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다름을 채우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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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다름을 채우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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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다름을 채우는 건
2023.06.11.
다정은 팔을 더 감싼 채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네? 가요.”
“……응.”
태상이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역시 처음 끼는 팔짱이 조금 낯선 것 같았다.
현오는 미간을 잔뜩 모은 채 태상을 바라봤다. 그러다 시선을 옮겨 다정을 바라봤고. 아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똑똑히 들리는 것 같았다. 넌 도대체 누구냐고.
다정은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입구로 향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아, 맞다. 저 계산 좀 하고 올게요. 잠시만요.”
떠나기 직전에야 여기 온 목적이 떠올랐는지, 다정이 바삐 입을 열었다.
다정은 팔짱을 풀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태상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동자로 멀어지는 다정을 좇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현오가 태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계산, 내가 할까? 하나 선물해 드리고 싶은데.”
“…….”
무언가 예민한 부분을 잘못 건드렸는지. 매서운 시선이 빠르게 날아와 꽂혔다.
“왜, 왜…….”
“나도 못 하는 걸 네가 하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
태상이 커다란 한숨을 토해내며 시선을 떨궜다.
“뭔데. 왜 못 하는데?”
“미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아아…….”
돌아가는 상황을 금세 이해한 현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애초에 VIP 쇼룸으로 오지 않고 여기서 쇼핑을 하고 있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현오는 희망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서서히 맞춰 가면 되니까.”
“……?”
태상이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현오를 바라봤다.
“경제력의 차이가 나는 커플이라면 다 겪는 일이야. 물론, 너희 경우엔 네가 좀…… 지나쳐서 맞추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겠지만.”
현오는 태상의 어깨를 한 번 더 두드리며 힘을 북돋아 주었다.
***
백화점 최상층에 위치한 커피숍.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현오의 얼굴이 제법 심각했다.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외모 관리를 안 하는 건 다 전략이다, 이겁니다. 환자분들이 저를 친근하게 대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
“아…… 그러시구나.”
현오는 생각보다 더 능글맞고, 뻔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이 정말 많았다.
처음에는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유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다름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채워주었다. 딱딱한 태상에게는 유쾌한 현오가, 우유부단한 현오에게는 태상의 결단력이 필요했다.
“아무튼,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이렇게 촌스럽게 하고 다닐 겁니다.”
그가 유쾌하게 연설을 끝마쳤다.
“아까 저한테는 그렇게 옷을 골라주시더니…….”
다정이 가볍게 타박하듯 말했다.
“네. 그랬죠. 백화점 아들이라고 자랑도 하고. 아, 생각해 봤는데 앞으로는 그냥 잡화점 아들이라고 말하고 다녀야겠어요. 그럼 이렇게 촌스럽게 하고 다녀도 되니까.”
자못 심각한 표정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정은 퍽퍽해진 목을 축이려 커피를 집어 들었다.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켜는데 그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따 저녁에 뭐 먹을까요?”
“……네?”
예상은 했지만 그의 친화력은 지구를 가뿐히 뚫고 넘어가는 정도였다. 다정은 자연스레 태상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눈썹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우리가 뭘 먹든 너는 거기 없을 거니까 고를 필요 없어.”
“야, 어차피 먹을 거 같이 먹으면 좋지. 안 그래요, 다정…….”
“안 그래.”
태상이 현오의 입을 빠르게 막았다. 마음 약한 다정을 물고 늘어지려는 수를 뻔히 읽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자 현오가 재미있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왜 안 그런데?”
“…….”
다정은 조금 긴장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현오는 수더분한 성격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집요해지는 구석이 있었다.
이번엔 그가 원하는 건 아무래도 태상의 재미난 반응인 듯싶었다.
“우리 데이트니까.”
“…….”
“그래서 안 돼.”
태상이 눈동자에 힘을 싣고 현오를 쳐다봤다. 마치, 네가 듣고 싶은 게 이거 아니냐는 듯, 직선적이고 당당한 태도였다.
현오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의자 등받이에 쓰러지듯 몸을 기댔다.
“와…… 나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아. 차태상이 저런 말을 하다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고…….”
“뚫렸으면 이제 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고 부드러웠다. 약간의 들뜸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다정은 살며시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휘어 있었다.
역시, 함께 기뻐하고 있는 거였다.
다정은 그를 조금 더, 아니, 아주 한껏 들뜨게 해주고 싶었다.
“맞아요. 이거 우리 데이트니까, 현오 씨는 이제 그만 가세요.”
다정이 장난스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깨에 고개를 가볍게 기대는데 태상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현오는 상처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는 소리를 냈다.
“다정 씨마저 이럴 거예요? 하, 정말…… 어른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네요. 차태상 키워 봤자 아무 소용없다더니.”
“네에? 현오 씨가 뭘 키워요?”
다시 한번 꺄르르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웃던 다정은 상체를 세워 몸을 바로 하고 앉았다. 태상의 팔을 감고 있던 손도 풀어내려고 하는데.
