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그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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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그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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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그녀의 이야기
2023.07.13.
***
“흡!”
다정은 숨을 확 들이마시며 터져 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벌써 몇 번째 급발진일까.
딱 보기에도 성격이 급해 보였던 미연은 운전 역시 정말 과격하게 했다.
도로 위를 질주하는 한 마리 멧돼지 같달까. 예쁘고 귀엽게 생긴 외모와 판이하게 다른 운전 스타일이었다.
“어머, 놀랐어요?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제가 성격이 조금 급해서요.”
“조금……요.”
다정은 안전벨트를 손에 꼭 쥐며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태상이 그녀와 함께 가지 말라고 했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았다.
“하.”
백미러를 확인한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흘렸다. 저도 모르게 따라 시선을 옮기자, 뒤에 바싹 따라붙은 검은 SUV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운전자는 태상이었다.
“감시하는 거야, 뭐야.”
미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액셀을 밟았다. 그러더니 문득, 아무렇지 않게 돌직구를 날렸다.
“나 밉죠? 태상이 전 약혼녀라.”
“네?”
다정은 고개를 홱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놀라 말도 제대로 이을 수 없는데 그녀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담담한 시선은 편안하게 도로 위로 향해 있었다. 떠보는 것도, 비난하는 투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질문이었다.
다정은 가만히 시선을 떨궜다.
“밉지는 않아요.”
“그럼요?”
“복잡해요. 신경이…… 좀 쓰인달까? 질투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또…… 미안하기도 하고요…….”
“엉?”
신호에 맞춰 차를 정차한 미연이 갑자기 고개를 홱 틀었다. 크게 뜨인 눈이며 엉망으로 일그러진 입이 마치 만화에 나오는 캐릭터 같았다.
“왜…… 그러세요?”
“미안? 미안이라고 했어요, 지금?”
“…….”
다정은 순간 아차 싶었다. 미안하다는 제 말이 동정처럼 느껴졌을까. 자존심이 세고 귀하게 자란 아가씨라면 분명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뒤늦게 입술을 말아 무는데 그녀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아…… 진짜, 혹시나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진짜였네.”
“……?”
다정은 두 눈을 토끼처럼 뜨고 그녀를 들여다봤다. 어느 지점에서 웃음이 터진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고,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녀가 차를 출발시켰다.
“왜요? 나한테 왜 미안한데요?”
“……두 사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희 결혼 기사 나갔잖아요. 사람들 어떻게 생각할지야 뻔하죠. 그리고…….”
다정이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게 아니었다. 입안에 고인 말을 차마 뱉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미연이 붉은 입술을 바짝 끌어올렸다.
어쩐지 속마음이 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정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또 만약에 미연 씨가 태상 씨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면 어쩌나 해서…….”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다고 생각할까.
남자친구의 전 여자까지 걱정하는 건 확실히 바보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갑작스레 그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다정으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선재에게 그런 말을 듣고 난 이후로는 더더욱 마음이 쓰였고.
다정은 고개를 숙인 채 손끝만 만지작거렸다.
“다정 씨.”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가볍게 스쳤다.
“네?
“우리가 왜 정략결혼 상대가 되었는지 알아요?”
“그건…… 양가 사이가 돈독하고,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게 많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그럼요……?”
다정이 슬쩍 고개를 들며 물었다.
“제가 태상이 근처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라서 그래요.”
“유일한 여자요?”
“네.”
그녀가 핸들을 꺾으며 말을 이었다.
“태상이한테 어릴 때 얘기 들은 적 있어요? 사고가 났을 때 얘기.”
“아니요…….”
다정이 작게 도리질을 치며 말했다.
태상은 가족 이야기와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저 역시 혹시 무언가 깊은 상처가 있을까 봐 묻지 못했고.
태상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고 시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드는데 미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기는 했어요. 걔는 워낙 옛날 얘기 싫어하니까.”
미연은 자기 일이 아니니 짧게만 얘기하겠다 말하며 다시 입을 뗐다.
“태상이가 어렸을 때 사고를 당했어요. 중학교 1학년 때.”
“네…….”
“실수로 여자아이를 다치게 했다나 봐요. 그래서 그 이후로 여자가 근처에 오면 경기를 일으켰고.”
“아…….”
다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꼭 말아 쥐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태상의 과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프고 잔인했다.
“그런데 저랑 태상이는 사고가 있기 훨씬 전에 만난 사이예요. 처음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어렸을 때.”
“…….”
“아마도, 태상이한테 저는 여자가 아니라 음…… 뭐랄까, 그냥 인간? 아니면 뭐 여자 형제? 그런 것처럼 보이나 봐요. 그래서 그런지 제 곁에서는 그 정도로 힘들어하지 않았고요.”
다정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픈 상처가 생기기 전에 시작된 인연이라면 분명, 그녀의 존재가 편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결혼을 추진하게 된 거예요. 태상이가 유일하게 곁에 있을 수 있는 여자 사람이라는 이유로.”
“네? 그, 그게 다라고요?”
