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7. 그와 그 녀석이 함께하는 시간 (67/89)


67. 그와 그 녀석이 함께하는 시간
2023.05.21.


태상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설명을 보탰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모티브가 후반부로 갈수록 확장되는 게 이 곡의 특징이죠. 내 기억이 맞다면 베토벤 7번 소나타인 것 같은데?”

“네…… 맞아요.”

“마음에 들어요.”

설명에 비해 감상이 지나치게 짧았다. 마치 잘 나가다가 삐끗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영진은 태상의 그런 태도가 좋았는지 픽 하고 웃음을 흘렸다.


“저도 뭐, 싫지는 않아요.”

부드럽다, 까지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가벼운 분위기. 다정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영진이 너 배고프다며.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응.”

세 사람은 공연장을 나와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란히 걷는 동안 태상은 피아노에 대한 질문 몇 개 툭툭 던지며 가볍게 대화를 이끌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질문과 대답. 처음에는 둘 다 너무 퉁명스러운 거 아닌가 싶었는데 듣다 보니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다정은 살짝 뒤로 빠져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봤다. 널찍한 두 개의 등이 흐뭇하고 든든했다.


“뒤에 같이 타.”

어느새 다다른 차 앞에서 태상이 뒷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다정은 작은 미소로 고마움을 표하고 영진과 나란히 앉았다.

달칵, 안전벨트를 매자 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밀려 나갔다.


“근데 형은 왜 직접 운전해요?”

차가 도로로 진입하자마자 영진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무슨 뜻인가 싶어 동생의 옆얼굴을 바라보는데 그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원래 재벌 몇 세, 이런 사람들은 직접 운전 안 하잖아요.”

순간, 다정은 놀라 그대로 굳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고 머릿속에서 각종 오프닝 멘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마치, 리허설이 한창인 무대가 갑자기 공개된 느낌이었다. 다정은 놀라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너, 너, 그거 어떻게…….”

“누난 내가 뉴스도 안 보는 줄 알아?”

“……아.”

잊고 있었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 너무 자연스러워 그가 유명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애초에 돌려 말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던 건데.

다정은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태상을 바라봤다. 백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형은 직접 운전하는 게 더 좋아요?”

영진이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며 다시 물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올 때는 비서님이 운전했고.”

“비서님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학교. 내가 부탁드린 일이 있거든.”

동생의 제안으로 태상은 조금 전부터 말을 편하게 낮추고 있었다. 다정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학교요? 무슨 부탁을 했는데요?”

“함께 공연한 친구들도 식사는 해야 하니까.”

“아…….”

다정의 얼굴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어렸다.

레스토랑 예약에 친구들 식사까지. 그가 자꾸 이렇게 영진을 챙기니까 오히려 제가 못난 누나가 되는 것 같았다.

일순, 꽃다발이라도 사 왔어야 하나, 하는 묘한 위기의식마저 들었다.


“애들이 어디 뷔페 간다고 하던데 그게 형이 한 거예요?”

“응.”

“그랬구나. 감사해요.”

걱정한 것과 달리 영진의 반응은 담백했다. 요란스러운 감동이나 호들갑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건 입이 떡 벌어지는 태상의 배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다정은 일관되게 차분한 동생의 반응이 신기하면서도 다행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 말도 안 된다,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다면 솔직히 꽤 상처를 받았을 것 같다.

세상사에 달관한 듯한 동생의 성격이 이럴 때는 참 도움이 되는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는데 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멈춰 선 곳은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앞이었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는 레스토랑은, 내부 인테리어가 모던하면서 깔끔했다.


“많이 먹어.”

“네. 형도요.”

리허설을 하느라 김밥 한 줄로 대충 식사를 때운 영진, 아점밖에 먹지 않은 다정. 거기다 하루 종일 일에 몰두한 태상까지.

식사를 하기 애매한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모두 배가 고픈 상태였다.

요리가 나오고 태상은 단정한 자세로 식기를 들었다. 그가 시킨 메뉴는 그릴에 구운 새우에 채소를 곁들인 요리였다.

다정은 순간 긴장했다.


‘설마…….’

또 제 접시로 음식을 덜어주는 걸까.

혹시 모르니 그러지 말라고 말을 해 두려는데, 깔끔하게 조각난 새우가 벌써 제 접시 위로 넘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딱 맞는 변명과 함께.


“파스타에 들어간 새우는 조금 부실한 것 같네.”

다정이 시킨 파스타는 다양한 종류의 해산물이 골고루 들어간 파스타였다. 새우가 메인인 태상의 요리에는 비하면 부실한 게 당연했다.

그는 괜한 재료 탓을 하며 부지런히 새우를 날랐다.

힐끔.

영진은 그 모습을 가볍게 훑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살짝살짝 태상의 행동을 스캔하는 게 속으로 제 나름의 평가 같은 걸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다정은 바삐 태상을 말렸다.


“그만 주세요. 태상 씨,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잖아요.”

“……형, 오늘 한 끼도 못 먹었어요?”

영진이 입가로 가져가던 포크를 내려놓고 멍하니 물었다.


“바빠서.”

태상은 담백하게 답하며 다시 새우 한 조각을 넘겼다.


“토요일인데…….”

영진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이었다.


“평소에도 이렇게 바빠요?”

“그렇지.”

“그럼 결혼 후에는요? 결혼하고도 이렇게 바쁘게 일할 거예요?”