“…….”
이 단단한 느낌은 뭘까.
팔이 영 움직이지 않았다. 시선을 내리자 힘이 단단히 들어간 태상의 팔뚝이 보였다. 계속 감고 있으라는 무언의 압박이 강하게 느껴졌다.
다정은 눈매를 애매하게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러자 현오가 쯧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 짐승 같은 놈아. 다정 씨 팔 부러져. 너랑 같은 줄 알아?”
가벼운 장난, 이어지는 타박.
그 뒤로도 두 사람은 가볍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현오는 저를 배려하느라 자꾸 대화에 참여시켰고, 그때마다 태상도 적당히 말을 섞었다.
다정은 태상의 세계에 아주 편안히 발을 들인 듯한 느낌이었다. 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공간이라 여겼던 그의 세계에.
이제 보니 태상의 할아버지도 그렇고 현오도 그렇고, 태상의 세상은 뿌리를 내리고 살기에 충분히 좋은 곳이었다.
다정은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때, 현오의 재킷 안쪽에서 짧은 진동이 흘러나왔다.
빠르게 메시지를 확인한 그는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야, 어쩌냐. 지금 아버지 오셨나 본데?”
“……뭐?”
“오늘 백화점 시찰 나왔다가 너랑 나 봤다는 얘기 들었나 봐.”
그가 핸드폰은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말하자 태상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다.
불쾌함이나 짜증은 아니었다. 그저 하기 싫은 일을 마주한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태상은 잠시 고민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다가 이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인사를 드리고 와야 할 것 같아.”
표정이 어두운 게 저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정은 흔쾌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 괜찮아요. 천천히 다녀오세요.”
“……금방 올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태상은 현오로부터 아버님의 위치를 전해 듣고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내디디는 걸음에서 조급함이 잔뜩 묻어났다.
“금방 오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오가 픽 웃으며 말했다. 다정은 의아한 시선을 그에게 던졌다.
“왜요?”
“제가 말이 많은 편이잖아요.”
“네…… 좀.”
“근데 아버지는 저보다 훨씬 더 심하거든요. 태상이처럼 말 없는 애를 붙잡고도 한 시간은 너끈히 수다가 가능하달까? 쟤…… 절대 금방 못 와요.”
“아…….”
묘하게 불편해 보였던 태상의 표정이 그제야 이해가 됐다. 그건 싫은 게 아니라 그냥 피하고 싶은 얼굴이었던 거다.
다정이 애매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랑 태상 씨랑 사이가 좋은가 봐요.”
“네. 어릴 때 앞집, 뒷집으로 산 인연도 있고, 가족들끼리도 잘 알고 지내거든요. 엄마는 태상이 무뚝뚝하다고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버지는 그게 매력이래요.”
“긍정적인 분이시네요.”
다정이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 맞다. 근데 현오 씨는 오늘 뭐 사러 나오신 거예요?”
“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시찰 나온 거라면서요. 현오 씨는 오늘 백화점 왜 오셨는데요?”
“아, 그게…….”
현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저 다정 씨한테만 양심 고백할게요. 우연히 마주친 척 했는데 사실 두 사람 여기 있다는 얘기 듣고 일부러 온 거예요.”
“네? 누구한테요?”
다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VIP 쇼핑 라운지에서 일하는 형한테요.”
“저희 그런 데 간 적 없는데……?”
“알아요, 안 간 거. 어, 그러니까…….”
현오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이야기의 순서를 짜 맞췄다.
“그 형이 지난번 태상이 담당했던 퍼스널 쇼퍼였거든요? 근데 오늘 태상이가 VIP 라운지 말고 일반 매장으로 가는 걸 본 거죠. 그래서 잔뜩 겁을 먹고 저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왜 겁을 먹어요?”
“자기 뭐 실수한 거 있나 해서요. 혹시 들은 거 없냐고, 되게 조마조마해 하더라고요.”
“아…….”
그냥 적당한 가격대의 옷을 하나 사려고 했을 뿐인데. 제 작은 행동이 이렇게 큰 물결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순간, 다정은 조금 씁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동안은 태상과 둘만의 공간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냈다. 당연히 아무런 걱정도 없었고 그저, 그가 주는 사랑을 받아먹기만 하면 됐다. 평온하고 따스하기만 했다.
하지만 태상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그를 둘러싼 모든 걸 함께 받아들여야 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눈매를 축 늘였다.
“그저 움직이기만 해도 주변이 들썩거리네요. 태상 씨도, 현오 씨도. 참 피곤하겠어요.”
“…….”
현오는 조심스레 다정의 기색을 살폈다. 가라앉은 듯한 얼굴에서 깊은 고민이 느껴졌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정 씨.”
“네?”
“태상이가 부담스러워요?”
“네? 그건…….”
다정이 입을 여는 듯하다가 다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