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너, 나, 그리고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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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너, 나, 그리고 하나
2023.06.18.
***
그날 밤, 집으로 배송되어 온 쇼핑백을 본 다정은 놀라 소스라칠 뻔했다.
거실 바닥에는 백화점에서 입어본 옷 열 벌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딱 한 개만 사자고 그렇게 약속을 해 놓고서.
다정은 눈에 살짝 힘을 주고 태상을 올려다봤다.
“이게 다 뭐예요?”
“나는 하나만 샀어.”
태상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나머지는요?”
“현오가 보낸 거야.”
“아…….”
순둥한 얼굴에 참 그렇지 못한 씀씀이였다.
이걸 다 합치면 도대체 얼마일까. 아찔한 금액에 정신이 다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다정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거실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러자 태상이 쇼핑백을 양손에 가득 들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2층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다정은 그의 뒤를 종종 따라붙었다.
“그 녀석은 그냥 신이 난 거야.”
계단을 오르던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뭐가 신이 나요?”
“내가 괜찮아진 게.”
“…….”
현오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꽤 심술궂어 보였다. 가끔씩 너무 무성의한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태상도 누구보다 현오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다정은 감사했다.
그의 곁에 이렇게 마음을 터놓을 친구가 있음에, 그리고 그가 저에게도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것에.
방 앞에 도착한 태상은 한 꾸러미의 쇼핑백을 내려놓고 문을 열었다. 다정은 그를 도와 방 안으로 짐을 함께 옮겼다.
“감사하다고 연락이라도 드려야겠어요.”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태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짧게 여러 번 울리는 게 메시지가 연달아 들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하.”
화면을 훑은 그가 삐딱한 웃음을 흘렸다. 다정은 저도 보여 달라는 듯 까치발을 들고 고개를 쭉 뺐다. 그러자 태상이 핸드폰을 돌려 다정에게 내밀었다.
‘부담 가지지 말라고 말해줘,’
‘난 그냥…….’
‘조카가 생겨서 쇼핑을 주체하지 못하는 삼촌, 뭐 그런 거라고.’
“뭐야…… 조카 바보? 그럼 나 갑자기 삼촌 생긴 거야?”
다정이 액정을 들여다보며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고개를 바싹 들어 태상을 올려다봤다.
“내가 답장 써도 돼요?”
조금 들뜬 나머지, 다정은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눈치채지 못했다.
태상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정의 양 엄지가 액정 위를 바쁘게 통통 튀겼다.
‘현오 씨, 저 다정이에요. 선물 잘 받았어요.’
‘오? 차태상이 핸드폰도 내어 줬어요?’
‘네. 제가 답장 쓰고 싶다고 해서요. 정말 감사해요. 예쁘게 잘 입을게요.’
‘아…… 그렇게 진지하게 인사하면 쑥스럽습니다. 고작 옷 몇 벌 가지고.’
‘고작이라뇨.’
‘잊었어요? 저 그 집 아들이에요. 어차피 아버지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건데 아홉 벌이 뭐 대수인가요.’
“푸흡.”
다정이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말 못 참겠다는 듯 태상이 미간을 확 좁혔다.
그는 다정의 손에서 핸드폰을 쓱 빼가더니 짤막하게 ‘그만 보내.’라는 답장을 썼다.
“이 정도면 인사는 충분히 했어.”
“네…….”
조금 단단한 그의 목소리에 다정이 의아한 듯 답했다.
“정리하는 거 도와줄까?”
“괜찮아요. 제가 나중에 할게요.”
다정은 쇼핑백을 방 한쪽 구석으로 밀어 놓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그렇죠?”
“…….”
“쇼핑도 재미있었고, 현오 씨 만난 것도 좋았고…… 아, 현오 씨는 여자친구 있어요? 있으면 우리 나중에 같이 봐요.”
“…….”
재잘재잘 말을 잇던 다정이 조용히 말을 멈췄다. 아까부터 어쩐지 등 뒤가 조용했다. 이쯤 되면 네가 좋아하는 건 나도 좋다며 맞장구를 칠 태상인데.
다정은 불현듯 고개를 돌렸다.
“태상 씨?”
“……현오같이 재미있는 남자가 좋은 건가?”
“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 고개가 조금 기울어졌다.
“그게 무슨…….”
“하루 종일 많이 웃고 좋아했잖아.”
“아…….”
다정은 그제야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그가 질투라는 것을 하고 있는 거였다. 그것도 자기 제일 친한 친구를.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데 조금 가라앉은 듯한 태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웃겨서, 재밌어서 웃은 거지…… 딱히 다른 뜻은 없어요. 웃긴 거랑 좋아하는 거랑은 다른 거잖아요.”
다정은 황급히 제 감정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침울했다.
“네가 웃는 걸 보면…….”
태상이 손바닥으로 느릿하게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너무 좋아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답답할까.”
태상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가 떼며 말했다. 바라보는 눈빛이 깊게 일렁였다.
다정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조심히 허리를 끌어안는데 그가 등허리를 꽉 감쌌다. 더 가까워질 수도 없을 만큼 끌어당기는 몸놀림이 절박했다.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남자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갈급한 마음밖에 품을 줄 모른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의 불안은 설명이 되지 않았다. 다정은 제 존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숨이 막힐 것 같아.”
