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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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보고 싶다
2023.06.29.
“하, 도구? 사람 잘 못 봐도 한참 잘 못 봤어요.”
남자가 입꼬리를 삐딱하게 뒤틀며 말했다.
에어 코리아에 뒤진다고는 하나, 유진 항공은 시장에서 30년 넘게 버텨온 강자였다. 남의 회사 정보나 캐내야 할 정도로 밑바닥은 아니었다.
그는 반쯤 남은 정종을 입에 탁 털어 넣었다.
“오늘 만남은 없었던 거로 합시다. 내가 이 정도로 싸구려는 아니라서.”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명옥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았다.
“업계 4위인 한성이 우리한테 넘어오면 유진은 뭐 할 겁니까? 우리가 망하기를 기도라도 할 거예요?”
“…….”
“안 그래도 유진 그룹에서 돈 먹는 하마 소리 듣는 게 항공업인데 여기서 주가 더 떨어지면 회장님 뵐 낯은 있겠어요?”
“쓸데없는 참견입니다.”
정곡을 찔렸는지 남자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고집부리지 말고 받으세요. 여기서 실적 더 떨어지면 그땐 경영권이고 뭐고 동생들한테 다 넘어갈 판이잖아요.”
“…….”
순간, 남자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시선이 슬금슬금 서류 쪽으로 향하는 게 아무래도 구미가 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데도 덥석 물지 못하는 건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 것 같았다.
명옥은 적당히 그의 기를 살려주기로 했다.
“물론 저도 나중에 저도 상무님의 도구가 되어드릴 테니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시고요. 상부상조, 기억하시죠?”
“하, 그 대단한 효성의 며느님이 내 도구가 되시겠다.”
흥미롭다는 듯한 눈빛이 명옥에게 향했다. 명옥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이번 일만 잘 해 주시면 얼마든지.”
“좋아요. 들어나 봅시다. 원하는 게 뭡니까.”
남자가 체념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이번 합병 기자 간담회에서 우리 회사 얼굴에 먹칠 좀 해 주세요.”
***
호텔에 도착한 다정은 제일 먼저 태상에게 전화를 걸었다. 힘든 하루의 끝에 유독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신호음이 단 두 번 울리고 그가 전화를 받았다.
「잘 도착했어?」
핸드폰 옆에서 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다정은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 지금 호텔이에요.”
태상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원래 과묵한 남자이니 조금 기다려 볼까 싶은데,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보고 싶다.」
“…….”
「너무 보고 싶어.」
마치 그것밖에 생각나는 말이 없는 사람처럼 그가 맥락도, 순서도 없이 읊조렸다. 어딘지 투박하면서 진심 어린 고백. 다정은 그의 그런 방식이 좋았다.
“저도요. 오늘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스케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자유롭게 해외를 여행하는 제 직업이 이렇게 싫었던 적이 없었다. 다정은 쓰린 마음을 느릿하게 흘렸다.
그러자 핸드폰 저편에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만두게 할 생각은 없지만…….」
“……?”
「사표 하나는 정말 잘 수리해 줄 수 있어.」
“풉.”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져 나왔다. 남자친구에게 사표를 낸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흔한 그림은 아닐 것 같았다.
풀썩. 다정은 침대 위에 누워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니 오늘 비행 중에 진심으로 웃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는데 태상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무슨 일 있어?」
“아, 아뇨…….”
다정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물적인 감이 뛰어난 남자이긴 하지만 짧은 대화 몇 마디로 제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왜요?”
「오늘은 아무 얘기도 안 했으니까. 비행이 어땠는지.」
“아…….”
다정은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몰랐다. 제가 일이 끝난 후 비행 이야기를 그렇게 습관적으로 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당연히 그랬을 것 같기도 했다.
어려운 전문 용어, 복잡하고 특수한 배경. 무엇 하나 따로 설명해야 할 것이 없으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을 것이다.
다정은 설핏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몰랐어요. 비행 얘기를 맨날 그렇게 한 줄은.”
