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그 남자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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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그 남자의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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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그 남자의 복수
2023.06.25.
“……!”
다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임자 있는 남자라니. 그건 태상을 가리키는 말이 분명했다. 그리고 말하는 투로 보아 제가 태상을 꾀어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고.
다정은 뻣뻣이 굳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는지, 멀찍이서 바라보던 사무장이 빠르게 곁으로 다가왔다.
“사무장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 무언가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선재는 날카로운 말투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더니 제게는 하지 않았던 말을 덧붙이며 갑자기 상황을 제게 유리하게 끌고 갔다.
“수화물로 부쳐야 한다는 거 누가 모르나요. 하지만 에어 코리아 수화물 서비스가 워낙 엉망이니까 제가 굳이 가지고 들어온 거 아닙니까. 짐을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그러셨군요. 죄송합니다.”
“중요한 서류가 있어서 굳이 들고 탔다고 말을 하는데도…….”
선재가 고개를 살살 저으며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사무장은 그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췄다. 그러곤 마음을 다해 사과의 말을 올렸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짐은 제가 넣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 다시 내려야 할 일이 있거든 편하게 불러주시고요.”
“네. 그러죠.”
“죄송합니다…….”
상급자가 사과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정은 그를 따라 함께 허리를 굽혔다.
선재는 그 모습을 느릿하게 훑었다. 만족스러움이 눈동자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가방을 넣고 난 후, 사무장은 다정을 매섭게 노려봤다. 따라 들어오라는 메시지가 선명하게 읽혔다.
그를 따라 들어온 갤리, 사무장은 주변의 눈치를 휘휘 살폈다. 매니저 승무원을 찾고 있는 듯했다.
다행히 그녀는 탑승교에서 지상직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라는 듯, 사무장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기가 찬다는 눈동자로 다정을 쏘아보았다.
“한다정 씨! 지금 제정신이야? 오늘 잘해보자고, 잘 좀 부탁한다고 말한 게 고작 오 분 전이에요, 오 분 전. 근데 지금 이게 잘하는 거예요? 네? VVIP 가방 내팽개치는 게?”
“사무장님, 그런 거 아닙니다. 정말 그렇게 된 일이 아니에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지도 않고, 듣고 싶지도 않아요. 그런 얘기는 일기장에다가 쓰시고 지금부터는 무조건 승객이 시키는 대로 해요. 절대 말대답하지 말고, 해달라는 거 다 해 주고, 알겠어요?”
그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 채 빠르게 말했다. 평소 이 정도로 예민한 사람은 아닌데 평가를 받는 중인지라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다정은 억울한 마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알겠습니다.”
묵직한 한 마디가 꼭 맞잡은 두 손 위로 내려앉았다. 가뿐하게 다녀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기대가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
-띵.
다정은 석고상처럼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이 도대체 몇 번째일까. 스무 번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다정은 콜 벨을 세는 것을 포기했다.
비행 내내 선재는 온갖 트집을 다 잡았다.
커피를 내어 가면 너무 뜨겁다, 다시 내어 가면 이번엔 또 너무 차갑다. 비죽비죽 웃으며 불만을 제기하는 얼굴이 꽤 즐거워 보였다.
다정은 치미는 화를 꾹꾹 누른 채 기내로 향했다.
그저 이 비행이 빨리 끝나기를, 강선재라는 태풍이 빨리 지나가기를. 머릿속에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뭐 필요하신 거 있으십니까?”
다정이 이미 수차례 반복한 말을 되풀이하며 물었다.
“네. 미안하지만 짐 좀 내려주시죠?”
“짐……이요.”
지상에서의 소동이 다시금 떠올랐다. 똑바로 하라며 눈을 부라리던 부사장, 남의 남자를 빼앗았다며 비아냥거리던 선재. 순간,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네. 검토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선반을 향해 손을 뻗는데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아까 사무장님하고 이것저것 얘기를 나누다가 알게 됐는데…….”
“네…….”
불길한 예감이 목덜미를 싸하게 감싸고 지나갔다.
“내일 우리가 또 같은 비행기를 탄다고 하더라고요? 인연이 참 깊죠?”
“…….”
다정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오늘 하루만 잘 참으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눈앞의 터널이 갑자기 두 배로 길어진 느낌이었다.
“뭐 해요? 짐 안 내리고?”
굳어진 얼굴로 서 있는데 선재가 가볍게 재촉을 해왔다. 다정은 흐릿한 목소리로 답하고 겨우 다시 손을 움직였다.
달칵, 머리 위 선반을 열자 검은색 트롤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가방의 아래를 받쳤다.
힘을 주어 가방을 당긴 그때, 갑자기 비행기가 갑자기 격하게 요동쳤다.
“앗!”
다정은 가방 아래를 받치고 있던 손을 빼 급히 선반을 잡았다. 바닥이 정신없이 흔들리는데 반쯤 빠져나온 트롤리가 빠르게 미끄러져 내렸다.
다정은 온 힘을 다해 손잡이를 받쳤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진 가방을 한 손으로 막는 건 쉽지 않았다.
‘쿵.’
다정은 몸을 잔뜩 움츠려 충돌을 피했다. 둔탁한 울림과 함께 가방이 바닥에 떨어지는데 간담이 다 서늘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얼굴을 부딪쳤을 거였다.