태상이 느릿하게 뒤통수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도 더 가깝지 못해서.”
쿵쿵 울리는 심장이 거칠게 이마를 때렸다. 그의 가슴속을 휘감는 불안이며 질투가 그대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제가 태상을 불안하게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품은 마음이 커서가 아니라 제가 그에게 마음을 다 열어주지 않아서. 무의식중에 그를 조금씩 차단하고 밀어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저는 언제나 조금씩 태상을 밀어냈다. 별거 아닌 옷 한 벌을 사력을 다해 마다했고, 연주회에 오지 말라며 거짓말을 했다.
사실 저도 불안해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언젠가는 저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사는 세계가 다른 우리가 온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고.
아마도 그런 마음은 은연중에 행동으로 드러났을 거였다.
다정은 생각해 보았다.
그때마다 태상이 어떻게 느꼈을지. 조금씩 외롭고, 더 불안해지지 않았을까.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답답한 마음이 울컥 치밀었다. 태상을 향한 마음이 무엇보다 확실한데. 저를 향한 그의 마음도 너무나 잘 아는데.
서로 불안에 떨면서 무서워만 하는 게 너무 답답했다. 우리는 그저 서로에게 더 가깝게 닿고 싶을 뿐인데.
다정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안아줘요.”
“…….”
커다란 그의 어깨가 움찔하며 굳었다. 그의 몸에서 움직이는 거라고는 거세게 뛰는 심장이 전부였다.
다정은 고개를 치켜들고 태상을 올려다봤다.
“나…… 안아줘요.”
“…….”
뻣뻣해진 턱에서 잔뜩 긴장한 게 느껴졌다. 다정은 그의 목 언저리에 부드럽게 입술을 눌렀다.
거칠게 뛰는 맥박이 여린 살 아래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가만히 머금고 있기를 한참, 다정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글거리는 두 눈과 시선이 맞았다.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불꽃처럼 타올랐다.
태상은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언가 꾹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이 순간을 잘게 쪼개 음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조용히 멈춘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순간, 팽팽하던 긴장이 툭 끊어졌다. 태상은 목 뒤를 손으로 감싸고 빠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는 간절하게 매달리는 듯 제 입술을 찾았다.
거칠고 격동적인 입맞춤이었다. 숨이 입안에서 미친 듯이 녹아내렸고, 여린 살이 정신없이 눌렸다. 다정은 주춤주춤 밀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하아…….”
한참 만에 떨어진 입술 위로 더운 숨이 내려앉았다. 눈꺼풀을 가물가물 들어 올리자 여전히 뜨거운 눈동자가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넌 역시 날 미치게 해.”
그 말을 끝으로 태상의 이성이 끊어졌다.
***
고요한 사무실 안.
미연은 눈썹 앞머리에 힘을 잔뜩 준 채 허공을 노려봤다. 기다란 손톱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게 무언가 고민에 빠진 듯싶었다.
잠시 후.
“아악, 진짜!”
그녀는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귀밑으로 동그랗게 말려 있던 단발머리가 어느새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도대체 뭘 준비해야 하냐고…….”
그녀가 헤드레스트 위에 머리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천장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답답한 기색이 잔뜩 어려 있었다.
태상에게 딜을 제안한 지 벌써 이틀. 미연은 이 거래가 애초에 성사 불가능한 것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미연은 태상의 사업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제공하려고 했다. 일에 미쳐 있는 인간이니까 이게 직방이겠지. 그렇게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태상의 반응은 의외였다.
‘너 이거면 구미가 당길 거다. 이번에 당선된 김재민 의원이…….’
‘항공안전법 개정안, 알아.’
‘굿모닝, 이거 진짜 어렵게 알아낸 건데, 이번에 세진 항공에서…….’
‘노선 전면 개편한다고.’
‘…….’
비장의 무기라고 생각했던 국회 내부 소식, 친구에게 비싼 밥까지 먹여가며 얻어낸 경쟁 업체의 정보.
매일 회사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인간이 놀라울 만큼 세상 돌아가는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미연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일에 미친 사람은 이길 수 없다는 걸.
“다른 거…… 뭔가 다른 거…….”
참신하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천하의 차태상을 꼼짝없이 굴복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미연은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러자 캄캄한 시야 위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저를 내려다보는 태상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그때, 요란한 핸드폰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미연은 손만 뻗어 대충 책상 위를 더듬거렸다. 서류 몇 개가 밀려서 바닥에 떨어지고 난 후에야 핸드폰이 손에 들어왔다.
“하.”
발신인을 본 미연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모든 고생을 하게 만든 장본인, 선재였다.
미연은 짜증을 잔뜩 실어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왜.”
「야, 강미연.」
“뭐.”
「너 에어 코리아 기사 왜 자꾸 다 내리는데?」
“…….”
미연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가 벌여 놓은 사고를 수습하느라 누구는 하루가 모자랄 지경인데 한다는 소리가 고작 저거라니.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머리채를 휘어잡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