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지각생, 한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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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지각생, 한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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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지각생, 한다정
2023.07.16.
갑자기 고요해진 차 안, 다정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안 도와주셔도 돼요? 그래도 오빤데…….”
“아, 괜찮아요. 맨날 이렇게 우는 소리 하는데, 또 어디서 빌려다 잘 메꿔요.”
익숙한 일인지 미연이 가볍게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그러곤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좀 타격이 클 것 같기는 하지만.”
“……”
다정은 조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쌍한 사람 취급 받는 게 싫어서라고 했던 건, 그저 장난이 틀림없었다. 제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장난이.
“이거 들려주시려고 같이 가자고 하신 거죠?”
“…….”
미연이 멋쩍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우리 바보 오빠 때문에 고생하게 만들어서.”
말로는 셀프로 사고를 수습하자고 했지만 여전히 오빠 대신 사과를 하는 그녀였다. 다정은 가볍게 한번 웃어 보였다.
“아, 그런데 어떻게 다 아신 거예요? 저랑 강선재 씨랑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거.”
“음…… 그건 또 얘기하자면 긴데.”
그녀가 미간에 바짝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배 안 고파요?”
“조금 고프긴 한데…….”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어썸 버거 있거든요? 먹으면서 얘기해요.”
“아, 그건…….”
다정이 곤란한 얼굴로 차 뒤쪽을 힐끔 바라봤다.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헤드라이트를 훤히 밝힌 태상의 차가 멈춰 서 있었다.
“아, 저거요? 괜찮아요. 내가 전화할게요.”
그녀는 지체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아, 아니…….”
“왜요? 하지 말아요?”
미연이 눈을 똑바로 맞추며 바라봤다. 다정은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뇨. 하세요.”
태상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 유쾌한 전 약혼녀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오후.
다정은 살금살금 까치발을 들고 거실로 들어섰다. 그런다고 제가 온 걸 모를 리 없는 태상이지만 저도 모르게 발끝이 들렸다.
태상은 거실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찔리는 게 있어서일까. 평소와 같은 얼굴인데 괜히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태상 씨…….”
태상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벽시계를 한 번 확인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어딘가에 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연과 장장 세 시간이나 수다를 떨어버린 것이다. 저를 찾아 꼬박 하루를 날아온 그를 두고. 금방 보자고 약속을 해놓고서.
“애가 타서 죽는 사람을 두고.”
“아, 그게…….”
“아주 못됐지, 한다정.”
“미안해요.”
태상의 눈썹 끝이 불만스럽게 올라갔다. 다정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햄버거만 먹고 출발하려고 했거든요? 딱 삼십 분만 있으려고. 근데 미연 씨가 말을 너무 재미있게 하는 거예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
나름 장난스럽게 노려보는 것 같기는 한데 역시 조금 긴장이 되었다.
다정은 쭈뼛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슬쩍 허리를 감자 그가 두 팔로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다녀왔어요.”
“…….”
태상은 아무 말 없이 두 팔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에 가득 울렸다.
“손은. 안 아파?”
“조금 아프긴 한데, 움직이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아주 부러뜨려 버리고 싶었어.”
태상이 읊조리듯 말하며 다정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다정은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가 선재에게 한 일은, 그리고 또 앞으로 할 일은 아마 제 손이 다친 것보다 훨씬 아픈 일일 것이다.
“너무 그러지 말아요. 그래도 미연 씨 오빤데.”
순간, 태상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잔뜩 좁혀진 미간에서 의아함과 불안이 동시에 느껴졌다.
“미연이 얘기가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태상 씨랑 가까운…… 사이잖아요.”
“……너만큼은 아니야.”
“알아요.”
싱긋 웃으며 답하자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둘이서 무슨 애기를 한 거지?”
“음…… 공통분모에 대한 얘기?”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하는데 그가 가볍게 눈동자를 일그러뜨렸다.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
“……왜요? 우리가 가까워지면 무슨 문제라도 생겨요?”
다정이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태상이 표정을 부드럽게 풀며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오늘처럼 나를 버릴 거잖아.”
“…….”
장난을 해도 참 장난 같지 않은 남자였다.
다정은 새까맣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조금 불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 시간을 모두 독점하겠다는 선언에 대한 작은 항의였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그는 볼을 한번 부드럽게 쓸고 다시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커다란 손이 가볍게 스치자 다정의 눈동자가 일순 크게 뜨였다.
“아, 맞다. 안 돼요.”
다정이 고개를 뒤로 쑥 물리며 말했다.
“……?”
“저 머리 지금 지저분해요.”
머리에 잔뜩 뿌린 스프레이가 뒤늦게 떠오른 거였다.
이미 다 굳어버려 뭐가 묻어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가 만지지 않았으면 했다. 그가 만지는 제 머리는 언제나 부드럽고 찰랑이기를 바랐다.
“머리 감고 나서요. 일하고 나면 머리 엄청 지저분하거든요. 헤어 제품에 먼지가 엉겨서.”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태상이 다시 가까이 붙으며 말했다. 다정은 단호하게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안 돼요. 씻고 나올 테니까 그때까지는 접근 금지.”
다정이 빠르게 돌아서며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허리를 감은 팔 때문에 걸음은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었다.
손을 톡톡 두드리는데 그가 허리를 굽혀 다정의 등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손, 쓰면 안 되잖아.”
한껏 가까워진 고개 덕에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렇긴 한데…….”
