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딱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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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딱 걸렸어
2023.06.22.
「너는 자존심도 없냐? 전 국민 앞에서 대대적으로 차여 놓고 아직도 차태상을 돕고 싶어? 그것도 딴 여자랑 바람피운 놈을?」
“걔 바람피운 거 아니다.”
미연이 이를 꽉 깨물고 말을 흘렸다.
「아니긴. 약혼 깨고 돌아서자마자 결혼을 하겠다는데 그게 바람이 아니면……. 그리고 그 여자도 그래. 결혼할 상대 있는 거 뻔히 알면서 만난 거 아니야.」
“하…….”
「부사장도, 승무원도 어쩜 그렇게 똑같은지. 에어 코리아가 아니라 불륜 코리아 아니냐?」
“어…… 그래서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기사를 내셨어요? 내가 태상이한테 차인 게 열이 받아서?”
「야, 그건 내가 한 거 아니라니까 너는 왜 자꾸 생사람을 잡냐.」
“아니긴, 등 터져 죽은 새우가 웃겠다. 내가 지금 그거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을 하는데.”
한심하다는 듯 미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할아버지 말씀은 적당히 무시해.」
“네, 네. 속 편한 말씀 감사…….”
그때, 영어 안내 방송이 언뜻 귓가에 스쳤다. 게이트 앞에 줄을 서라는 내용으로 보아 아무래도 그는 지금 공항인 듯싶었다.
“오빠, 지금 어디야? 공항이야?”
「응. 상하이 출장 가는 길.」
“위드 무비 투자 건 때문에? 그거 안 가도 된다며?”
「그렇게 됐다. 에효……. 그놈들 사람 못 믿는 근성은 하여간 알아줘야 한다니까. 꼴랑 사인 하나 하러 상하이까지 오란다.」
선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탑승교를 통과하는지 그의 말소리가 조금 울렸다.
「아무튼 내 얘기는, 기사 자꾸 내리고 그러지 말라 이거야. 너도 이제 네 주관대로…….」
“…….”
전화 너머가 묘하게 조용했다. 혹시 전화가 끊겼나 싶어 액정을 확인하는데 통화는 멀쩡히 연결되어 있었다.
미연은 핸드폰을 다시 뺨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오빠?”
「하.」
기가 찬다는 듯한, 아니 조금 기쁜 듯한 탄성이었다. 미연은 의아한 듯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차수빈 때문에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뭐?”
「응?」
“방금 뭐라고 하지 않았어? 수빈이가 어쩌고?”
「아니, 내가 걔를 왜 찾아.」
“…….”
출장 가기 싫다고 징징대던 게 불과 1분 전인데.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가벼워져 있었다.
미연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아무튼 잘 다녀와.”
「말 안 해도 잘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뭐……?”
「별거 아냐. 이제 비행기 타야겠다. 끊어.」
“응.”
통화가 끝난 후, 미연은 골똘한 얼굴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수빈이 때문에 뭘 못 했다는 걸까. 애초에 사이가 안 좋은 두 사람이 따로 만났을 리도 없는데.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쳤다. 뭔진 모르지만 수빈이 선재를 막았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미연은 재빨리 수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멍청한 오빠의 사고를 수습하는 건 한 번에 하나로 족했다.
***
상하이로 향하는 비행기 안.
다정은 가뿐한 마음으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늘 비행은 두 시간의 짧은 업무를 마치면 열두 시간의 체류까지 주어지는 일정이었다. 대부분의 승무원이라면 환영할 만한 스케줄. 하지만 다정은 오늘의 체류가 반갑지 않았다.
싸늘한 호텔 방에 태상은 없기 때문이었다.
요즘, 태상과의 관계는 한껏 가깝고, 뜨거워져 있었다.
함께 밤을 보내고 난 다음 날, 다정은 그의 품에서 어슴푸레 밝아오는 아침을 맞았다. 등허리를 감싼 따스한 손이 느껴지는데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개인적인 사유로 오늘은 나갈 수 없다고, 휴가를 내야 할 것 같다고. 태상은 잠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다정은 설핏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이불 아래 반쯤 드러난 각진 어깨며 흐트러진 앞머리가 더할 나위 없이 관능적이었다.
그 후, 다정은 침대 안에 꼬박 하루를 갇혀 있었다.
안고, 또 안고. 길었던 인내를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건지, 태상은 집요한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피부가 다 헤지는 건 아닐까, 그의 품에서 이대로 뭉개져 없어져 버리는 건 아닐까. 낮인지, 밤인지 분간도 할 수 없는 시간 속, 느껴지는 거라고는 뜨거운 그의 체온뿐이었다.
다정은 그가 주는 감각을 충실하게 받아들였다.
문득 문득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고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면, 붉게 달아오른 그의 눈동자와 눈이 맞았다. 새까만 두 눈이 터질 듯한 욕망으로 잔뜩 일렁였다.
선명하고 자극적인 그 눈빛이 너무 강렬해 다정은 다시금 눈을 감았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그에게 안겨 있던 시간. 그가 저를 놓아주었을 땐 제 몸의 경계가 어디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다정 씨, 오늘 잘 좀 부탁해요.”
멍하니 손을 놓고 서 있는데 사무장의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고개를 홱 돌리자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가늘게 휘어진 눈매가 조금 능글맞았다.