「재미있었어.」
“임직원으로서의 책임 같은 건 안 느꼈고요? 개선할 사항에 대해서?”
다정이 옆으로 돌아 누우며 말했다. 귓가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스쳤다.
「느꼈어. 그러니까 더 얘기해 봐. 더 잘하게.」
“음…… 오늘 비행은요…….”
다정이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천천히 말을 늘였다.
만약 오늘 일을 태상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스케줄을 조정해 저를 비행에서 빼고, 선재가 다시는 제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할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별거 아닌 일. 하지만 그 여파는 분명 엄청날 것이다.
대성 일보와의 마찰, 진행 중인 광고 프로젝트의 무산, 양가의 감정 격화.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였다.
물론, 제가 모르는 이면에 더 많은 연결고리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다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늘 일은 그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를 믿고 이 관계에 완전히 뛰어들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래도 이건 상황이 달랐다. 자칫 잘못했다간, 그가 곤란한 상황에 빠질지도 몰랐다.
“오늘 비행도 좋았어요. 평가 비행이라 조금 힘들긴 했는데 그래도 괜찮았어요. 손님도 한 분밖에 안 타서 일이 많지 않았고.”
다정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평가 비행이면 힘들었겠네.」
“조금 그렇기는 했는데 사무장님이 워낙 유쾌한 분이라 괜찮았어요.”
다정은 제게 눈을 부라리던 창진의 모습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는 호텔로 향하는 버스에서 내내 잔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내일 비행에서는 정말 잘 해야 한다고. 오늘 실수를 만회해야 한다고.
다정은 내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눈물을 꾹 참고 있는 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편으로 일하는 동료에게서 듣는 타박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태상 씨는요? 태상 씨는 회의 잘 했어요?”
다정이 가벼운 목소리로 화제를 돌렸다.
「잘 했지. 승무원들의 복지 증진을 위해 의견을 냈으니까.」
다정은 풉, 하고 가볍게 웃었다.
무뚝뚝하기만 한 태상이 요즘 들어 이렇게 농담을 하곤 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일 때마다 다정은 가슴이 녹는 것처럼 좋았다.
마치 네가 날 이렇게 바꾸어 놓았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다정은 느릿한 숨을 길게 뽑아냈다.
“태상 씨…….”
「응?」
“저 얼른 집에 가고 싶어요.”
「……나도. 나도 얼른 널 데리러 가고 싶어.」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부드럽게 채웠다.
이거면 됐다. 다정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소중히 부여잡았다.
***
커다란 통유리창이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시간.
전화를 끊은 태상의 눈매가 부드러웠다.
다정이 돌아오면 뭘 할까.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여 줄까. 아니면, 전부터 관심 있어 하던 커플 파자마를 같이 주문할까.
아직 하루가 다 가지도 않았는데 다정과 함께하는 내일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그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그때, 쿵쿵 두드리는 듯한 노크 소리가 사무실 안에 울렸다.
멧돼지가 문을 들이받는 것 같은 소리. 제가 아는 한 이렇게 노크를 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태상은 아무 말 없이 그냥 문을 바라봤다. 어차피 제 허락이 없어도 들어올 미연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태상, 나 왔다.”
미연이 문을 벌컥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와인색 7부 재킷에 와이드 팬츠가 또렷한 그녀의 이목구비와 퍽 잘 어울렸다.
태상은 가볍게 눈동자를 밀어 올렸다. 또 왜, 라는 말이 표정에서 흘러나왔다.
미연은 소파 중앙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이리 와 앉으라는 듯 테이블 앞을 톡톡 두드렸다. 입가에 걸린 시원한 미소에서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태상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 멀쩡히 잘 될 텐데.”
“알아. 근데 왜 굳이 왔겠냐.”
“…….”
그녀가 말을 이어보라는 듯 눈을 반짝였지만 태상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미연은 쯧, 하고 혀를 차며 제 질문에 스스로 답을 했다.
