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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목줄에 묶인 남자 (74/89)


74. 목줄에 묶인 남자
2023.06.15.



“그래서 아까 그 옷도 혼자 사려고 한 거죠? 태상이 전화 받을 때 몰래?”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다정이 눈동자를 움찔하며 시선을 떨궜다.

현오는 팔짱을 척 끼며 미간에 깊은 주름을 만들어 냈다. 그러더니 장난스러운 얼굴로 다정을 노려봤다.


“저 진짜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휴일에도 일을 하게 만드네요. 다정 씨도, 태상이도.”

“그게 무슨……?”

“자, 말해보세요. 고작 오만 삼천 원짜리 옷 하나를 몰래 사야 하는 사정이 뭔지.”

“그러니까 그건 또 언제 보셨냐고요…….”

다정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오는 눈을 또렷하게 뜨며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얼굴을 했다.

다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상 씨한테 너무 미안해서요.”

“구체적으로 뭐가요?”

“저는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받기만 하니까요.”

현오는 미간을 찡그린 채 툭 말을 던졌다.


“일방적이다.”

“네, 그거죠. 일방적.”

바로 그거라는 듯,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저도 나름대로 뭘 해주고 싶은데 솔직히 엄두도 안 나요. 태상 씨 수준에 맞출 자신은 없고, 그러면서 자꾸 받기만 하고.”

생각에 잠긴 듯 다정의 눈동자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


“사실은 미안한 게 아니라…… 그냥 미리 차단하고 도망가는 걸지도 몰라요. 비겁하게.”

딱히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을 열자 속마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다정은 침울한 얼굴로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비겁하진 않아요. 감당 못 하는 상황 앞에서 도망가는 건 당연한 선택이니까.”

“……감사해요.”

“그냥 하는 말 아닌데.”

그냥 위로차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지 다정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현오는 턱 끝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사실 두 사람은 꽤 위험한 조합이었다. 한쪽은 정도라는 걸 모르고 퍼붓는 남자였고, 한쪽은 뭐든 먼저 제 탓을 할 정도로 마음이 여린 여자였으니까.

적당한 곳에서 김을 좀 빼 주면 좋지 않을까.

현오는 친구를 위해 발 벗고 나서주기로 했다. 목줄에 묶인 도베르만 같은 처지에 놓인 친구를 위해.


“다정 씨.”

“네?”

“태상이 너무 그렇게 고문하지 말아요.”

“고문……이라뇨?”

“제가 다정 씨에 대해 왜 관심을 갖게 됐는지 아세요? 휴일에도 부랴부랴 뛰쳐나올 만큼?”

다정은 갑자기 바뀌는 대화 주제에 당황하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태상이가 변해도 너무 변해서예요. 얼빠진 사람처럼 웃지를 않나, 약 없이도 잠만 잘 잔다고 하지를 않나. 날이 바짝 서 있던 애가, 뭐랄까…… 말랑해졌달까?”

“……그 원인이 저라는 말씀이세요?”

“그렇죠.”

“그럼 좋은 거 아닌가요? 그게 왜 고문이라는 말씀이신지…….”

“다정 씨는 잘 모르겠지만, 태상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필요 이상으로 애정을 쏟는 경향이 있어요.”

“…….”

그의 말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려운 구석이 있었다. 다정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의아한 듯 말을 이었다.


“그건…… 누구나 다 그런 거잖아요.”

“그럼요. 누구나 다 그렇죠. 그런데…… 태상이의 경우는 좋아하는 게 없어도 너무 없다는 게 문제예요.”

“아…….”

“태상이가 심각한 일중독인 건 아시죠?”

“네…….”

다정은 일에 몰두한 태상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른 새벽에도, 늦은 밤에도,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서류 더미에 빠져 있곤 했다.


“자기한테 소중한 거라서 그래요. 그렇게 전력으로 다 쏟아부어야 안심이 되는 거예요.”

“안심…….”

그 말이 무겁게 다정의 가슴을 눌렀다.

태상은 무언가를 좋아하면서도 늘 불안해 견딜 수 없었던 거였다. 그래서 매번 그렇게 간절하고, 맹목적으로 매달렸던 거고.

다정은 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비로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인간이 지금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요?”

“……저요.”

다정이 설핏 웃으며 답했다.


“그러니까 받아줘요. 태상이가 어리광부린다고 생각하고. 비싼 걸 주면 돈이 남아돌아서 그러나 보다 하고, 시간을 쓰면 일벌레가 쉬면 좋지 뭐, 이렇게요.”

다정이 미소를 조금 더 선명하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현오가 더 웃으라는 듯 말을 보탰다.


“애초에 이런 옷 백 벌, 천 벌 사도 태상이 통장 잔고에는 티도 안 난다고요. 내가 보장해요. 걔는 나보다 열 배는 부자란 말이에요.”

“그래요?”

다정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때, 멀찍이서 빠르게 걸어오는 태상이 보였다.

한 십오 분 정도 지났을까. 너끈히 한 시간은 보낼 거라고 했던 현오의 말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당연하다는 듯 다정의 손을 제일 먼저 움켜쥐었다.

현오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태상을 빤히 바라봤다.


“벌써? 야, 무슨 수로 빠져나왔냐? 분명 블랙홀로 빠져들 줄 알았는데?”

“하아…….”

태상이 숨을 가볍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데이트 중이라고. 여자친구가 기다린다고 말씀드렸어.”

“뭐? 그렇게 느끼한 말을 직접 했단 말이야?”

“…….”

