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밝혀진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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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밝혀진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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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밝혀진 정체
2023.05.25.
‘뭐, 뭐지……?’
힐끔힐끔. 대화를 나누는 내내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 향했다.
“다정아.”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 어느새 곁에 다가온 영은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뭐 해?”
“어? 아, 아니…….”
분명 아는 사람은 아닌데.
엉겨 붙는 남자의 시선 때문에 자꾸만 기억을 되짚어 보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기억나는 건 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영은이 너도 오늘 교육이야?”
“응.”
“같은 그룹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왠지 모르게 피하고 싶은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다정은 친구의 팔을 잡아끌며 식당으로 향했다.
그간 비행은 어딜 다녀왔는지, 오늘 시험은 잘 본 것 같은지. 바쁘게 재잘거리다 보니 금세 식당 앞에 도착했다.
벽에 걸려 있는 오늘의 메뉴를 확인한 영은은 발랄하게 손뼉을 쳤다.
“아싸, 불고기! 많이 떠야지.”
“내 것도 다 줄게. 많이 먹어.”
“왜? 너 불고기 싫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요새 너무 잘 먹어서. 살찔까 봐.”
태상과 함께 살기 전, 그는 분명 부엌을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다정은 신식 인테리어와 좋은 조리 기구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매일 배달되는 신선한 식재료, 효성 호텔 헤드 셰프가 직접 만든 밑반찬, 전 세계에서 사 모은 간식이며 디저트.
일상이 이런 식이니 살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허리춤을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영은이 어깨를 터프하게 툭 치며 입을 열었다.
“야, 오후에 비상 훈련이야. 살이고 뭐고 일단 먹어.”
그녀는 의지에 불타는 눈을 하고서 식판을 집어 들었다.
그간의 밀린 수다를 떨며 차례를 기다리자 어느새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배식대 앞에 다다라 있었다.
다정은 음식을 조금씩 덜어 담으며 옆으로 한 칸씩 움직였다. 마지막 반찬까지 다 뜨고 이제 자리에 앉을 일만 남았는데.
“앗!”
뒤로 돌아서는 순간, 식판이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혔다.
동그란 홈에 담겨 있던 미역국이 출렁이며 넘쳤고, 반찬들도 제 자리에서 튕겨 나가며 유니폼을 더럽혔다.
깨끗하던 재킷이 어느새 다양한 색으로 물들었다. 다정은 갑자기 생긴 의문의 벽을 향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단단한 벽은 짜증 섞인 말을 토해냈다.
“눈을 도대체 어디다 두고 다니는 겁니까?”
“…….”
매서운 눈매에 멀대같이 큰 키. 조금 전 로비에서 마주쳤던 남자가 분명했다.
그는 양복에 묻은 불고기 양념을 불쾌하다는 듯 털어내며 다정을 사납게 노려봤다.
다정은 황당해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마지막 반찬이 놓여 있는 이곳은 누가 봐도 사람이 몸을 돌리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이렇게 가깝게 서 있었으면서 남의 탓을 하다니. 게다가 뜨거운 국으로 범벅이 된 저를 보며 괜찮냐는 말 한마디도 없고.
순한 눈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이렇게 바짝 붙어 계시는데 어떻게 안 부딪칠 수가 있겠어요. 옷을 버린 건 죄송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하,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뭐라는 거야…….”
혼잣말처럼 작게 읊조리는 투였지만 확실히 들렸다. 까칠한 반발이며, 적반하장이라는 어이없는 한 마디가.
다정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잘 들었으면서 뭘 또 묻습니까? 그리고, 잘못을 했으면 사과를 할 일이지 어디다 대고 훈계 질이에요?”
“훈계라뇨, 그런 적 없습니다.”
“이봐요, 양복 망가진 거 안 보입니까? 그냥 좋게, 좋게 넘기려고 했더니만 안 되겠네…… 그쪽, 이름이 뭡니까.”
“…….”
지금까지 조곤조곤하고 정중한 투로 말을 이어오던 다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남자에게 그런 정중함은 사치인 것 같았다.
다정은 식판을 옆에 내려놓고 남자를 쏘아봤다.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제 이름을 물으시는 거죠? 그리고 세탁비라면 정중하게 청구하는 게 예의 아닐까요?”
“뭐요? 지금 어디다 대고…….”
“여전하네.”
두 사람의 눈이 허공에서 매섭게 부딪친 그때, 가벼운 음성이 긴장된 공기를 훅 가르고 들어왔다.
“……?”
다정은 어리둥절했다. 부드러우면서 경쾌한 목소리가 마치 수빈의 것 같았다.
의아함을 가득 안고 고개를 돌리는데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눈썹 선에 맞춰 깔끔하게 자른 앞머리, 몸에 딱 맞는 세련된 군청색 슈트.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수빈이었다. 다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낯선 모습을 하고 있을 뿐.
다정은 입을 작게 벌리고 그를 바라봤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데 옆에서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수빈……?”
남자는 눈썹을 찌푸린 채 수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여전하네? 직원들 막 대하는 거?”
남자는 잠시 멍하니 그를 들여다보다 이내 가볍게 입을 열었다.
“……한량인 줄로만 알았는데 네가 회사엔 어쩐 일이냐?”
