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말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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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말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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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말을 하지
2023.07.09.
다정은 움찔하며 서서히 손끝에서 힘을 풀었다.
그때,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미치겠네.”
다정은 깜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까칠한 태도며 거친 말투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이런 태상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놀라서 퍼뜩 소매를 놓는데 태상이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겼다.
“한다정.”
찌르듯 바라보는 시선이 날아와 꽂혔다.
“네, 네……?”
“넌 나를 얼마나 더 미치게 할 셈이지.”
그가 셔츠 맨 위 단추를 풀며 말했다. 그러곤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넥타이까지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흡사 목줄이 끊어진 사냥개 같았다.
다정은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왜, 왜…….”
“누구는 죽을 것 같은데…….”
느릿한 발걸음이 다정에게 향했다.
“혼자 여유롭고.”
“…….”
“이렇게 약을 올리지.”
잔뜩 가까워진 거리 탓에 어느새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한껏 흐트러진 호흡에서 거친 박동이 느껴졌다. 다정은 가물가물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인내심이 다 닳아 없어진 남자의 얼굴이 있었다. 붉게 충혈된 흰자위며 빨간 입술이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태상…….”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다정의 입술이 뭉개졌다.
입안을 맴돌던 소리는 조각나 숨으로 흩어졌고, 말랑한 살이 쉼 없이 짓눌렸다. 다정은 평소보다 다급한 그의 움직임에 화들짝 놀랐다.
격정적일지언정 신사 같은 모습을 잃지 않던 태상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욕망보다 제 감정을 먼저 생각하고 다가왔고.
하지만 격하게 치미는 그에게서 이전의 배려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에 사로잡힌 움직임은 갈급했고, 처절했다.
태상은 한 손으로 다정의 허리를 빠르게 감았다. 그러곤 더 깊이, 더 치열하게 파고들었다.
다정은 그의 등허리를 빠듯하게 안았다. 그러자 그가 다른 한 손으로 뒤통수를 넓게 감싸며 다정을 천천히 뒤로 밀었다.
등 뒤로 서늘한 감각이 와 닿았다. 다정은 태상과 벽 사이에 갇혀 오롯이 그의 입맞춤을 받아냈다.
“하아…….”
감각이 온통 그로 가득 차는데 태상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떨어지는 입술에서 아쉬움이 가득했다.
형형한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흥분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하…… 이럴까 봐, 이렇게 터질까 봐 참은 거라고. 그런데 넌…….”
“…….”
다정은 놀라 소리도 낼 수 없었다.
하루 종일 말을 붙여도, 곁에 바싹 다가가도. 냉담하다 싶을 정도로 반응이 없었던 이유가 이런 거였다니.
당혹스러운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렇게 보지 마.”
태상이 눈을 피하며 말했다.
“다 너 때문이니까.”
그는 인내하듯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러곤 고개를 돌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남아 있는 흥분의 잔재를 털어내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아…….”
순간, 다정의 눈동자가 빠르게 굳었다.
손을 꽉 쥐고, 머리를 거칠게 쓸고. 제게 화를 내는 거라고 생각했던 그의 행동들은 사실 부단한 인내의 결과였던 것이다.
다정은 한참을 벙긋거리다 겨우 입을 뗐다.
“미, 미리 얘기를 해 주면 좋잖아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열심히도 그의 주변을 알짱거렸다. 분위기를 풀어 본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손이며 팔꿈치를 슬쩍, 슬쩍 잡기도 했고.
다정은 목덜미까지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지금까지 저는 그저 태상을 고문하고 있었던 거였다.
“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집까지 고작 몇 시간이니까. 그런데…….”
그가 미간을 바싹 좁혔다.
“난 그 정도 자제력도 없는 인간인 모양이야.”
“…….”
고민하지 않아도 될 거로 고민하고 있는 그가 안타까웠다. 다정은 수줍음을 꾹 참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나도 그랬어요.”
이슬방울 같은 목소리가 태상의 귓가에 맺혔다.
“……뭐?”
“나도 안 참아졌다고요. 태상 씨 안고 싶고, 만지고 싶고…… 그랬다고요.”
속내를 무방비하게 드러낸 그의 앞에 다정도 제 부끄러운 진심을 드러냈다. 피가 뜨거워질 만큼 창피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태상에게라면 이런 모습 하나, 둘쯤 보여주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느새 트레인이 메인 터미널 승강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니까…… 혼자만 애태우지 말라고요.”
다정이 수줍은 웃음을 흘리며 그의 품에서 쏙 빠져나갔다. 태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텅 빈 제 품을 내려다봤다.
잔뜩 굳어진 눈동자가 간헐적으로 흔들렸다.
“얼른 내려요.”
다정이 출입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태상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이윽고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정의 심장이 다시 잔잔하게 뛰었다. 그는 입가를 손으로 매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 집에 가서 봐.”
***
환영 인파들이 가득한 입국장.
걸음을 내디디는 다정의 얼굴이 한결 편안했다. 오해도 풀었으니 어서 빨리 집으로 가 태상과 남은 하루를 함께 보내고 싶었다.
그도 같은 마음인지 아까부터 보폭이 조금씩 빨라졌다.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는데, 낯선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차태상!”
“……?”
태상의 이름을 이렇게 거침없이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은데. 게다가 이건 여자의 목소리이고.
