하구나. 저 녀석 좀 어떻게 해 주겠니?”

“네? 네…….”

다정이 꼬물거리며 태상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태상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먼저 가 있어요. 인사만 나누고 내려갈게요.”

“……나도 있을게.”

“먼저 안 내려가면 저 나중에 할아버지 만나러 따로 올 거예요?”

“그건…….”

“자, 어서요.”

다정이 재촉하듯 말했다. 태상은 영 불만스러운 듯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다정의 작은 손이 등에 와 닿자 다리가 스르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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