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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재회 (79/89)


79. 재회
2023.07.02.


***

태상은 숨을 헐떡이며 터미널을 가로질렀다.

뱃속에 불안한 느낌이 휘몰아쳤고, 가슴은 불규칙하게 뛰었다. 다정이 다쳤다. 그 선명한 말 한 마디가 계속해서 귓가에 울렸다.

태상은 카운터 위치를 확인하려 대형 전광판 앞에 잠시 멈춰 섰다.

그때, 핸드폰이 옅은 진동을 토해냈다. 발신인은 김 비서였다.

태상은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말을 쏟아냈다.


“오늘 상하이로 향하는 AE0413편 승객 명단, 기내 안전 보고서, 승무원 명단. 뽑을 수 있는 건 모두 뽑아서 당장 보고해 주십시오.”

「네, 네?」

그저 상사의 행방을 물으려 전화를 했던 김 비서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저는 이제 출국합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사안은 이메일로 보내주십시오. 내일은 휴가 처리해 주시고요. 아, 그리고…….”

「자, 잠시만요! 부사장님, 이게 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 그러니까…….”

태상은 머리를 한번 가볍게 털며 정신을 집중했다.

이런 식으로 말을 전한다면 김 비서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태상은 평소의 냉철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AE0413편에 탄 승객 하나가 제 약혼녀를 다치게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누구 짓인지, 얼마나 다친 건지. 다 알아야겠습니다.”

「그…… 네. 알겠습니다.」

잠시 당혹스러운 탄성을 흘리던 김 비서가 이내 빠릿하게 답을 내놓았다. 약혼녀, 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안의 중요성이 껑충 뛰어 버린 거였다.


「항공편 예약은 어떻게 할까요? 지금 바로 알아보고 제가 연락을…….」

“제가 벌써 했습니다. 가장 빠른 거로.”

「비행 관련 정보는 확인되는 대로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내일 스케줄은…… 일단 최대한 비워보고 그래도 안 되면 휴가 처리 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태상은 전화를 끊고 바쁘게 전광판 안을 훑었다. 편명에 따른 해당 체크인 카운터와 위치가 화면에 가득했다.

숫자와 영어로만 이루어진 간단한 표. 하지만 아무리 봐도 뭐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게 없었다.

태상은 거칠게 머리를 헝클며 숨을 내쉬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 정도의 불안, 이 정도의 고통. 다정을 향한 제 마음은 정상 범위를 훌쩍 넘어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카운터 위치를 확인했다. 미친 사람처럼 뛰고, 또 뛰고. 간신히 게이트에 다다른 그는 무너지듯 대기석에 앉았다.

머릿속은 어느새 다정으로 가득했다. 태상은 손바닥 위로 무너지듯 이마를 기댔다.

순간,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다정을 제 품에 넣고, 제 손으로 만지기 전까지 이 고통은 끝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마를 거칠게 문지르며 고개를 드는데 김 비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태상은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말씀하시죠.”

「부사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습니다. 오늘 자로 등록된 AE0413편 기내 안전 보고서에 난기류 발생으로 인한 경미한 사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승객의 짐을 대신 내려주는데 그때 비행기가 흔들리면서 승무원이 손목을 다쳤다고요. 그리고 그 승객분은…….」

“강선재.”

태상이 씹어뱉듯 말했다.


「네. 대성 기획 강선재 본부장입니다.」

“더 확인되는 사항 있습니까?”

「네. 강선재 본부장은 전부터 불만을 많이 접수한 고객이라 혹시나 하고 기내 서비스 보고서를 확인해 보았는데…….」

“그런데요.”

「출발 전, 승무원이 짐을 올리지 않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비행 내내 개인 짐을 담당하게 한 것 같습니다.」

김 비서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부사장님, 이런 말씀 드리기는 뭐 하지만…….」

“말씀하세요.”

「강선재 본부장님께서 일부러 비행편을 바꾸신 내역이 확인됩니다. 원래는 내일 밤 비행기로 귀국하실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내일 오전 비행, 그러니까 한다정 승무원이 운항하는 비행 편으로 예약을 바꿨습니다.」

「…….」

「부사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아, 네. 제가 뭐 더 도와드릴 일은 없을까요?」

“괜찮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할 일입니다.”

「네. 그럼,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

전화를 끊은 태상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저를 건드리는 건 괜찮지만 다정을 건드리는 건 절대 봐 줄 수 없다. 으득, 이가 갈리면서 입가가 일그러졌다.

이번에는 아주 끝장을 내어 줄 것이다. 그런 다짐을 하는데 탑승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크게 울렸다.


“지금부터 타이베이로 향하는 GR301편 탑승 수속을 시작하겠습니다. 퍼스트 클래스와…….”

태상이 망설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다정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선재가 저 탑승교 너머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을지.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제 곁에 딱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사무장의 눈초리도 부담스러웠다.

다정은 불편한 오른손을 대신해 왼손으로 음료를 따랐다. 어제 선재가 즐겨 마셨던 사과 주스였다.

그때, 멀찍이서 다가오는 선재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가방 가지고 장난을 칠 마음이 없는지, 그는 쇼핑백 하나만 가볍게 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탑승구에 선 다정은 침착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는 고갯짓으로 까딱 인사를 받으며 기내로 올라섰다.

