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다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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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다름에 관하여
2023.06.04.
-달칵.
소시민적 걱정에 착실히 빠져 있는데 가벼운 소음이 귓가를 건드렸다. 어느새 차가 멈추고, 태상이 안전벨트를 푼 것이다.
고개를 돌리자 아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면서도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벌써 다 왔네요?”
다정이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해?”
아니나 다를까, 그가 짐작했던 질문을 던졌다.
다정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하다가 그만 옷 얘기를 꺼내버렸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태상 씨.”
“……?”
“태상 씨는 분명 골라준다고만 했죠?”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그가 쓰게 신음했다.
“골라준다고 했지, 골라준다고만은 안 했어.”
“아무튼, 아까 계산하겠다는 말은 안 했어요.”
“…….”
“태상 씨는 추천만 해 줘요. 물론, 적당한 가격대에서.”
다정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태상이 뭐든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는 건 잘 안다. 그에게 가격표라는 게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다정은 달랐다.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 옷 한 벌에 그렇게 많은 돈을 쓴다는 게 납득되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가격표를 보며 충격에 빠지고 싶지도 않았고.
“뻔한 얘기인 거 아는데 마음만 받을게요.”
다소 가라앉은 듯한 태상의 얼굴에 다정이 위로하듯 말했다.
“나한테는 돈이 아무것도 아니야.”
“저한테는 아무 거예요.”
“…….”
누구의 말이 옳은 것도 아니었다. 그냥 두 사람이 너무 다를 뿐. 태상은 차고 넘치는 마음을 꾹 누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골라만 줄게.”
“고마워요.”
태상은 천천히 손을 뻗어 다정의 안전벨트 버클을 풀었다. 벨트를 잡고 쭉 딸려 오듯 상체를 기울인 태상은 금세 다정의 시야를 점령했다.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하는 말과 달리 콧잔등 위로 입술이 내려앉았다. 살짝 눌렀다가 떼는데 다정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조금 상처를 입힌 것 같기도 했고, 괜히 그의 재력을 탓하는 것 같기도 했다.
복잡한 마음에 입술만 꾹 깨무는데 태상이 말려 들어간 아랫입술을 톡톡 건드렸다.
“그런 표정 지을 거면 지금이라도 취소하고.”
“안 해요.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안 해요.”
다정이 시선을 떨군 채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미안하고 어색한 마음에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태상은 다정의 턱 끝을 살짝 잡고 눈꼬리에 입을 한번 꾹 맞췄다. 그러곤 두 볼을 넓게 감싸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맞자 그가 붉은 입꼬리를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너도 웃으라는 거였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었다. 그러자 그가 그 미소를 삼키듯 눈꼬리에 입술을 눌렀다.
미안하게 만든 건 저인데 오히려 그에게 잔뜩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다정은 얼굴에 닿아온 태상의 체온을 느끼며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를 한 번씩 번갈아 타자, 여성 의류 브랜드가 모여 있는 층에 내릴 수 있었다.
다정은 매장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다양한 옷을 구경했다. 짧은 여름 치마며 하늘하늘한 시폰 원피스가 가득했다.
“이건 어때요?”
손끝에 들린 건 단정한 흰색 원피스였다.
“네가 입으면 예쁠 것 같아.”
“아까도 그 말 했잖아요.”
“그 옷도 잘 어울릴 것 같았으니까.”
“…….”
다정은 다소 불퉁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 보니 옷을 고르는 걸 도와준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던 듯싶었다.
“태상 씨, 그 말도 거짓말이죠. 할아버님께서 좋아하는 스타일이 뭔지 안다는 거.”
“알아.”
“뭔데요.”
다정이 그럼 어디 한번 골라보라는 듯 행거 앞에서 비켜섰다. 태상은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옷을 하나하나 훑더니 중간에 있는 옷걸이 하나를 빼냈다.
다정은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곁으로 다가왔다.
“알긴…… 아나 보네요.”
느릿하게 손을 뻗는데 그가 옆에 있는 옷 하나를 더 빼냈다. 그러곤 하나 더, 또 하나 더. 옷을 집을 때마다 태상의 입가에 미소가 더 크게 번졌다.
태상은 누군가에게 옷을 골라주는 일 따위는 해 본 적도 없었다. 결코, 하고 싶은 일도 아니었고.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다정을 떠올리자 얘기가 달라졌다.
자꾸만 상상되어 손이 멈추지 않았다.
이 옷은 동그란 어깨를 예쁘게 드러낼 것 같아서, 노란색 꽃무늬는 그냥 귀여울 것 같아서, 부드러운 실크 소재는 다정을 안을 때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보이는 것마다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며, 몇 개를 빼는 거예요?”
태상의 손이 멈출 생각을 하지 않자 다정이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고르라고 했잖아.”
“이건 고르는 게 아니라 그냥 다 쓸어 담는 거예요. 게다가…….”
다정이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원피스 하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짧고, 타이트한 원피스를 좋아하실 것 같진 않은데요?”
“할아버지는 내가 좋아하는 걸 좋아하셔.”
“……”
“내가 보기엔 다 잘 어울릴 것 같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정이 그의 손에서 옷걸이를 냉큼 빼앗아 들었다. 그새 몇 벌이나 뺀 건지 벌써 손이 꽤 묵직했다.