찬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미연과 결혼을 추진한 진짜 사정이 등장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 이유가 다라니 이건 말이 안 됐다. 미연에게 너무 불리하고 마음 아픈 결혼이었다. 얼굴에 절로 씁쓸한 기운이 어렸다.
“아…… 그런 눈으로 볼 건 없고요.”
미연이 한 손을 가볍게 펼쳐, 손바닥을 내보이며 말했다.
다정은 빠르게 눈가에 힘을 풀었다.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녀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좀 달라요. 뭐 특권 의식 있는 대단한 집 사람들이다, 그런 얘기 하는 게 아니고요. 그냥 좀 달라요.”
“…….”
다정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범하게 친구 사귀고, 연인 만들고 그런 거요. 우린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아요. 아주 소수의 사람들과 인연을 쌓고, 정해진 후보들 사이에서 결혼을 하죠. 그게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
“내 경우엔 태상이가 아니었으면 설진 건설 둘째, 아니면 김진태 의원 장남. 이렇게 둘 중 하나였거든요? 근데 난 그 두 사람 다 영 밥맛이라.”
“아…….”
다정은 그제야 그녀의 웃음이 이해가 갔다. 그녀에게 있어서, 태상과의 결혼은 도피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애초에 감정 따위는 끼어 들 틈이 없는.
다정은 조금 쓸쓸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태상 씨와 결혼을 결심한 이유가 밥맛을 피하기 위해서라니…… 웃긴 건지, 슬픈 건지 전 잘 모르겠어요.”
“뭐, 둘 다죠.”
그녀가 아랫입술을 삐죽거렸다.
“얘기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을 텐데…….”
“아, 감사는 무슨. 내가 찝찝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얘기한 것뿐이에요. 혹시라도 다정 씨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그런 찝찝함.”
미연이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며 말했다. 다정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렇게 생각 안 할게요. 절대.”
“오케이. 그럼 이제 두 번째 얘기로 넘어갑시다.”
“……?”
또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나 싶어 고개가 갸우뚱하는데, 미연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미연은 빠르게 갓길에 차를 세웠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기어 오지.”
“……?”
“다정 씨.”
“네?”
“이 전화는 다정 씨도 들어야 해요.”
“제가 미연 씨 전화를 왜……?”
동그란 눈을 연신 깜빡이는데 그녀가 차량 내 블루투스 기능을 이용해 전화를 받았다. 입꼬리가 뾰족하게 올라간 게 꽤 사악해 보였다.
“여보세…….”
「야. 미연아!」
맞은편에서 와락 들려오는 목소리는 선재의 것이었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귀 아파.”
「야, 나 좀 도와줘.」
“뭘? 아, 아니다. 안 도와줄래. 오빠, 우리 끊자.”
「야, 나 진지해.」
미연은 팔짱을 척 끼며 허공을 삐딱하게 노려봤다.
“뭔데.”
「차태상, 이거 미쳤나 봐.」
갑자기 흘러나온 태상의 이름에 다정이 흠칫 놀랐다. 잔뜩 집중하며 콘솔을 바라보는데 다 죽어가는 선재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걔 내가 투자했던 영화마다 골라서 투자금 싹 다 뺏어. 아니, 도대체 그 자식은 이런 걸 다 어떻게 아는 거야?」
“영화? 아…… 그래?”
「영화 다 엎어지게 생긴 건 말할 것도 없고, 주가 박살나는 것도 시간문제야. 하…… 내가 위드 무비 주식 들고 있는 게 얼마인데.」
미연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야. 너 아버지가 해준 삼성동 아파트, 그거 아직 가지고 있냐?」
“있든 말든 신경 꺼라. 너한테 갈 일 없으니까.”
「나 진짜 급해서 그래. 그게 나락가면 나도 같이 나락이야. 꼰대들 몰래 시작한 거라서 도와달라고 말도 못 꺼낸다고. 야, 진짜 이번 한 번만 어떻게 안 되겠냐?」
“아니, 그러게 왜 태상이 심기를 건드려. 딱 봐도 얼굴에 써 있잖아. 나 물면 넌 죽는다, 이렇게.”
선재의 깊은 한숨 소리가 차 안 가득 울렸다. 그는 어느덧 우는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 나 에어 코리아 광고에서도 짤렸단 말이야. 내 기획으로는 절대 광고 못 찍겠다고, 교체 안 하면 우리랑 안 하겠대.」
“그거야 네 능력이 부족한 거지. 솔직히 그동안 할아버지 체면 살리느라 태상이가 억지로 써 준 거야.”
「뭐? 누가 그래?」
“눈 있고, 귀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러던데?”
“풉!”
다정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입가를 두 손으로 빠르게 막는데 다행히 선재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듯싶었다.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미연이 도와주겠다고 할 때까지 전화를 끊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있잖아…….」
“안 해.”
「말도 안 꺼냈어!」
“꺼내 봐.”
「네가 태상이한테…….」
“안 해.”
「야, 강미연!」
“대신 부탁하고 기어달라고? 내가 미쳤냐? 오빠, 우리 이제부터 사고 수습은 각자, 셀프로 하자? 응? 끊는다?”
미연은 그렇게 말하고 운전대 위 버튼을 꾹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