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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설거지, 그리고 입맞춤 (70/89)


70. 설거지, 그리고 입맞춤
2023.06.01.


지난 몇 주간, 다정은 그가 틈만 나면 제게 붙어 있으려 한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

운전을 할 때는 손을, 소파에 앉아 있을 때는 어깨를, 또 잠을 잘 때는 거의 온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주 잠깐이라도 떨어져 있어야 할 때면, 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다시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그럼 진짜 가만히 있어요.”

다정이 엄포를 놓듯 말했다. 태상은 목덜미 위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정은 커다란 접시 하나를 집어 들고 수세미질을 시작했다.

부드럽게 문지르는데 그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져 내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숙인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태상이 목덜미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

피부가 움푹 팰 듯 깊은 입맞춤이었다. 감정을 담아 소중하게 꾹 누르는 느낌. 다정은 그런 그의 몸짓이 너무 좋았다.

손가락 사이를 메운 부드러운 거품, 코끝에 스치는 그의 체향.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어쩐지 태상이 너무 얌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욕심을 부리며 목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을 텐데. 그는 목 위에 입술을 댄 채 석상처럼 굳어져 있었다.


“풉.”

그의 행동을 이해한 다정이 순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만히 있으랬다고 이러는 건가. 무뚝뚝한 남자의 장난이 가슴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지금 시위하는 거예요? 가만히 있으랬다고?”

다정이 웃음기가 가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목 위를 누르던 도톰한 입술이 납작하게 퍼졌다. 태상이 입을 맞춘 채 그대로 미소를 지은 것 같았다.

숨소리로, 입술의 느낌만으로, 그의 웃음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다정은 태상의 머리 위에 살며시 고개를 기댔다.


“이제 가만히 안 있어도 돼요. 얼음, 땡.”

장난스럽게 말하자 이번엔 태상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는 가느다란 숨을 내뱉으며 어깨 위에 턱을 기댔다. 느릿하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하…… 네 옆에 있으면 자꾸 이상해져…….”

무언가에 취한 듯, 또 굉장히 벅차오르는 듯 숨을 가득 머금은 목소리였다.


“그거 좋은…….”

다정은 말을 마칠 수 없었다. 도톰한 입술이 다시 목 언저리를 누른 것이다.


“어디서 톡 튀어나와서는.”

그는 목을 타고 아주 조금씩 위로 올라왔다. 더듬더듬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자잘한 입맞춤이 목 전체에 흩뿌려졌다.


“머리며 몸이며 전부 미치게 만들어.”

어느새 턱을 지난 입술이 가느다란 입꼬리를 머금었다. 뜨겁게 붙었다가, 아쉽게 떨어졌다가. 한참을 움직인 그는 조심히 고개를 틀었다.

눈앞에 태상의 얼굴이 드리웠고, 입술이 부드럽게 스쳤다. 다정은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가느다랗게 숨을 내쉬는데 그가 서서히 입술을 눌렀다.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소중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다정은 떨리는 눈꺼풀을 꼭 감았다.

여린 살이 부드럽게 뭉개졌고, 숨이 달콤하게 섞였다. 느릿한 움직임 때문일까. 마치 태상이 제 입술 안으로 스미는 것 같았다.

점점 머리가 멍해지는데 그가 허리를 감고 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이쪽으로 돌아봐 달라는 걸까. 다정은 그와 입을 맞춘 채 천천히 몸을 돌렸다. 주춤주춤 발끝을 트는데 태상이 그에 맞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이윽고 다정의 몸이 완전히 그를 바라보고 섰다.

순간, 태상의 움직임이 격렬해졌다. 세게 눌리는 힘에 고개가 뒤로 밀렸고, 허리도 휘청거렸다.

다정은 다급히 그의 허리를 잡았다. 축축이 젖은 손이 신경 쓰여 옷을 살짝 잡고만 있는데 태상이 손을 허리 위로 꾹 눌렀다.

흰색 셔츠 위로 자그마한 손자국이 찍혔다. 다정은 더듬거리며 넓은 그의 등을 감쌌다.

태상은 다정을 꼭 끌어안은 채 연신 숨을 섞었다.

숨결도, 심장도 모든 것이 사로잡힌 완벽한 입맞춤이었다.


 

***

다음 날 아침, 휴무를 맞은 다정은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일요일인 오늘은, 다정이 그와 동시에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날이었다.

다정은 멀찍이 서서 그를 바라봤다.

간밤의 길었던 입맞춤이 떠올라서일까.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침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커피, 마실래?”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태상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네? 아, 네…….”

다정은 어설프게 답하고 걸음을 옮겼다. 언제 일어났는지 그는 벌써 가벼운 홈웨어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아침 뭐 먹을래?”

“음…… 글쎄요. 빵이랑 샐러드?”

다정이 그를 옆에서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 아침이 주는 깨끗한 분위기 속에서 느끼는 그의 품은 더할 나위 없이 산뜻했다.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말한 태상이 천천히 다정의 팔을 풀었다.

그는 냉장고에서 샐러드 한 팩과 방울토마토를 꺼냈다.

빠르게 채소를 씻어내고, 커피를 마저 내리고, 선반에서 빵을 꺼내고.