“오늘 퍼스트에 탑승하는 승객, 스텝 티켓(항공사 직원과 지인이 이용할 수 있는 할인 티켓)이라 편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VVIP더라고……. 알죠? 잘 해요. 나 진짜 부탁 좀 할게요?”
“네…….”
말의 숨은 뜻을 알아들은 다정이 어색하게 답했다.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창진 사무장은 오늘 첫 평가 비행을 앞두고 있었다.
매니저급 승무원이 함께 탑승해 사무장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비행. 인사 고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라 그는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다.
창진이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정 씨 평판 좋은 거야 내가 잘 아는데, 그래도…… 조금만 더 신경 좀 써 줘요. 자기 평가 비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네.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환히 웃으며 그를 안심시키는데 탑승교 너머에서 남자 승객 한 명이 걸어왔다. 키가 굉장히 크고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다정은 손님을 맞기 위해 탑승구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는 벌써 한껏 가까워져 있었다.
“어서…….”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반기려는 순간, 다정의 입가가 그대로 굳었다.
하루에 상하이로 출발하는 비행기가 몇 대인데, 왜 굳이 이 비행편에.
선재를 바라보는 다정의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넘쳤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정은 빠르게 표정을 정리하고 그를 바라봤다.
“어서 오십시오. 탑승을 환영합니다.”
인사를 마치고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와 정면으로 시선이 맞았다. 선재의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다정은 시선을 차분하게 내리깔았다. 이다음에 그가 뭐라 말하는지에 따라 제가 누구인지 결정이 날 것 같았다. 승무원인지, 분풀이 대상인지.
긴장으로 손끝이 말려들었다.
“……역시 내가 운이 좋아.”
“…….”
“지난번엔 좀 아쉬웠는데.”
순간, 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두 시간이 채 안 되는 비행은 영화 한 편 다 보지 못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지만 한 사람을 괴롭히기엔 충분했다.
또 국으로 범벅이 되는 걸까. 절로 얼굴이 어두워지는데 선재가 피식 웃었다. 그는 트롤리를 끌며 한 손으로 보딩 패스를 대충 내밀었다.
“자리, 어딥니까.”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다정은 공손히 티켓을 받아들었다. 그는 그 모습을 즐거운 듯 바라보다 이내 걸음을 옮겼다.
좌석 앞에 도착한 다정은 이쪽이라는 듯 공손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는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가볍게 입을 열었다.
“오늘 퍼스트 이용 승객은 나 혼자라던데……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거 잘됐네. 부를 때마다 안 미안해해도 되니까.”
“…….”
다정의 표정은 담담했다.
괜히 반응을 보여서 그를 즐겁게 해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는 일터고 그에게 허락할 수 있는 모습은 공적인 부분뿐이다.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요. 고마워요.”
그는 목을 빳빳이 세운 채 눈동자만 힐끗 내렸다. 고개를 끄덕여주는 정도의 인사도 하기 싫다 이거였다.
다정은 허리를 단정히 굽히고,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디 가요?”
“네?”
다정이 다시 몸을 돌렸다.
“이거, 넣어주고 가셔야지.”
그가 기내 복도에 놓인 트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썩이는 한쪽 입꼬리에서 꽤 노골적인 즐거움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그는 제 본심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다정은 차분한 얼굴로 그의 앞에 섰다.
“손님, 개인 짐은 각자 수납하는 게 원칙입니다. 죄송하지만 여기 선반 안에 직접 넣어주시겠습니까?”
“아…… 알죠. 각자 넣어야죠.”
선재가 느긋하게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제가 얼마 전에 테니스를 치다가 어깨를 다쳐서 말이죠. ……이 위로는 팔이 안 올라가요.”
그가 오른쪽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말했다. 물론, 고통스러운 듯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도 잊지 않았고.
“부탁드릴게요.”
승무원은 몸이 아프다고 말하는 승객을 외면할 수 없다. 선재는 예외가 되는 지점을 아주 영악하게 파고들었다.
“…….”
짐을 대신 넣어주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허리 한 번 굽히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능글맞은 미소를 보고 있자니 고집스러운 마음이 솟았다.
다정은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손님, 선반에 짐을 넣으실 수 없는 상황이라면 체크인 카운터에서 짐을 부치실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말씀만 해 주시면 얼마든지 수화물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아…….”
선재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길게 탄성을 흘렸다. 말허리를 잘린 다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
“이제 알겠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한다정 씨는 그게 취미네요. 남 가르치려고 드는 거.”
“네? 가르치다니…….”
다정은 놀라 입만 벙긋거렸다. 그런 무례한 행동은 선재에게도, 또 그 누구에게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안 나요? 식당에서. 아…… 참 뻔뻔하네.”
순간, 다정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이렇게 바짝 붙어 계시는데 어떻게 안 부딪칠 수가 있겠어요. 옷을 버린 건 죄송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선재는 제가 했던 말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거였다. 그리고 그때 일을 이자까지 쳐서 갚아주려는 속셈이 분명했고.
도대체 제게 왜 이렇게까지 제게 집요하게 구는 건지. 숨이 콱 막힐 듯 답답한데 그가 나직이 혼잣말을 흘렸다.
“하긴 뭐, 임자 있는 남자한테 그런 것만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