쏘아붙이는 듯한 말에도 태상은 대답이 없었다. 그저 미안한 마음을 담아 다정의 손을 꼭 붙잡고 있을 뿐.


“그래, 알겠다. 데이트 잘해라. 방해꾼은 사라져 줄 테니까.”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난 건 현오였다. 처음 몇 번은 흥미로웠지만 자꾸 보고 있자니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안녕히 가세…….”

가볍게 인사를 하는데 현오가 한쪽 눈썹 끝을 슬쩍 올렸다. 그러더니 태상 쪽을 힐끗 바라봤다.

뭘 해야 하는지 알겠느냐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이었다. 다정은 눈썹에 힘을 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간다.”

태상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그다지 큰 반응도 없었다.

귀를 꽉 메우던 현오의 목소리가 사라지고 태상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현오가 이상한 얘기 하지는 않았어?”

“아뇨. 그럴 리가요.”

다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저기…… 태상 씨. 저 생각해 봤는데요.”

“……?”

집중하는 듯한 시선이 얼굴에 닿았다.


“저…… 태상 씨가 사주는 옷 입고 집에 인사드리러 갈게요.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거로 하나만 골라줘요.”

다정은 떨리는 눈동자로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싫어하면 어쩌나 걱정이 드는데 그의 얼굴이 불쑥 눈앞까지 치밀었다.


“맡겨 둬.”

부드럽게 풀어진 눈매 안에서 검은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 기대되어서 죽겠다는 듯. 마치, 선물 상자를 바라보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

이런 걸 퍼스널 쇼핑 룸이라고 하는 건가.

폭신한 소파에 앉은 다정은 멍하니 주위를 둘러봤다.

높다란 아치형 창, 은은한 실내조명과 잘 어울리는 앤티크 가구. 잡지의 한 페이지를 찢어서 만든 것 같은 공간은 독보적으로 우아했다.

다정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곳이 TV에 종종 나오는 VIP 라운지 그 이상의 은밀한 공간이라는 것을.

분위기만으로도 압도될 것 같은데, 태상은 이 공간에 숨 쉬듯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원피스로 찾아봐 주십시오.”

“네. 예산은 평소처럼 생각하면 될까요?”

“그러시죠.”

“착장은 몇 벌 준비할까요?”

“…….”

척척 잘만 대답하던 태상이 잠시 입술을 멈췄다. 그는 느릿하게 눈동자를 흘려 다정을 바라봤다. 고민스러운 시선이 머물기를 잠시, 그가 입꼬리를 느긋하게 휘었다.


“어울릴 만한 건 전부요.”

“전부……요.”

프로패셔널한 미소를 머금고 응대하던 그녀가 처음으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금세 원래의 표정을 되찾은 매니저는 온화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무 많아지면 입어보시는 분이 조금 힘드실 수 있습니다. 우선, 스무 벌 정도 준비하는 게 어떨까요?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만 입어보실 수 있게요.”

“아…….”

미처 그런 줄은 몰랐다는 듯 태상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는 눈동자를 느릿하게 굴리며 입을 열었다.


“보이는 건 전부 다 사고 싶어질 거라…….”

“…….”

“스타일별로 한 벌씩, 총 열 벌. 그렇게만 준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다정이 평소 즐겨 입는 브랜드, 사이즈와 취향을 꼼꼼히 파악한 후 자리를 떴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매니저의 뒤로 기다란 행거가 보였다.


“준비됐습니다.”

다정은 놀란 눈으로 걸려 있는 옷들을 바라봤다. 소재며 디자인, 색상. 겹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고, 하나같이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태상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다녀와.”

“네. 금방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가 재빠르게 손을 잡았다. 그는 속삭이듯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기대된다. 얼른 보고 싶어.”

“…….”

순간, 목덜미까지 확 붉어졌다.

그냥 옷 한번 입어보는 게 뭐라고 이렇게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지. 고개만 겨우 끄덕이는데 부러운 듯한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정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로맨스 영화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 여자 직원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다정은 태상의 손을 살며시 밀어내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직원 한 명이 탈의실 안에 첫 번째로 입어볼 옷을 준비해 놓았다. 작고 뾰족한 카라와 얇은 벨트 덕에 도시적인 느낌이 나는 원피스였다.

탈의실 안으로 들어간 다정은 조심조심 옷을 갈아입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낯설면서 꽤 보기 좋았다.

다정은 꼼꼼히 제 모습을 점검하고 느릿하게 커튼을 걷었다.


“태상…….”

기다란 천 자락을 움직이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 많던 직원들이 어디로 갔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탓이었다.

그때, 커튼이 부드럽게 마저 열렸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다…… 어디 갔어요?”

“내보냈어. 나 혼자 보고 싶어서.”

태상이 어린아이 같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앞에 와서 섰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 하나에 괜히 가슴이 떨렸다.


“……어때요?”

태상은 쏟아져 내린 다정의 머리를 어깨 뒤로 쓸어 넘겼다. 민소매 원피스 위로 동그란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만히 그러쥐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고개를 틀어 다정의 시야 안으로 불쑥 침범했다.


“예뻐.”

“…….”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이 진지했다.

다정은 빨려 들어갈 듯한 색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정말 예뻐.”

낮은 목소리가 새까만 색 안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완벽히 섞여버린 눈동자 안에서 다정은 거친 떨림을 느꼈다.

처음으로 알 수 있었다. 눈을 맞추는 행위가 때로는 입맞춤보다 훨씬 깊고 진한 행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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