그는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빠르게 해냈다. 하나의 일에 집중하면서도,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덕분에 다정은 무얼 도와주지도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식탁 위로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다. 그렇게 많이 배가 고픈 건 아닌데 양이 상당했다.

다정은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얼른 먹어.”

“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다정은 빵을 먼저 집어 들었다.

버터가 발린 따끈한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자 의외로 입맛이 돌았다. 다정은 싱싱한 푸성귀 잎을 곁들인 샐러드를 깨끗하게 비워냈다.


“다 먹었지?”

“네.”

반 정도 남은 커피를 홀짝일 즈음, 태상은 다정을 이끌고 소파로 향했다.

편하게 기대앉으라는 게 이유였지만 사실, 자기 어깨에 기대라는 뜻이었다. 다정은 그저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

소파 끝에 자리를 잡고 앉은 태상은 자연스레 다정을 옆에 앉혔다. 다정은 그의 품에 기대듯 누운 채 편안히 커피를 홀짝였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일까. 생각이 자연스레 그에게서 멀어졌다.

어젯밤, 침대에 누운 다정은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했다.


‘저…… 태상 씨 동생이랑 아는 사이예요.’

 
조심스럽게 꺼낸 말인데 태상의 반응은 의외로 덤덤했다. 오히려 긴장한 듯한 저를 편안히 달래주었다.


‘불편해할 거 없어. 나와 동생의 관계가 어떻든, 그건 우리의 관계니까.’

‘어렸을 때 제가 수빈 오빠한테 도움을 받은 적이 있어요.’

 
조명이 어둑한 탓일까, 그 말을 했을 때 태상의 얼굴이 착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잊고 지냈는데 얼마 전에 한국 들어오는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났고요.’

‘그랬구나.’

‘태상 씨는 동생이랑 별로 안 친한…… 거죠?’

‘…….’

 
짧은 침묵으로 충분했다.

다정은 아무 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형제나 가족이 없어서 외로운 사람도 있지만, 있는데도 외로운 건 어쩐지 더 마음이 아픈 것 같았다.


“무슨 생각해.”

잠깐의 정적이 흘렀을 뿐인데 태상이 그새를 못 참고 생각을 물어왔다.


“별생각 안 해요.”

“그래……?”

담백한 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가 동그란 뒤통수를 조물조물 만졌다.

이대로 생각이 읽히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가벼운 손놀림과 다르게 태상의 마음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간지러워요.”

“그럼 말해. 무슨 생각하는지.”

그가 장난스럽게 다정의 말을 보챘다. 다정은 말갛게 웃으며 조각난 생각 하나를 꺼내 보였다.


“할아버지께 인사드리러 갈 생각하고 있었어요. 중요한 자리니까 잘 보여야…… 아, 맞다.”

다정이 탄성을 내뱉으며 기대고 있던 몸을 순식간에 일으켜 세웠다.


“왜?”

“옷이요. 입고 갈 만한 옷이 없네.”

다정이 허공을 바라보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매일 유니폼만 입다 보니까 옷 살 일이 없거든요.”

“옷…….”

생각에 잠긴 눈동자가 느릿하게 옆으로 흘렀다.

뭘 입어도 예쁘지만, 아직 다 입혀보지는 않은 것 같다.

태상은 즐거운 듯 미소를 머금었다. 휴일이 생각보다 바쁘게 흘러갈 것 같았다.


“가자.”

“네? 어딜요?”

“적당한 옷, 사러.”

다정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느릿하게 깜빡이기를 두어 번, 연갈색 눈동자가 도망치듯 옆으로 향했다.

태상은 느릿하게 그 움직임을 좇았다.

가라앉은 눈동자가 무언가 걱정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귀여운 변명이 지저귀듯 흘러나왔다.


“……그, 그냥 인터넷으로 사면 돼요. 나가는 거도 귀찮잖아요. 태상 씨 오늘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할아버지 취향에 맞추고 싶었던 거 아닌가?”

태상은 가볍게 미끼를 던졌다.


“네. 그렇긴 한데…….”

“할아버지 취향에 맞는 옷은 내가 알아. 그러니까 같이 나가.”

태상이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래도 다정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섞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정말…… 알아요?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옷을?”

다정이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같이 보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그냥 저한테 말로 설명해 주면 안 돼요?”

다정이 불쌍한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태상을 올려다봤다. 태상은 귀엽게 찡그려진 미간을 검지로 살살 문질렀다.


“안 돼. 내가 직접 골라줄 거야.”

 

***

백화점으로 향하는 차 안, 조수석에 앉은 다정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눈에 스치는 풍경으로 보아 목적지는 현송 백화점인 게 틀림없었다.


‘이래서…….’

목적지를 예상했기 때문에 나가지 말자고 했던 거였다.

한남동의 중심에 위치한 집에서 쇼핑을 가려면 후보지는 두 곳으로 좁혀진다.

조금 멀지만 쇼핑센터와 연결이 되어 있는 세진 백화점. 규모는 작지만 명품관이 즐비한 현송 백화점.

태상이 현송으로 향하리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다시 고가의 옷이 손에 쥐어지게 될 것도 뻔하고.

다정이 그와의 쇼핑을 피하고만 싶었다.

지난번 말레이시아에서 받은 원피스가 무려 사백오십 만원이나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별생각 없이 패션, 뷰티 채널을 보고 있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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