“아니, 일을 줄여야지.”

“크, 크흡!”

갑자기 결혼이라니. 왜 얘기가 그쪽으로 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레가 걸린 다정은 입가를 가린 채 연신 콜록거렸다.


 


“괜찮아?”

태상이 냅킨 한 장을 쥐어 주며 말했다.


“네. 괘,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건 놀란 심장뿐이었다. 다정은 입가를 빠르게 닦아내며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태상은 그 모습을 천천히 살핀 후, 다시 영진을 바라봤다.


“일은 어디까지나 가정을 잘 지키기 위해 하는 거지, 그 반대가 아니야.”

“근데 형 무지 바쁘잖아요. 오늘 토요일인데 밥도 못 먹었다면서요.”

“못 먹은 게 아니라 안 먹은 거야. 일하는 도중에 밥을 먹으면 능률이 떨어지니까. 그리고……”

태상이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우선순위가 뭔지 정도는 알고.”

“…….”

그의 우선순위로 지목된 다정은 얼굴을 잔뜩 붉혔다.

결혼, 그 후의 생활. 사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먼 미래의 이야기 같아서이기도 했고, 그저 지금의 관계가 너무 만족스러워서이기도 했다.

다정은 이쯤에서 영진을 말려야겠다 싶었다. 아무래도 이런 대화는 어른들의, 그리고 우리 둘만의 이야기인 것 같았다.


“영진…….”

“결혼하면 누나 일은요? 일 못 하게 할 거예요?”

입을 열려는 그때, 그가 다정도 내심 궁금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다정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귀를 활짝 열었다.


“그건…….”

태상이 어려운 질문이라는 듯 쓰게 신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상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유독 견디기 힘들어했다. 공항 주차장에서 내내 초조하게 기다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도 불안해질 정도였다.


“그건 힘들지만 내가 참아야지. 어떤 일을 할지, 얼마나 오랫동안 할지, 그건 모두 본인이 결정할 일이니까.”

“…….”

모범 답안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바싹 조인 눈썹은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태상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주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 듯싶었다.


“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지면 그땐 협상의 여지가 없어. 비행은 절대 안 돼.”

“그…… 건강 안 좋은 건, 척도가 뭔데요?”

가만히 듣고 있던 다정이 슬쩍 말을 얹었다.

‘건강 악화’라는 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변명이었다. 저는 괜찮은데 안색이 안 좋아 보여, 라고 하면 뭐라 할 말도 없는 거니까.

다정과 영진의 시선이 태상의 입으로 모였다. 어느새 분위기는 태상의 결혼 청문회로 번져가고 있었다.


“건강 검진.”

“……네?”

의외로 너무 객관적인 지표였다. 다정은 놀라 고개를 갸웃거렸고 영진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효성 병원에서 제공하는 정밀 검진을…… 1년에 두 번 정도는 받아야겠지.”

“1년에 두 번이요? 치과 스케일링도 아니고 누가 건강 검진을 6개월에 한 번씩 받아요?”

다정이 농담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태상은 진지하고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시차를 넘나드는 일이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가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

“그, 그거야…….”

이제 다시 할 말이 없어진 건 다정이었다. 사실, 젊은 나이에 벌써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떨떠름하게 입술을 말아 무는데 영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형 되게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네요.”

“그렇게 자랐어.”

“저, 형 되게…….”

영진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되게 마음에 드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거든요.”

“동감이야.”

태상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말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꽤 즐거운 듯 반짝거렸다.


“처남.”

 

 

***

비행 대신 정기 안전 시험이 예정된 오늘, 다정은 오랜만에 교육동을 찾았다.

갓 입사한 병아리 때에는 매뉴얼을 머릿속에 통째로 집어넣고도 불안해했는데. 어엿한 중닭이 된 지금은 시험을 치다 말고 점심 메뉴 고민을 하는 여유까지 생겼다.


“자, 이제 제출하십시오.”

시간이 다 되자 교육관이 단상 위로 올라섰다.


“다음에 다룰 내용은 비상착륙 훈련인 거 아시죠? 점심 든든하게 챙겨 먹고 1시까지 모크업(비행기 모형)으로 오십시오.”

“네. 수고하셨습니다!”

“교육관님도 식사 맛있게 하세요.”

밝고 경쾌한 인사가 공기 중에서 화음을 이루었다.

다정은 지갑만 챙겨 들고 가뿐하게 문을 나섰다. 식당으로 가기 위해 로비를 지나는데 한 무리의 외부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정장 차림에 방문증을 목에 건 사람들. 딱 봐도 업무차 교육동을 방문한 손님이었다.

다정은 빨라지는 걸음을 자제하며 우아하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때, 무리 중앙에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남자와 눈이 맞았다. 뾰족한 눈초리로 사람을 위, 아래로 훑는 게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눈초리가 하도 날카로워 다정은 괜히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걸음이 빨라졌다.

로비 한쪽 구석에서 통화를 하던 동기 영은이었다.


“영은아.”

“어? 야, 한다정.”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는데 순간, 남자의 고개가 이쪽으로 향했다.

의아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를 잠시, 그는 근처에 서 있는 남자 한 명에게 손짓을 했다.

한 번 가볍게 까딱. 참 교양이 없기도 하구나, 싶은데 불려간 남자가 바짝 고개를 숙이며 그의 앞에 멈췄다. 두 사람은 고개를 가까이 한 채 한동안 귓속말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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