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욕조 위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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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욕조 위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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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욕조 위 두 사람
2023.07.20.
“기분…… 되게 좋아요. 꼭 미용실 온 것 같아요.”
다정이 골골거리는 고양이 같은 소리를 냈다.
“매일 해줄게.”
조물조물 누르는 손길에서 즐거움이 묻어났다. 좋아서 하고 싶다던 그 말은 진심이었던 듯싶었다.
태상은 한참 동안 부드러운 손놀림을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말랑말랑해지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이 들 때 즈음, 태상이 다시 물을 틀었다.
부드러운 물줄기에 거품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그는 섬세한 손길로 머리카락을 머리를 정돈해 가슴 앞으로 내려 주었다.
“고, 고마워요.”
극진한 대접에 비해 꽤 단출한 인사였다. 다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욕조에서 일어났다.
“아, 태상 씨 옷…….”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그의 옷은 거품과 물로 잔뜩 젖어 있었다. 수증기가 가득 차 있어 춥지는 않을 터였지만 찝찝하고 답답할 것 같았다.
“나 나갈 테니까 얼른 씻어요.”
다정이 한 발을 욕조 밖으로 빼며 말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가려는데, 그가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앗!”
주춤하는 사이 태상이 가볍게 힘을 주어 허리를 당겼다. 순식간에 다리가 그에게 딸려갔다. 그는 단단하게 세운 허벅지 위로 다정을 앉혔다.
폭발할 듯 수축한 그의 다리 근육이 그대로 느껴졌다. 다정은 몸을 바싹 움츠렸다.
“태상 씨 다 젖어요…….”
“괜찮아. 그럼 같이 씻으면 되지.”
“아…….”
그가 허리를 끌어안은 탓에 샤워 가운이 어느새 꽤 흐트러져 있었다. 제 자리에서 많이 벗어난 칼라를 본 다정은 앞섬을 빠르게 정돈했다.
“그냥 둬.”
태상이 두 손을 그러쥐며,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수증기를 머금은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뜨겁게 느껴졌다.
“머리만 감겨준다고 했으면서.”
“너도 나를 더 자주 만져주기로 했잖아.”
“아…… 그건…….”
다정이 귓불을 확 붉히며 시선을 떨궜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그런 말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그의 무릎 위에 앉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태상은 손가락 끝으로 귓불을 톡톡 건드렸다.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게 붉어진 연한 살점이 꽤 마음에 드는 듯했다.
“자꾸 놀리지 말아요.”
다정이 젖은 머리카락으로 귀를 덮어버리며 말했다.
수줍음이 많은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감정을 다 읽히는 건 마뜩지 않았다. 그것도 제 감정을 꽁꽁 잘만 숨기는 남자 앞에서는.
“알았어.”
태상이 어깨 위에 턱을 꾹 누르며 말했다. 감싸 안은 허리에 어느새 조금씩 힘이 들어갔다.
“다정아.”
그가 문득 말했다.
“네?”
“다시는 내가 없는 곳에서 아프지 마.”
“…….”
“부탁이야.”
“…….”
다정은 입술을 꾹 말아 물고 고개를 돌렸다.
잔뜩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짙고 강한 색과 달리 눈매는 잔뜩 풀어져 있었다.
걱정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다정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내가 태상 씨에게 다 말했으면…… 그랬으면 태상 씨는 더 편했을까요?”
“응.”
“정말 많이 곤란해졌을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
다정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떨궜다.
저 때문에 곤란해지는 것과 제가 아픈 것. 둘 중에 태상을 더 힘들게 하는 게 뭘까.
고민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오늘 보았던 수많은 태상의 표정이 이미 답이 되고도 남았다.
“알겠어요. 이젠 안 그럴게요.”
다정이 조금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다 말할 거야?”
“네. 다 말해요. 뒷일 걱정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 말할 거예요.”
“그거 좋네.”
태상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뒷일은 내가 걱정할 거니까.”
“나중에 후회 말아요.”
“그럴 리가.”
그가 다정의 턱 끝을 부드럽게 잡으며 말했다.
태상은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입을 맞춰왔다. 부드럽고 느릿한, 평소와 같은 입맞춤이었다. 다정은 익숙한 그의 입술을 천천히 받아들였다.
살살 달래는 듯한 움직임이 기분 좋게 이어졌다. 입술이 나긋나긋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고, 스치지 않은 살결이 없었다.
다정은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욕실 안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한 탓에 폐부까지 홧홧했다.
짧아진 호흡을 느낀 태상은 입술을 천천히 떼어 냈다. 그가 향하는 곳은 붉게 달아오른 귓불이었다.
조금 전 손가락으로 건드릴 때부터 이러고 싶었던 걸까.
뜨거운 입술이 촉, 촉 소리를 내며 가볍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귓바퀴 안에 고인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다정은 미간을 가볍게 찡그리며 어깨를 움찔했다.
“간지러워요.”
“귀여워서.”
“…….”
도대체 뭐가 귀엽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정은 그저 한번 가볍게 웃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남아 있던 한 줌의 긴장이 웃음과 함께 모두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다정은 노곤한 몸을 편안하게 축 늘였다.
태상은 허벅지와 팔에 힘을 주며 다정을 더 단단히 품었다.