다정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물웅덩이 고이듯 여기저기 뭉쳐 있는 환송객 사이에서 소리를 낸 사람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의아한 시선을 한 바퀴 더 돌리던 그때,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170은 되지 않을까.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그녀는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며 시원스럽게 걸었다. 걸음을 뗄 때마다 통이 넓은 와이드 팬츠가 가볍게 팔락거렸다.
“야, 잘 다녀왔냐?”
태상의 앞에 멈춰선 여자가 대뜸 말했다. 커다란 눈과 동그랗게 말린 단발머리가 퍽 귀여운 인상을 자아냈다.
“……넌 여기 왜 왔는데.”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목소리가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왔긴. 네가 답을 제대로 안 해 주고 갔으니까 여기까지 왔지.”
그녀가 얼굴을 쑥 들이밀며 말했다. 태상은 미간을 접으며 뒤로 고개를 확 물렸다. 작게 찌푸려진 눈가에 성가셔하는 기색이 잔뜩이었다.
다정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커다란 눈을 도르륵 굴렸다. 분위기로 보아하니 친구 사이인 것 같기는 한데, 태상이 친한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영 믿기지 않았다.
탁구공처럼 이리저리 튀던 시선이 다시 여자에게 향한 그때, 여자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확 틀었다.
“반가워요. 저 강미연이에요. 아, 내 이름은 모르시려나? 음…… 태상이 전 약혼녀예요.”
“아, 네…….”
다정은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 여자가 신문에서만 봤던 태상의 전 약혼녀라니. 순간, 뭐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올라왔다.
다정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
“……바, 반갑습니다. 한다정이에요.”
“네. 저도 반가워요.”
미연이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입가가 크게 벌어지는 미소가 뚜렷한 이목구비와 퍽 잘 어울렸다.
다정은 조금 멍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큰 키만 빼면 그녀는 선재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성격도 안 닮았으면 좋겠는데. 걱정 어린 생각이 고개를 드는데 태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약속은 지킬게.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킬 건데?”
미연이 눈동자만 빼꼼 돌린 채 말했다. 태상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분란, 더 만들지 않을게. 너희 쪽 사람들 더 흔들지 않을 거고, 할아버지 귀에 말 들어가는 일도 없을 거야.”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미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정은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래도 회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일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서늘하게 굳은 태상의 얼굴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만 가 봐. 대답 들었잖아.”
태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미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팔짱을 꼈다.
“내가 그 대답 들으러 온 건 맞는데, 그거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 아니야.”
“……?”
“다정 씨, 내가 집에 데려다 줄까요?”
미연이 곁으로 다가와 서며 말했다.
“네?”
다정은 토끼처럼 커다래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 만난 사이에, 그것도 전 약혼녀와 현 약혼녀라는 타이틀까지 달고 동승이라니.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네가 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데 태상이 팔을 뻗어 다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왜긴. 차태상 너는 내 친구고, 다정 씨는 네 애인이고. 이유는 그거면 충분한 거 아니야?”
“…….”
태상이 쓰게 신음하며 고개를 살살 저었다. 이런 억지가 굉장히 익숙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다정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속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치미는 게 느껴졌다.
왜 이렇게 친할까. 왜 자꾸 태상을 편하게 부를까.
거리감 없는 두 사람의 모습이 가슴 안쪽을 쿡쿡 찔렀다. 결국, 뜨거운 무언가가 목을 타고 훅 올라왔다.
“저…… 저 미연 씨 차 타고 갈게요.”
“뭐……?”
태상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잔뜩 일그러진 눈동자가 마치 고문이라도 당하는 사람 같았다.
다정은 애써 그의 시선을 피했다.
“굳이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같이 타고 가면 좋죠.”
“한다정…….”
“태상 씨는 태상 씨 차 타고 따로 오세요.”
태상은 분명 이 상황을 조금 불편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정이 고집을 부리는 건,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연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제게 하고자 하는 말이 뭔지.
“이거 봐. 나랑 가고 싶다잖아.”
미연이 다정의 곁에 바싹 붙어서며 말했다. 그러곤 팔짱을 끼려는 듯 한 손을 다정의 팔꿈치 근처로 가져갔다.
“안 돼.”
태상이 빠르게 말하며 다정의 어깨를 감쌌다. 잔뜩 심각해진 목소리며 빠른 손놀림에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향했다.
“다쳤어. 건드리지 마.”
꽤 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 미연은 멋쩍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 맞다. 손목 다쳤지. 미안해요.”
“괜찮아요.”
다정이 빠르게 말하며 다시 그녀와의 거리를 좁혔다. 제가 다친 걸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나중에 따져도 됐다.
지금은 야박한 태상의 반응에 놀란 그녀를 다독여주는 게 먼저였다.
“크게 다친 건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미연은 가볍게 웃으며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어서 가자는 듯 고개를 옆으로 휙 기울였다.
다정은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태상을 향해 몸을 돌렸다.
“……태상 씨, 우리는 집에서 봐요. 어차피 금방이잖아요.”
“무슨 얘기가 듣고 싶은 건데. 내가 다 알려줄게.”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태상 씨 친구랑 저도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래요.”
미연과 가까워지고 싶다는 말이 영 거짓은 아니었다. 태상의 소중한 친구이니 그녀는 제게도 의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다정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자 태상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데로 가지 말고.”
“안 가요.”
“집에서 봐.”
“네.”
미연을 따라 걷는 다정의 등 뒤로 애절한 시선이 따라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