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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계약 (72/89)


72. 계약
2023.06.08.



「진짜 다들 아무것도 모른대. 그러니까 그만해.」

미연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그러더니 우는 듯한 목소리로 하소연을 시작했다.


「나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죽겠어. 할아버지는 뭘 어떻게 했길래 태상이가 아직도 화를 안 푸냐고 난리지, 수빈이는 직접 찾아와서 부탁까지 하지…….」

“차수빈이 너한테?”

「응. 며칠 전에 왔었어. 한량처럼 노는 자기가 이럴 때라도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기사 내려달라고 부탁하러 왔더라.」

“…….”

한참을 헤매던 미로에서 조금씩 나가는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태상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칼날 같은 의심이 명옥에게 향했다.


「야, 너 여기서 더 나가면 우리 둘 다 하루 종일 회장실 불려 다녀야 해. 설마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우리 결혼 깼을 때, 목줄 맨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끌려 다녔던 거? 나 그 짓 다시는 못 한다.」

“미안하지만 그만둘 수 없어. 아직은.”

태상이 조금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에 뒤에 누가 있는지 짐작이 가는 이상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회사를 위해서, 또…….


「태상아.」

미연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태상의 이름을 불렀다. 성을 빼고 태상아, 라고 부르는 건 그가 끔찍이도 싫어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렇게 부르지 말하고 했을 텐데.”

태상이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있잖아, 내가 말했나? 나 지난번에 맞선 나갔다가 퇴짜 맞았다고? 그 남자가 그러더라? 파혼을 한 건 괜찮은데, 당한 건 용납 못 한다고.」

“…….”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이번엔 태상의 입이 조개처럼 굳게 닫혔다.

둘 다 억지로 결혼에 떠밀렸고 미연 역시 태상에게 로맨틱한 감정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 어떤 설명을 붙인다고 한들, 결혼을 먼저 깬 당사자는 태상이었다.

깊은 부채감과 미안함. 태상은 그녀에게 아직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 물론, 이를 아는 미연은 필요할 때마다 결혼 이야기를 적절히 꺼냈고.


「그리고 이번에 잡지 사랑 인터뷰를 하는데 네 결혼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이유가 있어. 아주 중요한 이유가.”

태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허리를 잘랐다.

만약 이 일을 벌인 사람이 명옥이라면, 그녀의 목적은 뻔했다. 저를 흠집 내고, 찍어 내려서 언젠가는 제 자리에 수빈을 앉히려는 것이다.

사실, 태상은 그녀의 해코지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질리도록 겪었고 조금 다쳐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명옥의 손길은 저뿐만 아니라 다정에게까지 뻗친다. 제가 무너지면 또다시 다정이 다친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두고 볼 수가 없다.

태상은 쓰게 신음하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야…… 갑자기 그렇게 노선 바꾸면 내가 뭐가 돼?」

미연이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태상의 이런 진지한 사과는 그녀의 인생에서도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많이…… 중요한 일이야?」

“응.”

태상은 매장 안을 힐끔 바라봤다.

분명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중인데. 다정이 시야에 들어오자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한결 따스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아마 내 인생에 없을 거야.”

「……뭐 제대로 알려주는 거도 없이 그냥 이해하래. 하긴, 혼자 다 알아서 하는 게 딱 차태상답긴 하다. 좋아. 나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거 찝찝했어. 기브 앤 테이크 해.」

“뭐?”

태상이 가볍게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역시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미연다웠다.


「나한테 일주일만 줘. 그 안에 내가 네 마음 돌려놓을게. 경쟁사 정보가 됐든, 네가 죽고 못 사는 와인이 됐든, 이번 일 덮는 거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고.」

“계약을 하시겠다…….”

「응.」

“날 만족시키는 게 쉽진 않을 텐데.”

「두고 봐.」

태상은 설핏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차피 제게 다정의 안위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데. 절대 이길 수 없는 내기를 걸어오는 그녀가 조금은 안타까웠다.


“딱 일주일이야. 더는 안 기다려. 그리고…….”

그의 입꼬리가 삐딱하게 휘었다.


“한 번만 더 성 빼고 불렀다간 전화 안 받을 테니까 그렇게 알아.”

「잘난 척하기는. 끊는다!」

미연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끊었다. 아마 통화 종료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기다리고 있었던 듯싶었다.

태상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일주일이면 고집이 꺾이겠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다정은 갑자기 등장한 남자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다.

동그랗고 순한 눈매. 수더분한 헤어스타일에 키는 저보다 반 뼘 정도 더 클까. 전반적으로 수수한 인상의 남자는 싱긋 웃으며 분홍색 원피스를 들이밀었다.


“이게 더 잘 어울릴 거예요.”

“아, 네…….”

다정이 멍한 소리를 흘리며 원피스를 받아 들었다.


“피부가 흰 편이니까 이렇게 옅은 핑크색이 잘 받을 거예요. 잔잔한 꽃무늬 프린팅은 말할 것도 없고요.”

“네…….”

“일단 이거 입어보고, 그다음으로는 어디 보자…….”

이 매장의 직원일 걸까.

하지만 목에 사원증도 없고 옷차림도 그냥 평범한 사복 같은데.