“왜긴, 이런 일이 있을까 봐 왔지. 누가 우리 직원 괴롭힐까 봐.”
“뭐?”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냐는 듯 그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대성에서는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여긴 아니야. 우린 남의 귀한 집 딸, 이런 식으로 막 대하지 않는다고.”
수빈이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그는 안타까움이 담긴 눈길로 다정을 바라보며 엉망이 된 재킷을 살짝 닦아냈다.
“괜찮아요?”
“네……. 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다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겨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어떻게 된 건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수빈은 차갑지만 여유로운 얼굴로 다시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게 왜 사람 지나다니는 길에 병풍처럼 서 있고 난리야. 키만 멀대같이 커 가지고.”
“벼, 병풍? 차수빈, 여기 회사다. 말 가려서 해.”
“먼저 선 넘은 게 누구시더라? 꼴사납게 화풀이나 하면서?”
“……?”
순간, 다정의 고개가 남자를 향해 빠르게 돌아갔다. 화풀이라니. 그건 무언가 앞뒤 사정이 있어야지만 가능한 일인데.
제가 무언가 놓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정은 남자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자 그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자는 빠르게 눈을 돌리더니 수빈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하, 얼마 전에 미연이 만나서 빌었다더니 여기서는 뭐라도 된 거 마냥…….”
남자가 수빈의 사원증을 거칠게 낚아채며 말을 이었다.
“꼴랑 과장 자리 하나 꿰차고서.”
“과장이든 뭐든, 난 적어도 동생한테 승진 추월은 안 당했어.”
“뭐? 너 그게 지금…….”
남자는 언성을 높이다가 빠르게 입을 닫았다. 더 말을 할수록 제 치부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싶었다.
그는 이를 가는 듯한 눈빛으로 수빈을 바라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하여간 차수빈 너랑 얽히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어.”
“별말씀을.”
남자는 수빈의 얼굴을 한번 노려보고 몸을 빠르게 돌렸다. 기다랗고 마른 다리가 신경질적으로 사람들 사이를 헤쳤다.
다정은 주위 시선을 살피며 조용히 수빈에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수빈 오빠 우리 회사 직원이었어요?”
“질문은 좋은데…….”
수빈이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이쪽으로 쏠려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단박에 느껴졌다.
“우리 일단 나가야겠는데?”
“네…… 그래야겠네요.”
“별관 편의점으로 와. 샌드위치라도 먹자.”
수빈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먼저 식당을 빠져나갔다. 다정은 엉망이 된 식판을 정리한 후, 자리를 나섰다.
우선은 유니폼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화장실로 향한 다정은 수전을 끝까지 올렸다.
물을 묻혀 재킷과 치마를 닦아내고, 손수건을 빨고, 핸드타월로 물기를 찍어 내고.
연신 바쁘게 손을 놀리는데, 직원 두 명이 재잘거리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진짜? 외국에 나가 있다던 둘째가 방금 저 사람이라고? 그냥 과장인데?”
“사람들 눈이 있으니까 그냥 과장부터 시작하는 거야.”
“대박. 그럼 저 사람이 바로 그 ‘치맛바람’ 아들인 거 아냐.”
“치맛바람? 아…… 본부장님? 맞아, 엄마가 뒤에서 엄청 밀어준다더라. 근데, 정작 본인은 회사 일에 별 욕심 없대.”
“그걸 어떻게 알아?”
“외국에서 하던 게 경영 수업이 아니라 사진 찍는 일이었대. 전업 사진작가.”
순간, 다정의 손이 우뚝 멈췄다.
외국에서 사진을 찍다가 들어왔다는 남자. 그건 수빈을 뜻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그가 명옥의 아들이라는 뜻이었고.
다정은 당혹스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제겐 너무 고마운 수빈이 그 여자의 아들이라니. 게다가 태상과 라이벌 관계에 놓인 사람이라니.
사고가 정지하기라도 한 듯,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
별관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 안.
두 사람은 좁은 취식대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다정은 손에 쥔 캔커피를 만지작거리며 유리에 비친 수빈을 바라봤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봐서 그럴까. 갑자기 그의 얼굴 위로 명옥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닮은 구석도 별로 없는데 괜히.
작게 한숨을 쉬며 계속 바라보는데 순간, 유리창에 비친 그와 눈이 맞았다. 다정은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
“이것도 좀 먹으라니까.”
수빈이 샌드위치며 김밥을 옆으로 쭉 밀며 말했다. 입맛이 없다며 커피만 골랐는데 그가 굳이 사다 놓은 것들이었다.
“저는 괜찮아요. 수빈 오…… 드세요.”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부르던 다정이 급히 말을 돌렸다.
뭐라 부르면 좋을지 몰랐다.
그는 제게 여전히 같은 사람이었지만 주위 상황은 너무 많이 변했다. 더 이상 전처럼 그를 편하게 대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왜? 어색해?”
수빈은 제가 무언가 눈치챈 걸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평소처럼 명랑했고 조금 덤덤했다.
“……네. 과장님이신 거죠?”
“응.”
“언제부터요?”
“음…… 정식으로 발령 난 건 어제. 근데 사실 그렇게 말하면 좀 부정확한 거고.”
“그럼요?”
“태어나면서부터? 이 집 아들이니까.”
그가 싱긋 웃으며 건물 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