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그 남자가 등장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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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그 남자가 등장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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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그 남자가 등장하는 법
2023.05.18.
***
피아노 연주가 시작된 대공연장 안.
다정은 맨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보통 혼자 온 경우라면 그냥 끝자리를 택하겠지만 다정은 달랐다.
오지 못하는 사람인 줄 알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한 자리를 꼭 비워두고 싶었다.
소란스럽던 장내가 조용해지고 연주회가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낸 건 피아노 학과 1학년 학생이었다.
다정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편안하게 연주를 감상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이자 시간이 물 흐르듯 부드럽게 흘렀다.
이윽고 찾아온 3학년 학생의 차례.
작게 박수를 치는데, 옆 좌석에 앉은 중년 여성이 유난히 손뼉을 크게 치는 게 느껴졌다. 힐끗 바라보니 얼굴에 커다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엄마도 살아계셨으면 저랬을 텐데.
다정은 오랜만에 그런 생각에 잠겼다. 평소 같으면 잘 떠오르지 않는, 그리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는 생각이었다.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때, 무릎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손이 갑자기 붕 떠올랐다.
다정은 손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
조금 전까지 분명 비어 있었는데. 다정은 제 손을 쥐고 앉은 태상을 멍한 얼굴로 바라봤다.
턱 밑까지 꽉 잠근 단추, 흐트러짐 없이 반듯하게 넘겨 올린 머리.
유난히 크게 부푸는 가슴만 아니면 그는 평소 모습과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많이 기다렸지.”
태상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목 언저리에 살짝 맺힌 땀이 그제야 보였다.
“…….”
다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안 오겠다고 메시지를 보내 왔는데. 게다가 지금쯤 회사는 난리가 나 있을 텐데.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태상의 존재가 믿기지 않았다.
“미안해.”
“뭐, 뭐가…….”
“혼자 둬서. 그리고…….”
천천히 말을 잇는데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태상은 허리를 옆으로 접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귀에 닿을 듯 가까웠다.
“자꾸 참게 만들어서.”
더운 숨결 때문인지 그의 말 때문인지, 귓바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정은 시선을 떨구며 작게 속삭였다.
“벼, 별로 참은 거 없어요.”
“하루에 두 번은 안 속아 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서 천천히 멀어졌다. 태상은 꼭 쥔 손을 끌어다 제 허벅지 위에 누르듯 붙여 놓았다.
위로는 커다란 그의 손, 아래는 돌처럼 단단한 허벅지. 다정은 사이에 끼인 제 손이 조금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때, 연주자가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첫 음이 울리자 태상은 그 소리에 맞춰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느릿하고 집요한 움직임이었다. 제 손을 서서히 장악하는 것만 같은. 그는 더 들어갈 곳이 없을 때까지 손가락을 꽉 끼웠다.
이대로 꼭 움켜쥐겠지. 속으로 그렇게 예상하는데 태상이 의외로 손가락을 느슨하게 풀었다.
꽉 맞물린 손마디 사이로 반지의 존재감을 느낀 듯했다. 아프지 않게 손에 살짝 힘을 뺀 그는 약지를 뾰족이 세워 반지 주위를 빙글빙글 쓸었다.
꽤 마음에 든다는 표현 같았다.
다정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 설핏 웃었다.
“집중해야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타고 흘러, 다정의 귓가에 고였다. 다정은 그를 장난스럽게 노려보며 작게 말했다.
“저는 하고 있어요. 태상 씨야말로 집중해요.”
“……맞아. 그래야겠지.”
태상이 의외로 선선히 인정했다. 묘하게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는 남자답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동자가 옆으로 향하는데 그가 한 손으로 재킷 단추를 풀었다.
툭,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검은 원단이 좌우로 빠르게 갈라졌다.
태상은 꼭 쥔 손을 끌어다가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었다.
“……?”
집중하는 것과 주머니가 무슨 상관인지.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가만히 집중하는데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겹쳐 잡았다가, 깍지를 겼다가, 꼭 움켜쥐었다.
좁은 공간 속, 이리저리 움직이는 손이 마치 입에 들어간 알사탕 같았다.
뜨거운 온도에 감겨 데구르르 구르기를 한참, 그가 느릿하게 움직임을 멈췄다. 드디어 만족스러운 결말을 찾은 듯싶었다.
깍지를 낀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동그란 엄지 끝이 손바닥을 살살 문질렀다.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는 게 참 태상다웠다.
다정은 왠지 수줍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무대 위에서는 어느새 연주자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새 한 곡이 끝나버린 거였다.
-짝짝짝.
공연장 가득 박수 소리가 울렸다. 다정은 머릿속으로 가만히 순서를 떠올렸다. 분명, 이다음이 영진의 차례일 것이다.
“이제 영진이 나와요.”
“기대되네.”
태상이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잠시 후, 연미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영진이 뚜벅뚜벅 무대에 올랐다.
다정은 흐뭇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객관적으로 놓고 봐도 잘생기긴 했지만 이렇게 차려입으면 훨씬 더 멋있는 것 같았다.
