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그 남자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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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그 남자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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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그 남자의 진심
2023.05.28.
태평하달까, 유들유들하달까. 대놓고 그냥 터뜨려 버리는 그의 모습에 다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덕분에 답답하던 분위기가 한결 편안해졌다.
“벌써 들은 거지?”
수빈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전혀 몰랐어요. 그냥 태평한 예술가인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그런 거 티 내는 성격은 아니거든.”
“저, 실은요…….”
다정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누구인지 안 이상, 태상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냥 숨길 수는 없었다.
“태상이 형 얘기하려고?”
“……아세요?”
“응. 당연히 알지. 여기 보는 눈이 몇 개고, 말 전하는 입이 몇 개인데.”
“알면 왜…….”
진작 말해주지 않았느냐는 말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혼자만 몰랐다니 조금 바보가 된 듯싶기도 했고.
다정은 복잡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미안. 꽤 오래전부터 알았는데 네가 불편해할까 봐 말 안 했어. 나, 형이랑 별로 좋은 관계 아닌 건 회사 사람들이 다 아는 얘기잖아?”
“…….”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속 얘기가 어색한 듯 그가 살짝 목덜미를 쓸었다.
“차태상 동생이 아니라 그냥 차수빈으로 보이고 싶기도 했고. 그러니까 앞으로도 난, 그냥 차수빈으로 봐 줘.”
“아…….”
그런 이유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는데. 다정은 속으로 작게 놀라며 수빈의 말을 다시 되새겨봤다.
만약 그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저는 수빈을 평범하게 대할 수 있었을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럴 리 없다.
태상과의 관계를 지우고 그를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명옥을 만난 이후로는 어색하게 피하기만 했을 것이고.
다정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봤다.
“노력은…… 해 볼게요.”
“너무 솔직하네. 마음 아프게.”
뻘쭘하게 시선을 돌리던 다정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아, 이거…….”
물기가 살짝 남아 있는 손수건이었다. 다정은 반듯하게 접은 천 조각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까는 감사했어요. 비누로 깨끗하게 빨긴 했는데…… 그래도 세탁 한 번 더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데인 데는 괜찮아?”
수빈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네. 재킷이 두꺼워서 살았어요. 감사해요. 손수건도, 같이 나서주신 것도.”
“고맙긴. 모자란 놈이 다정이한테 시비를 거는데 두고 볼 수 있나.”
“그 남자…… 누구예요?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던데.”
“강선재라고, 대성 그룹 첫째. 그 집 할아버지기가 우리 할아버지랑 오래된 사이라 어릴 때부터 자주 봤어. 모임 나가면 애들끼리 앉는 테이블도 따로 있고 그랬지.”
“아…… 그렇구나.”
티브이에서만 보던 거대한 기업 이름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다정은 괜히 샌드위치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떨궜다.
그러자 수빈이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선재 형은 너한테 쓸데없이 화풀이하는 거야. 네가 기죽을 필요는 없어.”
“화풀이라니, 저한테 왜……?”
“그 인간은 옛날부터 차태상을 싫어했거든. 나이는 자기가 두 살 위인데 맨날 뭘 해도 지니까 꼴도 보기 싫었겠지.”
“…….”
수빈의 말인즉슨 그가 태상과 경쟁 관계였다는 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게 날을 세우고 달려드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조용히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수빈이 툭 던지듯 말을 이었다.
“근데 약혼까지 그렇게 됐으니 더 난리를 치는 거지.”
“무슨 약혼이요?”
“…….”
놀란 듯한 시선이 다정에게 향했다. 수빈은 커다란 갈색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그제야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 얘기 들은 적 없구나? 차태상이 결혼할 뻔한 여자가 누구인지. 강미연이라고 선재 형 동생. 한마디로 저 싸가지 없는 남자는, 차태상이 약혼을 깨버린 여자의 친오빠라는 거지.”
“그, 그래서…….”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는 느낌이었다.
로비에서 제 이름을 듣고 돌변했던 남자의 얼굴. 시종일관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던 태도. 그건 태상의 새 여자친구에 대한 일종의 원망이자 분노였던 것이다.
순간, 다정은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태상이 누군가와 결혼할 뻔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상처가 되는데. 그로 인해 누군가의 미움까지 받는다니 상처 위에 굵은 소금이 팍팍 뿌려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저분이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저 만나러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우리 회사 광고 기획 때문에 온 거야. 영 모자란 인간이긴 해도 선재 형, 대성 기획에서 마케팅 총괄을 맡고 있거든.”
“아…….”
“선재 형이 또 괴롭히면 나한테 연락해. 나 오늘 하루 종일 교육동에 있을 거니까.”
수빈이 어깨를 쭉 펴며 말했다.
다정은 그 모습을 의아한 듯 가만히 바라봤다. 지난번 예술제 때도 느낀 거지만 그는 저를 돕는 일을 당연하다는 듯 자처했다.
맹목적이랄까, 아니면 헌신적이랄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다정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씀은 감사한데…… 저 도와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난 너를 도와주려는 게 아니야.”