“이런 식이면 하루 종일 골라도 못 골라요. 아무래도 태상 씨는 도움이 안 될 것 같으니까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요.”
다정이 단호하게 말하며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태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가 한 팔로 다정의 어깨를 감쌌다.
“나름 절제한 거야.”
목소리에서 부드러운 웃음이 묻어났다. 다정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한껏 머금은 미소에서 그가 이 시간을 얼마나 즐기는지 알 수 있었다.
한가롭고 평범한 주말 데이트가 이런 거구나.
시선을 맞춘 채 따라 웃는데 태상의 주머니에서 작은 진동이 새어 나왔다. 그는 한 손으로 가볍게 핸드폰을 꺼냈다.
워낙 가까운 거리 덕에 다정에게도 화면이 보였다. 순간, 다정의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강미연’
전 약혼녀가 일요일 오후에 무슨 일인 걸까. 메시지도 아니고 전화로.
궁금증과 불안이 빠르게 차올랐다. 다정은 애써 시선을 돌렸다. 화면을 봤다는 것도, 마음을 쓰고 있다는 것도. 모두 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잠깐 전화 받고 올게.”
태상이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말했다. 다정은 그냥 여기서 받아도 된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가 매장 바깥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어느새 다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떨어져 있으라고 타박을 했던 게 고작 몇 초 전인데 그새 마음이 서운하고 허전했다.
-차락, 차락.
다정은 옷걸이를 하나, 하나 옆으로 옮겼다가 다시 제 자리로 되돌리며 괜히 시간을 때웠다.
태상이 사라지고 나자 더 이상 옷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애초에 태상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았던 거였지 진짜 옷 구경이 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이게 제일 무난하네…….”
가장 깔끔한 디자인의 원피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다정은 계산대를 찾아 고개를 쭉 빼 들었다. 태상이 자리를 비운 사이 계산을 하려는 거였다.
카운터를 향해 한 걸음 발을 떼는 순간. 분홍색 옷자락이 시야를 확 점령했다. 다정은 놀라 고개를 뒤로 물렸다.
“그것도 예쁘긴 한데. 이거, 이게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
태상은 눈썹 앞머리에 잔뜩 힘을 준 채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친구, 전 약혼녀, 때로는 비즈니스 파트너.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미연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망아지 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는데, 대뜸 흥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 진짜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그만 좀 들쑤시고 다니라는 얘기지. 내가 너 많이 봐줬다? 알지?」
대성일보의 편집국장으로 재직 중인 그녀는 누구보다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과 관련해서는 극한의 효율을 추구했고, 꽂히는 일이 있으면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내달렸다.
그런 그녀의 오늘 목표는 태상을 항복시키는 것이었다.
「웬만한 기사는 다 내렸고, 수습 기사도 나갔어. 그러니까 그만 파. 파 봤자 나오는 거라고는 멍청한 우리 오빠밖에 없어.」
미연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한번 푹 쉬었다.
사실, 그녀는 이번에 터진 기사의 최대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안으로는 기사를 수습하고, 밖으로는 상해버린 양가 어르신들의 감정을 추스르고. 거기다 철부지 오빠를 훈계하는 일까지. 그녀는 요 며칠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야, 그냥 이참에 오빠랑 치고받고 싸워주면 안 되겠냐? 중간에 낀 새우 등 터뜨리지 말고?」
“너도 선재 형이 한 일이라고 생각해?”
「당연하지. 이런 멍청한 짓을 벌일 인간이 오빠 말고 또 누가 있어. 애초에 효성 깎아내리는 일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나 못 한다…….”
대성 일보에는 한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바로 효성에 대한 기사는 고르고 골라 신중하게 낼 것, 이었다. 오너의 심기를 어지럽힐 수 있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다.
때문에 기사가 터졌을 당시, 태상도 선재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이런 모든 상황을 뛰어넘고 보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대성 내에도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너무 쉬워.”
「뭐?」
“기사 나가면 제일 먼저 의심받을 거 뻔히 알면서 선재 형이 이런 일을 벌였을 리 없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미연이 생각에 잠긴 듯 말꼬리를 늘였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정리한 듯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안 들킬 거라고 자신했나 보지. 내가 어제 찾아갔을 때도 딱 잡아뗐어. 기자들 입막음도 단단히 한 것 같고.」
“그 입막음 당했다는 기자들, 만나봤어?”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전화하기 전에 그 정도도 안 했을까. 다들 조개야, 조개. 익명의 제보자라면서 아무것도 모른대.」
“너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이거지…….”
태상이 느릿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조개 같다던 기자들. 이상하게도 그들은 김 비서 앞에서 슬쩍, 슬쩍 입을 벌렸다.
내부자, 에어 코리아 관계자, 윗선. 그들이 흘리는 말은 미리 짠 것처럼 비슷했다.
이건 마치 누군가가 제게 부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진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내부에 있으니 그 안을 들여다보라고. 의심의 방향을 돌리라고.
태상은 놀아나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놀아나는 한이 있더라도 확인을 해야만 했다.
이 의심의 끝에 뭐가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