“머리는 내가 감겨 줄게.”
“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한 손으로 하면 돼요.”
다정이 화들짝 놀라 답했다.
제 몸에 그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건 조금 다른 문제였다. 태상의 손길은 로맨틱하게 제 머리카락을 쓸고 넘어가는 거로 족했다.
“해주고 싶어.”
“그, 그런 게 왜 해주고 싶은데요…….”
다정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부끄러움이 한껏 녹아든 목소리였다. 태상은 자그마한 어깨 위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너니까. 네 머리카락은 만지는 것도, 감겨 주는 것도, 다 좋으니까.”
“…….”
손이 아플까 봐, 혹은 덧나면 안 되니까. 그런 답을 예상했던 다정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운 입고 있어. 나는 머리만 감겨 줄게.”
태상이 팔을 풀며 말했다. 마치, 어서 가보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정은 천천히 돌아서 그를 올려다봤다.
차분한 얼굴에 입술만 살짝 휘어 있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표정이랄까. 기대하는 듯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자 어쩐지 쑥스러운 기분이 올라왔다.
도대체 제 머리가 뭐하고 감겨주고 싶다는 건지.
다정의 목덜미가 어느새 살짝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태상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그는 허리를 잔뜩 숙인 채 시선을 맞췄다.
“뭐가 이렇게 수줍은 게 많을까…….”
“…….”
“내 다정이는.”
순간, 심장이 와락 쥐어짜지는 것만 같았다.
내 것. 소유를 단정 짓는 그의 말이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그와 하나로 엉겨버리는 것 같았다.
숨을 나누는 키스보다, 함께 지새는 밤보다, 더 강렬한 경험이었다.
어느덧 홧홧한 열기가 두 뺨을 뒤덮었다.
“제, 제가 나중에 부를게요. 부르면 들어와요.”
다정은 그 말 한 마디만 남긴 채 도망치듯 사라졌다.
***
수증기가 뽀얗게 차오른 욕실 안.
샤워를 마친 다정은 벽에 걸려 있던 샤워 가운을 걸쳐 입었다. 거울을 들여다보자 발그레하게 들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손등으로 볼을 꾹꾹 눌렀다. 또 그런 말을, 그런 눈빛과 함께 듣는다면 이번엔 정말로 심장이 녹아버릴지도 몰랐다.
“다, 다 했어요…….”
다정이 문을 살며시 열고 말했다.
태상은 욕실 맞은편 방에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놓은 채 업무를 보던 그는 다정의 소리를 듣자마자 빠르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탁.
욕실 안으로 들어온 태상이 가볍게 문을 닫았다. 그는 중앙에 멈춰 서 주위를 한번 쭉 둘러봤다.
“여기 앉아 봐.”
그가 욕조 안, 끝자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태상은 하얀 대리석 끝에 걸터앉아 한쪽 다리를 욕조 안에 넣었다. 그러곤 대리석 구조물에 연결된 샤워기를 쭉 잡아 빼고 수전을 올렸다.
다정은 쭈뼛거리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무릎을 세워 두 팔로 끌어안자 어색한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솨아아.
“…….”
물줄기는 계속 흐르는데 머리에 닿는 느낌은 없었다. 아마도 그가 자기 손바닥 위에 물을 뿌리는 것 같았다.
미지근했다가 조금 뜨거워졌다가. 발끝을 스치는 물의 온도가 조금씩 변했다. 다정은 가느다란 물줄기가 간지러워 발가락을 오므렸다.
“물, 닿을 거야.”
나직한 목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따스한 물이 흘러내렸다. 뿌려졌다기보다 흐르는 느낌. 아무래도 그가 손바닥에 고인 물을 천천히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뜨거워?”
“아뇨. 딱 좋아요.”
다정은 기분 좋게 눈을 감으며 살살 도리질을 쳤다. 그러자 태상이 다정의 머리를 잡고 천천히 뒤로 젖혔다.
그의 손이 이끄는 대로 목을 가누자, 단단한 허벅지가 뒤통수에 와 닿았다. 다정은 편하게 힘을 뺀 채 그에게 기댔다.
태상은 수압을 약하게 조절한 샤워기 헤드를 머리 위로 가져왔다. 따스한 물이 뿜어져 나오며 긴 머리를 빠르게 적셨다.
그는 머리카락 안쪽까지 손을 넣어 꼼꼼히 물을 흘려보냈다. 사이를 가르는 손가락이 마치 헤엄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아프면 말해.”
“…….”
다정은 눈을 감은 채 빙그레 웃었다.
약하디약한 수압,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 그가 도대체 무엇을 걱정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웃어.”
그가 입꼬리를 톡 건드리며 물었다. 다정은 꽃망울을 터뜨리듯 입을 가볍게 벌렸다.
“새끼 강아지도 이렇게 씻기진 않아요.”
“그런가.”
“네.”
그 소리에 안심이 되었는지 태상이 손끝에 조금 더 힘을 실어 움직였다.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 드문드문 들리는 그의 음성. 캄캄한 시야 덕분에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머리가 속까지 촉촉이 젖어 들자 태상이 손바닥 안에 샴푸를 꾹 짰다. 시원한 느낌이 닿고, 기다란 손이 섬세하게 움직였다.
뽀얀 수증기가 순식간에 달콤해졌다.
다정은 나긋한 숨을 내쉬었다. 몽글몽글한 거품이며 적당히 누르는 힘 때문에 점점 나른해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