수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지키려는 거야.”
“…….”
확고한 그의 말에 다정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왜 저를 지켜주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지, 애초에 뭐로부터 저를 지킨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들리나? 근데 그래도 그게 사실이야. 난 너를 처음 구해준 순간부터 계속 네가 안전하기를 바랐어. 다시 만난 지금은 너를 지켜주고 싶고.”
“아…….”
그에게 저를 지키는 일은 오래된 습관이자 일종의 본능 같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그만큼 강렬하고 깊게 남는 것이니까. 하지만 또 동시에 언제까지고 짊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하고.
다정은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전 정말 괜찮아요.”
다정이 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곤 제 앞에 쌓여 있던 음식들을 전부 수빈 앞으로 밀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지키겠다는 부담감은 내려놓아도 돼요. 이런 것도 다 본인을 위해서 사고요.”
“……그래.”
수빈은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럼 전 먼저 가 볼게요. 이제 교육 시작할 시간이라.”
다정은 가벼운 바람을 일으키며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둑한 그의 얼굴이 마음 쓰였지만 모른 척했다.
언제까지고 그의 기억 속의 한다정이 되어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다정은 태상과 함께 식탁을 치우고 있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그리고 뒷정리를 하는 지금도 다정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했다.
수빈과의 인연을 말해야 하는 걸까.
태상은 평상시 수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없었다. 제가 가족에 대해 물을 때에도 명옥은 ‘그 여자’, 수빈은 ‘그 여자의 아들’로 언급할 정도로 냉랭했고.
자연스레 말할 기회를 찾기를 한참. 짧은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다음 주에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어.”
느릿한 손길로 접시를 치우는데 태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네? 집에……요?”
“할아버지께서 계속 보채서.”
“좋아요!”
다정이 활짝 웃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답이 튀어나오는 거로 보아 내심 차 회장을 또 만나고 싶었던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되면 수빈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왜 이렇게 좋아하지?”
“네? 아니, 그냥…… 좋잖아요. 인사드리는 거.”
다정이 싱크대 수전을 올리며 말했다. 접시 위에 묻은 소스가 빠르게 씻겨 내려가며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그냥 둬.”
“제가 하고 싶어서 그래요. 어차피 몇 개 되지도 않는 걸요.”
집안일은 그냥 두면 가사 도우미분께서 해주실 거였다. 하지만 다정은 설거지만큼은 직접 하는 걸 선호했다.
음식 냄새를 깨끗이 없애고 싶어서이기도 했고, 요리를 해준 태상에 대한 보답의 표시이기도 했다.
“태상 씨는 쉬어요. 이건 제가 할게요.”
다정은 그렇게 말하며 수세미를 집어 들었다. 세제를 조금 묻혀 비비자 몽글몽글한 거품이 올라왔다.
태상은 컵 하나를 싱크대 안으로 밀어 넣고 그 옆에 기대듯 섰다. 편안하게 내린 머리며 가벼운 옷차림 때문인지 그는 부엌과도 꽤 잘 어울렸다.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예요?”
“아니.”
태상이 느릿하게 허리에 힘을 주며 몸을 세웠다. 반듯하게 서자 키가 한 뼘 정도 위로 쑥 올라갔다. 그는 설거지를 하고 있는 다정의 등 뒤로 와서 섰다.
“아…….”
순간, 접시를 문지르던 다정의 손이 우뚝 멈췄다. 허리를 파고드는 묵직한 감각 때문이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굳어진 채 시선만 아래로 살짝 떨어뜨리자, 제 허리를 장악한 태상의 팔뚝이 보였다. 굵은 뼈마디가 연한 살을 파고들 듯 바싹 감겨 있었다.
“가, 가서 쉬라니까요…….”
“쉬고 있잖아.”
태상은 다정의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 목덜미 위에 자기만의 공간을 마련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동그란 곡선 위에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파묻혔다.
완벽히 밀착된 등, 꽉 감긴 허리. 틈 없이 맞닿은 목덜미까지.
태상의 체온과 향이 온몸에 눅진하게 배인 것 같았다. 다정은 그의 품 안에 완벽하게 갇힌 채 가늘게 숨을 내쉬었다. 태상과의 스킨십은 언제나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편하다.”
태상이 가볍게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살결이 부드럽게 마찰했고, 귓바퀴에 머리카락 스치는 소리가 고였다. 다정은 놀라 어깨를 작게 움찔했다.
그러자 그 움직임이 마음에 들었는지 태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웃는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가볍게 터져 나오는 그의 숨결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저 설거지해야 돼요…….”
다정이 숨결에서 느껴지는 간지러움을 참아내며 말했다.
“해. 난 방해 안 할 거니까.”
태상이 어깨 위에 턱을 괸 채 말했다. 힘을 주고 자기 무게를 버티고 있는지 등허리며 어깨가 하나도 무겁지 않았다.
다정은 곁눈질로 살짝 태상을 노려봤다. 그가 절대 저를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