무대 중앙에 선 영진은 가볍게 객석을 훑었다. 누구를 찾는 건지 아는 다정은 빠르게 팔을 들어 올렸다.
손을 흔들며 웃어 보이는데 영진이 눈매를 살짝 휘며 따라 웃었다. 그러곤 아주 빠르게, 옆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
힐끗.
마치 너로구나, 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는 다시 객석 중앙을 바라보며 단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늘 들었던, 언제나 마음이 차분해지는 그런 연주였다.
부드러운 선율, 꽉 찬 옆자리. 다정은 지금 이 순간이 오늘 하루 보았던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생각을 했다.
잡고 있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태상이 응답이라도 하듯 부드럽게 힘을 주었다.
다정은 입 모양으로 작게 말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언제든지.’
***
공연이 끝난 후, 영진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기숙사로 향했다.
다정은 두 사람의 만남 앞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집어 먹었다. 한 사람은 의외로 영악했고, 또 한 사람은 지나치게 압도적이었다.
셋이서 함께하기로 한 식사 자리에서 중간에 낀 제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정은 홀로 조용히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 편안한 차림의 영진이 로비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회색 와이셔츠가 어깨에 잡힌 각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다정은 태상을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있잖아요, 저 아직 태상 씨에 대해 한마디도 안 했거든요?”
“내가 직접 하지.”
“아, 그게…….”
다정이 조금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그냥 좀 돌려 말하는 게 어떨까요? 태상 씨가 누군지 알면 영진이가 많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은데.”
“어떻게 돌려 말한다는 거지?”
“그냥 상사라고요. 사무직이라 본사에서 일하는데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렇게요. 사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잖아요. 영진이가 괜히 거리감 느끼…….”
“한다정.”
“네?”
태상이 한발 앞으로 가깝게 다가와 섰다. 진한 우디 향이 기분 좋게 공기를 장악하는데 그가 묵직한 음성을 흘렸다.
“봐. 저기 영진이.”
“……?”
다정은 그의 손가락을 따라 멍하니 고개를 움직였다. 거기에는 무심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영진이 있었다.
“다 큰 남자야.”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다정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네가 누나라도, 지금까지 키우듯이 살았대도.”
“…….”
“어엿한 남자야. 그러니까 걱정 그만해.”
다정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보면 자신은 하루 종일 안절부절 영진 걱정뿐이었다.
사고가 났던 날의 이야기를 꺼내면 괜히 상처받지는 않을까, 제가 혼자 객석에 있는 모습을 보면 쓸쓸해하지는 않을까.
그때마다 덮어주고 호응해주는 수빈이 있어 표가 나지 않았지만, 생각해 보면 저는 영진을 어린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태상의 말은 마치 잠을 깨우는 알람시계 같았다. 다정은 입술을 살며시 깨물었다.
“하나하나 다 보호해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 그리고 어차피…….”
“……?”
“보통은 아닐 거야.”
태상이 느긋한 시선으로 영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새 표정이 읽힐 만큼 가까워진 동생은 제법 날카로운 눈매로 태상을 훑어보고 있었다.
제법 삐딱한 표정. 그 안에서 드러나는 건 약간의 호기심과 꽤 노골적인 불만이었다.
온다고 했다가, 안 온다고 말을 바꾸고, 그런 주제에 또 멋대로 나타나고. 그런 태상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잘…… 지내주세요.”
다정은 그 한 마디만 겨우 뱉어냈다. 제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건 아무래도 저만의 착각이었던 듯싶었다.
“누나.”
거리가 한껏 가까워지자 영진이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딱 무례하지 않을 거리에서 스캔을 마치는 게 영리한 동생다웠다.
다정은 환하게 웃으며 영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공연 멋있더라? 전보다 더 잘 치는 거 같아.”
“지난번 공연 때도 그 칭찬이었어. 누나, 창의력과 기억력이 동시에 부족해.”
“그럼 지난번하고 똑같이 잘 쳤어. 이제 됐지?”
영진은 담담한 얼굴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다정이 영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인사해. ……네가 보고 싶다던 사람.”
다정은 낯간지러운 남자친구 소리 대신 적당한 말로 태상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한영진이에요.”
언제 삐딱하게 굴었냐는 듯, 영진이 단정하게 허리를 숙였다. 또렷한 눈매며 차분한 목소리에서 제법 똘똘한 느낌이 났다.
“차태상이에요.”
태상이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말을 이었다.
“연주 잘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하는 말과 달리 표정은 그저 덤덤할 따름이었다.
“빠른 템포 안에서 다양한 테크닉을 구사하는 기술이 아주 좋더군요.”
“…….”
영진의 눈동자에 흥미롭다는 기색이 어렸다. 그는 평평하던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태상을 들여다봤다.
“그러셨어요? 그런데 연주자 말고 곡은요? 곡은 어떻게 들으셨는데요?”
담담하고 직선적인 목소리였다. 먼저 아는 체를 했으니 한번 감당해 보라는 듯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