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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화났나? (80/89)


80. 화났나?
2023.07.06.


불러온 화면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텅텅 비어 있던 퍼스트와 비즈니스가 어느새 전부 만석으로 변해 있었다.

창진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풀 페이(할인되지 않은 가격으로 구입한 항공권)로 퍼스트와 비즈니스석 전부 만석입니다. 이렇게 되면 스텝 티켓은…….”

그가 멋쩍은 듯 선재를 한번 바라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위 클래스인 이코노미로 자동 변경되게 됩니다.”

“뭐? 그럼 나보고 지금 이코노미를 타라는 말이야? 손님을 이따위로 대하는 항공사가 어디 있어?”

“모든 항공사가 따르는 기본적인 운영 방침입니다. 차액에 대해서는 따로 환불 조치가 있을 겁니다.”

“환불 같은 소리. 이따위 서비스 이용 안 해!”

선재가 사무장을 향해 보딩패스를 내던지며 말했다. 기다란 종이는 사무장의 뺨에 부딪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거로 보아 선재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곧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못 하겠는지, 그는 뺨을 한 번 씰룩거리고 말았다.


“…….”

태상은 느릿하게 허리를 굽혀 보딩패스를 주웠다. 그러곤 선재의 팔목을 잡아 올려 손 안에 보딩패스를 쥐어주었다.


“네가 뭔데 우리 직원을 건드리지.”

그가 손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아, 아아! 야, 아파, 아파!”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 손이 아주 부러져야 정신을 차릴까?”

언뜻 보기엔 그저 친절히 티켓을 손에 쥐여 주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퍼렇게 솟아오른 힘줄에서 그가 얼마나 힘을 세게 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 부사장님!”

다정은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그만하세요.”

“그래, 야, 태상아. 그만, 그만!”

선재가 손목을 연신 좌우로 비틀며 말했다.

그는 다른 한 손을 써서 태상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돌처럼 묵직한 태상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야, 아프다고!”

그가 다시 한번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다정은 다급히 태상의 팔을 부여잡았다.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다 써서 그를 잡는데 다친 손목에서 찌르르한 느낌이 전해졌다.


“아!”

다정이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황급히 손을 뗐다. 그러자 잔뜩 일그러진 검은 눈동자가 빠르게 제 손을 좇았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그의 얼굴에 다정은 저도 모르게 손을 감췄다.


“아오…….”

태상의 손에 힘이 풀린 틈을 타, 선재가 빠르게 팔목을 빼냈다. 그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며 사무장의 뒤에 가서 섰다.

태상은 제 손에서 도망간 먹잇감을 사나운 눈으로 좇았다.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눈빛이 여전히 칼날 같았다.


“앞으로 넌 우리 항공사 탑승 금지야. 그리고 네가 이따위, 라고 말한 스텝 발권 서비스…….”

“뭐, 뭐…….”

어깨를 바싹 웅크린 그가 턱만 사납게 치켜 들며 말했다.


“앞으론 네가 부담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알아. 양가 회장님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리지.”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부담을 한다니?”

“나중에 알면 돼.”

태상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스텝 발권은 항공권을 기존 가격의 10분의 1로 구매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물론, 돈이라면 차고 넘치는 선재가 굳이 이런 혜택을 이용할 이유는 없었다. 이건 애초, 차 회장이 대성의 일반 직원들에게 주고자 했던 혜택이었다.

대성은 전 계열사 모두 높은 급여를 지급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이렇다 내세울 만한 직원 복지는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차 회장은 항공권 할인 혜택을 제안했다.

대상자는 대성 그룹의 과장급 이상, 혜택은 연에 두 번.

뜻깊은 배경을 바탕으로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된 선재였지만, 그는 이런 사실엔 관심도 없었다.

선재는 여전히 씨근덕거리는 표정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리다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이거 폭행이야. 나 손 다쳤어. 사무장, 당장 여기 경찰 불러.”

선재가 창진의 어깨를 탁탁 내려치며 말했다. 사무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태상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태상이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러.”

“뭐……?”

“부르라고. 하지만 이건 기억해야 할 거야.”

“……?”

“너와 나는 지금 둘 다 승객이라는 거.”

“그게 무슨 소리…….”

“하지만 여기 계신 사무장님은 아니지.”

“하.”

태상의 말뜻을 뒤늦게 이해한 선재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두 승객 사이의 문제는 가벼운 벌금이나 탑승 거부로 끝날 일이라면, 승무원을 향한 폭행은 구금 감이었다.


“조, 종이 쪼가리 하나 맞은 게 뭐가 폭행이라고…… 차, 참 나.”

선재의 목소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었다. 점점 불리해지는 상황을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다.

태상은 찌르는 듯한 눈동자로 그를 노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티고 서 있는 게 다급한 재촉보다 훨씬 무서웠다.

그는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뒤, 기내 끝 쪽을 힐끔 바라봤다.

어서 사라지라는 거였다.


“…….”

선재는 쭈뼛거리며 사무장의 뒤에서 걸어 나왔다. 기가 푹 죽은 게 조금 전까지 뻗대던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가, 간다고…… 가면 되잖아.”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태상의 곁을 지났다. 혹시라도 또 잡힐까 손은 곱게 주머니 안에 넣은 채였다.