어느새 뜨거운 감각은 목덜미를 스치고 있었다.
다정은 느슨하게 풀어진 채 그의 품 안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타오르는 시간. 거대한 저택 앞에 선 다정은 할 말을 잃었다.
태상의 본가는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담벼락은 하늘을 가릴 듯 높았고. 그 위로 비죽 솟아난 소나무는 마치 집을 지키는 장승 같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드는데 태상이 부드럽게 손을 잡아 끌었다.
“가자.”
“네.”
다정이 의지가 타오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인사를 드리는 자리. 이미 차 회장의 마음은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이 자리에는 명옥도 있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띠.
호출벨을 누르자 육중한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저택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처럼 웅장했다. 중앙에는 본채로 향하는 돌계단이 길게 나 있었고, 좌우로 잘 정돈된 정원이 펼쳐져 있었다.
구름처럼 뭉실뭉실한 소나무, 흐르는 듯한 모양으로 나 있는 연못. 다정은 작게 탄성을 흘리며 계단을 올랐다.
띠리릭,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실내는 고풍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오래된 가구며 잘 가꿔진 난은 모두 차 회장의 손을 탄 것 같았다.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데 하회탈 같은 얼굴이 불쑥 들이닥쳤다.
“다정아, 어서 오렴. 기다렸다.”
“아, 안녕하세요. 할아버님.”
둘이 만난 건 비밀이라면서 이렇게 친근하게 부르면 어쩌자는 건지.
다정은 속으로 잔뜩 놀라며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기다리느라 내가 아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죄송합니…….”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습니다. 기다리긴 뭘요.”
말을 마치기도 전, 태상이 견고하게 방어막을 쳤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태도인데 차 회장은 끄떡도 없었다.
“그 얘기가 아니야. 손주 며느리를 내 평생 기다렸다는 말이지.”
“과장하지 마시죠.”
“태상 씨…….”
어색하게 웃으며 듣고만 있던 다정이 슬쩍 태상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태상은 눈썹을 한번 움찔하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눈에 힘을 꽉 주고 있는 게 여차하면 끼어들 기세였지만, 확연히 달라진 태도였다.
“누가 보면 내가 다정이를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어서 식사하러 가시죠. 아침도 안 먹었습니다.”
태상이 다정의 어깨를 부드럽게 끌어안으며 말했다. 누구의 식사를 걱정하는 건지 티가 나도 너무 많이 났다.
다정은 붉어진 얼굴로 그의 손을 슬쩍 끌어내렸다. 적당히 하라고, 정도껏 챙기라고 오기 전에 미리 말을 해 두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차 회장은 흐뭇한 얼굴로 다정을 바라봤다. 복덩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틀림없었다.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태상이가 이렇게 자상하게 구는 모습을 다 보고. 다정아, 어서 들어오렴. 저 녀석 눈초리가 무서워서 너 밥부터 먹여야겠구나.”
“네…….”
다정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아까부터 풍기던 음식 냄새가 더 진하게 느껴졌다.
제법 긴장한 상태인데도 침이 고이는 게 새삼 신기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부엌 쪽으로 향하는데, 깔끔한 투피스 차림의 명옥이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요.”
그녀가 입꼬리를 느슨하게 끌어 올리며 말했다. 귓불에 반짝이는 진주 귀걸이와 퍽 잘 어울리는 품격 있는 미소였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과 달리 표정이 참 자연스러웠다. 다정은 그녀의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시장할 텐데 어서 안으로 들어요. 맛있는 거로 잔뜩 준비해 놨어요. 아버님도 어서 드세요.”
그녀가 다이닝룸을 가리키며 말했다. 차 회장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안쪽으로 향했다.
차 회장이 사라지자 명옥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가셨다. 그녀는 눈을 뱀처럼 가늘게 뜬 채 다정을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었다.
서늘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는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긴장된 숨을 내쉬는데 태상이 어깨를 다시 한번 꼼꼼히 감쌌다.
잔뜩 부푼 어깨며 날카로운 눈매에서 무언의 메시지가 전해졌다. 내 것에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메시지가.
명옥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지난번에는 오해가 좀 있었죠?”
“오해……요.”
“네. 내가 다정 씨 마음을 오해했지 뭐예요. 두 사람, 서로에게 이렇게 진심인 줄도 모르고.”
그녀가 입가를 살짝 가리며 눈매를 휘었다.
“…….”
손바닥 뒤에 감춰진 입은 분명히 굳어 있겠지. 다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땐 내가 미안했어요. 우리 다시 잘 지내 봐요.”
“……네.”
“정말 미안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죠.”
다정이 간신히 답을 하는데 태상이 꼬리를 물 듯 입을 열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특유의 으르렁거림이 느껴졌다.
“그게 무슨 얘기니?”
“오해가 아니라 고의였으니까.”
“…….”
“그것도 제대로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과를 합니까.”
명옥은 떫은 표정으로 그를 슬쩍 올려다봤다. 입술에 힘이 꾹 들어가는 게 하고 싶은 말을 간신히 참는 것 같았다.
태상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다정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했던 모진 말들은 아직도 파편이 되어 제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
거짓으로라도 웃어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정은 어깨를 반듯하게 펴고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