그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다정에게 내밀었다. 열린 틈 사이로 초콜릿과 쿠키가 보였다.


“…….”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가 다정을 향해 싱긋 웃었다.


“어제 다치신 게 마음에 걸려서요. 간식 좀 샀어요.”

“……감사합니다.”

다정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맛있게 먹어요. 제일 비싼 거로 골랐으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발 끝이 향하는 곳은 사무장이 있는 갤리 안이었다.

다정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졌다.

도로 가져가라고 하고 싶은데. 사과를 뭐 이런 식으로 하냐면서 쏘아붙이고 싶은데.

승무원이라서, 태상의 여자친구라서, 효성의 며느리가 될 사람이라서. 너무 여러 가지 이유로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하…….”

조용히 한숨을 내쉰 그때.

갑자기 손바닥 안이 휑해지더니 봉투가 빠르게 제 손에서 벗어났다.

퍼뜩 고개를 든 다정은 놀라 그대로 숨을 집어삼켰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태상이었다.


 


“태, 태상…… 부사장님.”

단정치 못한 머리며 지친 듯한 얼굴. 그는 꽤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언뜻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해, 다정은 살짝 긴장했다.

그는 새카만 눈동자로 다정을 천천히 훑었다. 꼼꼼히, 구석구석. 눈으로 전부 확인을 한 후에야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릴 듯, 말 듯 아주 가느다란 숨소리였다.


“여, 여긴 어떻게…….”

다정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무언가 설명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데 태상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는 다정의 손끝을 아주 살짝 잡았다. 손톱 끝만 겨우 감싼 느낌. 다정은 놀라 그의 안색을 살폈다. 무겁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무언가를 꾹 참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

문득, 그가 쥐고 있는 게 제가 다친 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혹시 무언가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의아한 생각이 드는데 태상이 쥐고 있던 손끝을 놓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곁을 지나쳤다. 잔뜩 굳어진 옆얼굴에서 싸늘한 분노가 느껴졌다.

뚜벅뚜벅, 묵직한 걸음이 선재에게 향했다.

선재는 사무장과의 대화에 여념이 없었다.

중국이 얼마나 발전 속도가 느린 나라인지, 시민 의식이 떨어지는 사람들과 함께 사업을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불평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태상을 먼저 발견한 사무장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선재는 무슨 일인가 싶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퍽!


“아!”

울퉁불퉁한 쇼핑백이 그의 가슴팍에 냅다 꽂혔다. 태상은 봉투 위를 꾹 누르며 짓이기듯 손바닥을 비볐다. 선재는 허둥거리며 쇼핑백을 끌어안았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울컥 소리를 내지르던 선재의 눈이 쏟아질 듯 커다래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멍하니 벌렸다.


“너, 네가 여긴 왜…….”

“이딴 거 안 받아. 너나 먹어.”

“뭐?”

“안 먹는다고.”

태상이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그를 노려봤다.

선재는 당황한 듯 쭈뼛거리다가 이내, 어깨를 쭉 펴고 섰다.

제 딴에는 그게 강해 보이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비실비실한 상체가 더 강조될 뿐이었다.

그는 턱을 한껏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기껏 좋은 마음으로 사다 줬더니, 하여간 싸가지 하고는.”

“…….”

태상은 느릿하게 발을 떼며 그와의 거리를 한층 더 좁혔다. 전신에서 흘러내린 사나운 기색이 바닥에 검고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좋은 마음.”

“그, 그래.”

“사람을 다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좋은 마음이라.”

선재가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시선을 돌리며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 그건……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야. 갑자기 비행기가…….”

“강선재.”

태상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묵직하게 말했다. 재킷이 손가락 모양에 맞춰 움푹 들어가는 게 태상이 손끝에 잔뜩 힘을 싣고 있는 것 같았다.


“넌 네가 한 짓에 대해서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아주 혹독하게.”

“……뭐?”

“지긋지긋하다 싶을 만큼 많이, 언제 끝나나 싶을 정도로 길게.”

“야, 차태…….”

“물론, 너희 할아버지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철저히 너 혼자 감당하게 만들 거니까.”

“…….”

저를 바라보는 태상의 눈동자가 찢어 죽일 듯 사나웠다.

선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원래 집요하고 서늘한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막 나가는 녀석은 아니었다.

의아한 시선이 태상에게 향했다.


“너 도대체 왜…….”

“당장 네 자리로 꺼져.”

태상은 그의 말을 끊으며 재킷 안 주머니에서 티켓 하나를 꺼냈다. 선재의 이름이 적힌 이코노미 클래스 보딩패스였다.

그걸 본 선재의 눈썹이 왈칵 구겨졌다.


“뭐야. 네가 뭔데 내 자리를 맘대로 바꿔?”

“마음대로가 아니라, 규정대로야.”

태상이 사무장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시선을 받은 창진은 움찔하며 눈을 굴렸다. 잠시 후, 제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는 바삐 업무용 태블릿 PC를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리자 오늘의 비행 정보가 액정 위로 떠올랐다.


“이, 이게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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