떨리는 숨을 간신히 고르는데 비행기가 또다시 흔들렸다. 다정은 트롤리를 잡고 있던 손으로 좌석 도어를 짚었다.
“아!”
팔목 안쪽이 욱신거리더니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가방을 한 손으로 막아보려 할 때 손목이 뒤로 꺾이는 것 같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근육을 다친 것 같았다.
다정은 간신히 균형을 잡고 서서 선재를 바라봤다. 혹시 어디 다치지는 않았나 싶어서였다.
“다친 데는 없으세요?”
“뭐, 뭡니까? 난기류가 있으면 있다고 미리 안내 방송을 해야지. 하여간 이놈의 항공사는 제대로 하는 게 없어.”
선재는 기다란 다리를 한껏 웅크린 채 눈알을 굴렸다. 팔로 양어깨까지 감싸고 있는 게 제 몸을 아주 알뜰히도 살피는 것 같았다.
“방금 내가 가방 내렸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키가 커서 캐리어에 머리 맞았을 거 아니야.”
“…….”
“가서 사무장 불러와요. 한마디 해야지, 이거 안 되겠어.”
사람이 다칠 뻔했는데 한다는 소리가 고작 그거라니. 게다가 자기 짐을 내려주다 다칠 뻔한 건데.
다정은 울컥 치미는 화를 간신히 참았다. 지금 챙겨야 할 건 제 감정이 아니라 손님의 안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정말 얄미운 손님일지라도.
“……안전벨트 매 주십시오.”
다정은 그 한 마디만을 남긴 채 몸을 돌렸다.
기내에는 아직도 잔잔한 흔들림이 남아 있었다. 난간과 선반을 잡으며 조심히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선재가 불평에 찬 말을 쏟아냈다.
“불러오라는데 왜 대답이 없어요? 이봐요, 한다정 승무원.”
다정은 자리에 우뚝 서 고개만 돌렸다. 눈동자에 힘이 실려 있었지만 얼굴은 차분했다.
“손님, 안전벨트 표시등 켜진 거 보이시죠?”
“보이긴 하는데…….”
“이 사인은 승객뿐 아니라 승무원에게도 적용됩니다. 저는 지금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사무장님도 객실로 나오실 수 없습니다. 저희 안전도 손님들의 안전만큼 중요하니까요.”
바닥이 흔들리는데도 다정의 눈빛은 올곧기만 했다.
***
청담동에 위치한 한 일식집.
밥을 먹기에는 다소 애매한 시간, 식사가 목적이 아닌 명옥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깔끔한 투피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손에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발끝이 향하는 곳은 식당 가장 끝,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방이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자 벌써 차려진 일식 가이세키 정찬이 그녀를 맞이했다.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음식은 안타깝게도 젓가락질 한번 당해보지 못한 듯싶었다.
명옥은 미리 와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서늘하게 빛나는 무테안경, 그 안으로 보이는 무미건조한 눈동자. 30대 후반의 남자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명옥을 바라봤다.
“연락받고 놀랐습니다.”
“별수 있나요. 상황이 상황이잖아요.”
“상황이 상황이다…….”
남자가 말끝을 늘이며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채웠다. 자그마한 술잔에 투명한 액체가 금세 가득 차올랐다. 그는 한입에 탁 털어 넣듯 마시고 말을 이었다.
“회사고 뭐고 차태상한테 다 넘어가게 생긴 상황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 화법이 다소 직설적이시네.”
명옥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예요.”
그녀는 술을 채우고, 빠르게 입안에 털어 넣었다.
“우리 상부상조해요.”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여기요.”
직접 눈으로 보라는 듯, 명옥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남자는 의심쩍다는 얼굴로 명옥과 봉투를 번갈아 봤다.
그러자 명옥이 서류를 더 가깝게 내밀며 다시 말했다.
“시간 낭비 싫어하신다면서요. 직접 보세요.”
“…….”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봉투를 열었다. 그의 손에 딸려 나온 서류 맨 첫 장에는 ‘한성 한공 인수 합병 방안 및 세부 경영 계획서’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남자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자기 회사 망하라고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이걸 왜 날 줍니까? 만년 2등 항공사 사장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예요. 뭐예요?”
남자가 서류를 식탁 위에 던지듯 놓으며 말했다.
명옥은 서류를 잘 정리해서 다시 봉투 안으로 넣었다. 얼마 전, 부사장실로 발령이 난 비서를 포섭해 어렵사리 구한 소중한 자료였다. 물 한 방울도 묻힐 수 없었다.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고사라뇨. 말씀이 너무 심하시네요. 저는 그냥 서로 도우면서 살자는 것뿐인데.”
“서로 돕는 게 아니라 아들 등에 칼을 꽂는 거겠죠. 그것도 자기 손은 안 더럽혀가면서.”
“뭐, 부정은 하지 않을게요. 도구가 있으면 쓰는 게 좋은 거니까.”
명옥이 술병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녀는 얼마 전 크게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제가 직접 나서지 않고도 태상을 밀어낼 방법이 있다는 거였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선재를 통해 배운 방법이었다.
그는 어이없을 만큼 쉽게 저를 이용해 먹었다. 손 하나 대지 않고 깔끔하게 코를 풀었으며, 만족스러운 결과까지 얻었다.
그건 그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욕심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명옥은 분명 저도 주변에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만년 2등 항공사 유진 항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