다정은 의아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연신 바쁘게 중얼거리며 옷을 고르는 데에만 열중했다.

결국, 다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 직원이세요?”

“네. 뭐, 그런 셈이죠.”

남자는 얼렁뚱땅 답하며 이번에는 블라우스 하나를 빼 들었다.


“여기요, 이것도 입어보세요.”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한 그때. 등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한테 옷을 입으라, 마라 하는 거지.”

어느새 전화를 마치고 들어왔는지, 태상이 잔뜩 성이 난 기운으로 남자와 제 사이를 가르듯 섰다.

다정은 놀라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눈동자로 바삐 상황을 살폈다.


“야, 야, 그렇게 좀 보지 마. 살 떨려.”

남자가 블라우스를 방패막이 삼아 올리며 말했다. 태상은 그 얇은 가림막을 손끝으로 쭉 밀어 내렸다.

맨 얼굴이 드러난 남자는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은 옷을 좀 추천해 드렸을 뿐이야. 그 정도도 못 하냐?”

“네가 왜.”

“그냥 뭐, 투철한 직업 정신?”

질문 같은 답변을 툭 던진 그는 잽싸게 허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안 그래도 태상의 뒤에서 고개를 삐죽거리고 있던 다정과 남자의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죠? 저 태상이 친구 현오라고 합니다.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태상이랑 같이 있는 거 보고 말 걸었어요.”

“친구……요?”

다정이 태상의 그림자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빠져나오며 말했다.


“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동고동락한 사이죠.”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아까는 왜 직원이라고……?”

다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 그게…… 하하하.”

남자가 멋쩍은 듯 웃더니 태상의 어깨를 툭 쳤다.


“이런 민망한 건 네가 대신 설명해 주면 안 되냐?”

“내가 왜. 애초에 거짓말까지 하면서 수상쩍게 접근한 게 누군데.”

“접근이라니…… 그냥 친구가 되려고 한 거지.”

현오는 태상을 흘겨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스스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 백화점이 저희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거라서요. 그래서 저도 뭐 큰 의미에서는 직원입니다.”

“아…….”

다정은 가만히 굳어져서 멍한 소리를 흘렸다.

태상과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랐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은 했다. 그가 평범한 집안 출신은 아닐 거라는 걸.

하지만 이 수수한 차림의 남자가 국내 굴지의 유통, 판매 기업 현송의 자제라니. 다정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현오가 멋쩍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좀 안 어울리긴 하죠?”

“아, 아니요.”

다정이 놀란 표정을 빠르게 지우며 고개를 저었다. 현오는 설핏 웃으며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워요.”

“잘 부탁드립니다. 한다정이에요.”

다정이 두 손을 공손히 올리는데.


“그냥 허리나 숙여.”

태상이 그의 손목을 잡아 아래로 꾹 눌렀다. 조용한 으르렁거림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현오는 조용히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아무리 오래 본 사이라도 그의 앞에서 기가 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정은 태상의 옷자락을 슬쩍 당기며 그의 시선을 제게 가져왔다.


“친구분께서 친화력이 참 좋으시네요.”

“지나친 거야.”

“태상 씨가 너무 없는 거예요.”

다정이 태상의 팔을 제 쪽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현오는 그 모습을 놀란 듯 바라봤다. 휘둥그렇게 뜨인 눈이며 벌어진 입이 마치 마법을 보는 사람 같았다.

다정은 태상의 앞을 살짝 가리듯 서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드려요.”

“아,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날아와 꽂히는 태상의 시선 때문인지 악수가 스치듯 가벼웠다. 다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다시 내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태상이 제 손을 움켜쥐었다. 자기 것이라는 강한 열의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

현오는 이제 아주 넋을 잃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태상이 자발적으로 여자의 몸에 손에 대는 모습이 적잖이 충격인 듯싶었다.


 


“저…… 현오 씨?”

다정이 조심스레 그를 불렀다.


“네? 아, 네…….”

현오가 작게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평평한 눈썹에 힘을 빠르게 실으며 다정을 향해 전투적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라도 한잔하시죠. 저희 백화점이 의외로 커피 맛집…….”

“옷 사러 온 거야. 커피 마시러 온 거 아니고.”

태상이 그의 말을 여유롭게 가로막았다.

그는 잡은 손을 뒤로 끌며 제 앞을 반쯤 가리고 섰다. 마치, 현오가 저를 빼앗아 갈 거라고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새삼 느껴지는 그의 강한 독점욕이 다정을 놀라게 했다. 둘만 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다정은 손을 겨우겨우 빼내고 그의 팔짱을 꼈다.


“태상 씨.”

어서 가자는 듯, 다정이 팔을 살짝 당겼다.


“목도 마르고 좀 쉬고 싶어요. 우리 커피 마시러 가요.”

태상과 팔짱을 끼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매일 그가 틈도 안 주고 손을 잡아 버리니, 무언가 해 볼 틈이 없었던 탓이었다.

다정은 그의 팔을 꼭 감싸 안았다. 단단한 팔뚝이 생각보다 굵고 묵직했다. 든든하면서도 어쩐지 위축이 되는, 그런 묘한 느낌이 손안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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