다정은 멀어지는 선재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렇게나 까칠하게 굴던 남자가 이렇게 쉽게 제압되다니.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지만 역시나였다. 그는 역시 저보다 약한 사람에게만 강하게 굴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

인천 공항 셔틀 트레인 승강장 앞.

다정은 멈춰 선 태상의 옆얼굴을 조심히 살폈다.


‘역시 화났나…….’

비행기에서 먼저 내린 태상은 게이트 앞에서 다정을 기다렸다.

지상 업무를 마치고, 한참 뒤에 모습을 드러낸 다정은 그와 함께 터미널을 통과했다. 비행 도중에도 그랬지만 나란히 걷는 내내, 그는 꽤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에요?’


‘저 분이 탔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돌아오는 비행기 안, 다정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때마다 태상은 짤막한 답을 내놓고 시선을 돌렸다. 마치 저와의 대화를 피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태상은 그저 우연히 본 보고서를 통해 제 사고를 알게 되었고, 걱정이 되어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어쩐지 태도가 냉랭했다.


‘내가 말을 안 했다고 서운해 하는 걸까……?’

다정은 비행 내내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가서 말을 걸어보기도 하고, 괜히 볼 일도 없으면서 기내를 왔다갔다 거리기도 하고.

하지만 그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눈빛은 걱정으로 애가 끓는데 어쩐지 자꾸만 제게서 멀찍이 떨어지려고만 했다.

기분이 조금 침울하게 기분이 가라앉을 즈음,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이리 줘.”

“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태상이 트롤리로 손을 뻗쳤다. 괜찮다고 말하려던 다정은 냉큼 가방을 내밀었다.

그의 도움을 받는 게 분위기를 푸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고마워요.”

“…….”

태상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이럴 때는 조금 수다스럽게 구는 게 좋으려나. 다정은 대화의 공백을 메워 보려 경쾌하게 재잘거렸다.


“근데 오늘 아침에 몇 시 비행기 타고 온 거예요? 이렇게 일찍 출발하는 비행편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다정이 내내 궁금했던 걸 조심스레 물었다.


“여덟 시 비행기.”

“여덟 시요?”

고개가 순식간에 모로 기울었다.

여덟 시에 한국에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탔다면 그는 제가 상하이를 떠난 뒤에 도착했어야 맞다. 이렇게 저와 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올 수는 없다.


“어제 저녁 여덟 시.”

“……네?”

“어제 저녁에 대만으로 가서 오늘 아침에 환승한 거야.”

“…….”

다정은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어젯밤에 한국에서 출발해 대만을 찍고, 공항 바닥에서 하룻밤을 잔 뒤, 아침에 상하이로 날아와 제가 탄 비행기에 올라탔다는 거였다.


“아침에 출발하는 직행을 탔으면 너를 놓쳤을 거야.”

다정이 한동안 말이 없자 그가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한 태도였다.

다정은 찬찬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피부가 조금 까슬했다. 눈 밑도 조금 거뭇한 것 같고.

다정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냥 내버려두지 뭘 이렇게까지 했어요.”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

이런 결과를 예상한 건 아니었는데.

다정은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태상을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가 저 때문에 누군가와 척을 지지 않고, 대성과의 관계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나와 버렸다. 아니, 오히려 더 안 좋게.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다정은 제 행동에 대해 조금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해요.”

태상은 눈썹 앞머리에 잔뜩 힘을 잔뜩 준 채 다정을 내려다봤다. 서늘한 눈동자며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굉장히 낯설었다.


“……괜찮아.”

그가 손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바르르 떠는 손등에서 적잖은 화가 느껴졌다.

다정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제게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일부러 그런…….”

느릿하게 입을 뗀 그때, 메인 터미널로 향하는 트레인이 선로로 들어섰다.


“가자.”

태상이 간결한 한 마디를 남긴 채 걸음을 뗐다. 다정은 어깨를 축 늘인 채 트레인에 올라탔다.

드문드문 보이던 승객들은 다른 칸에 탔는지, 작은 열차 안에 승객은 저와 태상뿐이었다.

탁, 문이 닫히고 다정은 쭈뼛거리며 그의 곁에 다가갔다.


“태상 씨…….”

팔뚝을 가볍게 잡는데 그가 제 손에서 팔을 슬쩍 빼냈다. 다정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그가 제 손길을 거부했다는 게 꽤 충격적이었다.


 
태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한쪽 벽면에 기대 섰다.


“말해. 거기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이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바라보는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고.


“…….”

다정은 울컥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걱정을 끼친 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외면을 할 건 없지 않은가. 비행기에서도 계속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는데 이건 해도 너무했다.

다정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화를 낼 건 없잖아요.”

“……뭐?”

“제가 아무 말도 안 한 건 태상 씨가 저 때문에 곤란해질까 봐였는데…… 이렇게 내내 무시하고, 화를 내는 건 너무해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가 보고 싶었다. 전화로 목소리를 들을 때는 그리워서 죽는 줄만 알았고.

그런데 다시 만난 그의 반응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미안함까지 겹쳐져 전전긍긍하는 제 마음을 몰라주는 그가 미웠다.


“나 보고 싶다면서요.”

다정이 슬쩍 그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또 빼내지는 않을까, 겁이 나서 팔은 만지지도 못했다.


“하…….”

푹 숙인 고개 위로 커다란 한숨이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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