“얼굴이지. 네 놀라 자빠지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직접 왔지. 바쁘신 내가.”
“그럼 얼른 해.”
태상이 느릿하게 소파 위에 앉으며 말했다. 덤덤한 표정에서 딱히 기대되는 건 없는 듯싶었다.
“비싸게 굴기는.”
“내 시간이 조금 그런 경향이 있어.”
태상이 입꼬리를 가볍게 휘며 말했다.
서늘한 얼굴 탓에 꽤 거만하게 보였지만 미연은 그다지 화가 나지 않았다. 이게 그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친근한 태도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소파 앞으로 몸을 바짝 당겨 앉았다.
“너…… 요즘 연애한다며? 그 결혼한다는 사람이랑. 진짜 연애.”
“맞아.”
태상이 순순히 답했다.
“어떤 사람이야?”
“그게 우리 계약과 무슨 상관이지?”
태상이 단정하던 눈썹을 미세하게 찌푸렸다.
서로 물고, 뜯고, 그러다 덮어주는 기업 간의 뒷얘기. 그런 이야기가 펼쳐지기 앞서 다정을 언급한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편하고 불길했다.
“일단 말해 봐. 아니, 일단 대답해 봐. 착하고 순한 성격이지?”
“강미연.”
태상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붉은 석양이 타는 듯이 지글거렸다.
“내가 참을성이 뛰어나긴 한데.”
“…….”
“한다정은 예외야.”
미연은 조금 놀란 듯 태상의 얼굴을 바라봤다.
태상이 여자 때문에 이렇게 민감하게 구는 것도, 제게 이렇게 성난 얼굴을 보이는 것도. 모든 것이 다 낯설고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얼떨떨한 얼굴로 태상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네 여자 친구가 조금 곤란한 일을 겪었거든. 앞으로도 겪을 거고.”
“뭐……?”
순간, 태상의 눈동자가 우뚝 멈췄다.
“다정 씨한테 무슨 얘기 들은 거 없어?”
“……없어.”
목을 긁는 듯한 쇳소리가 느릿하게 나왔다. 미연은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엉망으로 구겨진 얼굴에서 그가 느끼는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
“…….”
무슨 큰 사고를 당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금 곤란한 일을 겪었다고 말했을 뿐인데.
아무래도 태상을 진정시키려면 상황을 이해시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미연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선재 오빠 때문에 그래. 오빠가 오늘 다정 씨랑 같은 비행기에 탔는데 해코지를 한 모양이더라고.”
“해……코지?”
태상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응. 우리가 파혼한 걸 다정 씨 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자세하게…… 말해.”
꽉 물린 잇새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힘을 세게 주었는지 목 근육마저 팽팽히 일어섰다.
“두 사람 전에 구내식당에서 한 번 마주친 적이 있대. 오빠가 광고 기획 건으로 너네 회사 방문했을 때.”
“…….”
“그때는 실수인 척 국을 엎었고, 오늘은 다정 씨를 좀 다치게 했다네? 손목을 삐끗했다나……? 진짜 우리 오빠지만 내가 다 창피하다.”
“…….”
태상은 석상처럼 굳어져 간신히 숨만 내쉬었다. 뻣뻣한 얼굴에서 유일하게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건 잘게 떨리는 눈동자뿐이었다.
그는 날아가는 이성을 간신히 붙잡았다.
순간, 속삭이는 듯한 다정의 음성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오늘 비행도 좋았어요.’
그 말을 하기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데이고, 다치는 동안 마음은 얼마나 상했을까.
아팠을 다정을 떠올리자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태상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일을 벌인 선재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아무튼 자세한 건 오늘 등록된 너네 보고서 확인해 봐. 기내 안전 보고서랬나? 나도 수빈이한테 들은 거라…… 야, 야, 차태상!”
미연이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 태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빠르게 튕겨 나가는 모습이 마치 출발선에 선 경주마 같았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거칠게 집어 들고 미친 사람처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가야 할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