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가족이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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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가족이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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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가족이라는 이름
2023.05.14.
“나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그렇게 말한 수빈은 가볍게 한번 웃어 보이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다정은 다시 침울한 얼굴이 되었다. 태상에게서 온 답장 때문이었다.
거짓으로 보낸 제 메시지에 태상은 알겠어, 라는 짤막한 답장을 보내왔다. 그 뒤로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그렇게 바쁜가…….”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이건 태상답지 않았다. 그는 평소 문자를 짧게, 자주 보냈고 걱정이 될 만한 일이면 바로 전화를 했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내고 벌써 한 시간째인 지금, 그에게서는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다정은 주저하는 손길로 핸드폰을 꺼냈다. 전화를 걸어 보려 화면을 만지작거리는 그때.
“영진이 누나분 맞으시죠?”
“……?”
분명 저를 칭하는 말이긴 한데 목소리가 낯설었다. 의아함에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시선이 닿는 곳에는 영진의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멀리서 보고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았네요.”
그녀가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살짝 펌이 들어간 단발머리, 세련된 바지 정장. 선생님은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정이 그녀와 처음 만난 건, 학기 초 학부모 면담 때였다. 시원시원하고 쾌활한 성격의 그녀는 어색할 틈도 주지 않고 모임을 이끌었다.
“안녕하세요.”
다정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녀가 대뜸 두 손을 부여잡으며 위, 아래로 붕붕 흔들기 시작했다.
“잘 오셨어요.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저를요?”
“네. 이번에 공연장 새로 정비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셨다면서요. 정말 감사드려요.”
“……?”
다정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가서 직접 보세요. 얼마나 예쁘게 바뀌었는데요.”
“아, 저는…….”
“학생들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특히 무대가…….”
함께 온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고 얘기하려는데 그녀가 신이 난 듯 말을 이었다. 그러곤 잡고 있던 손을 끌며 척척 걸음을 옮겼다.
다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연장 안에 들어섰다.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발을 디디자 폭신하게 꺼지며 소리를 흡수했고, 은은한 조명이 구두 위에 부드럽게 맺혔다.
‘여기가 이런 느낌이었나……?’
다정은 작년, 재작년 공연을 떠올리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평범하고 낡은 학교 공연장은 온데간데없었다. 벨벳 소재로 마감된 우아한 객석이며 번듯한 무대가 고풍스럽기 그지없었다.
“교장 선생님께서 얼마나 고마워하시는지 몰라요. 안 그래도 공사하려고 했는데 미루기만 하던 거라…… 아, 말씀하신 대로 가족분들 앉는 자리는 맨 앞에 따로 빼뒀어요.”
“아…….”
다정의 입에서 그제야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저와 영진을 가족이라고 칭할 사람, 동시에 이렇게 완벽한 경험을 만들어낼 사람.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태상밖에 없었다.
“가서 한번 보세요.”
그녀의 손끝이 향하는 곳은 객석 맨 앞줄 왼쪽,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가장 잘 보이는 상석이었다.
다정은 술렁이는 기분을 꾹 누른 채 계단을 내려갔다. 앞줄에 다다르자, 의자 등받이에 ‘가족석’이라고 적힌 종이가 보였다.
한 마디 말이 다정의 마음을 와락 쥐고 흔들었다.
태상이 직접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영진이는 다 내 가족이라고.
다정은 아래로 축 처진 눈을 하고서 웃었다. 어쩐지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어때요? 자리 괜찮죠?”
어느새 곁에 다가온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단순히 학교 시설이 좋아져서라기보다, 영진이에게 가족이 늘었다는 게 기쁜 것 같았다.
다정은 눈매를 곱게 접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네. 너무 좋네요. 감사해요.”
“안 그래도 영진이가 그러더라고요. 이번 예술제는 자기도 좀 기대된다고.”
“그랬나요?”
“네. 아시잖아요? 원래 그런 말, 하는 애 아닌 거.”
“네…….”
“이번 공연에서 칠 곡, 연습도 되게 열심히 했어요.”
다정은 그게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지 알 것 같았다. 표정이 절로 복잡해지는데 그녀가 가볍게 끝인사를 전했다.
“그럼, 저는 바빠서 먼저 가 볼게요. 공연 잘 보고 가세요.”
“네. 다음에 또 봬요.”
다정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멍하니 바라봤다. 영진의 마음을 엿본 것 같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뻘쭘하게 서 있는데 주변 자리가 서서히 차는 게 눈에 들어왔다.
꽃을 든 중년 여성, 번듯하게 차려입은 노신사. 다정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할 만큼 하나도 쓸쓸하지가 않았다.
영진과 저, 둘뿐이던 세상이 태상으로 인해 풍성해진 탓이었다.
다정은 설핏 웃으며 무대를 바라봤다.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면, 입 모양으로 ‘화이팅’을 외쳐도 다 보일 것 같았다.
“다정아.”
조금 숨이 찬 듯한 목소리였다. 다정은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아, 수빈 오빠…….”
공연장을 둘러보는 동안, 수빈의 존재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정은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많이 찾으셨죠? 영진이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얘기를 하다가 그만…….”
“괜찮아.”
수빈이 다소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 다정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착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평소 보지 못했던 답답함 같은 게 느껴졌다.
“미안해.”
그는 대뜸 사과를 던지는 거로 말을 시작했다.
“공연, 같이 보고 싶었는데……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 봐야겠어. 정말 미안해.”
“아…… 저는 괜찮아요.”
다정이 재깍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어차피 태상이 아니라면, 누가 앉아도 제 옆자리는 빈 거나 다름없었다.
다정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같이 시간 보내주신 거만으로도 감사해요. 얼른 가 보세요.”
“미안.”
“수빈 오빠가 뭐가 미안해요. 같이 오기로 약속을 했던 것도 아닌데.”
“그래도 미안. ……나라도 같이 있고 싶었는데.”
그가 힘없이 시선을 떨군 채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을 감춘 듯한 눈이었다.
다정은 감춰진 이야기를 더 묻지 않았다.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어 보이는데 수빈이 느릿하게 발걸음을 뗐다.
어느새 공연장 안에는 연주회 시작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정은 차분히 치마를 정리하며 자리에 앉았다. 벨벳 소재의 의자가 등허리를 포근하게 감쌌다.
어쩐지 가슴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
운전석에 올라탄 수빈은 거칠게 차 문을 닫았다.
아까부터 연신 울려대는 핸드폰 때문이었다. 그는 한숨을 깊게 한 번 내쉬고 전화를 받았다.
발신인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왜, 또.”
「출발했어? 가는 길 맞아?」
명옥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속을 꽉 채웠다.
“전화 끊은 지 10분도 안 됐어.”
「태평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가 봐. 가서 잘 얘기하고.」
“…….”
수빈은 헤드 레스트에 무너지듯 머리를 기댔다.
‘너 미연이랑 친하지?’
전화를 건 명옥은 밑도, 끝도 없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말하는 미연은 제 형수님이 될 뻔했던 대성 그룹의 차녀이다.
‘미연이 누나는 갑자기 왜?’
‘너 사고 기사 난 거 봤어?’
‘……설마 이거 엄마가 한 거야?’
‘그냥 손만 조금 보탠 거야.’
‘이번엔 또 무슨 짓을 한 거야.’
수빈의 추궁에 명옥은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태상이 제 비자금을 털어간 일, 그에 대한 분풀이로 태상에게 불리한 기사를 흘린 일, 그리고 그 덕분에 태상에게 뒤를 밟히게 생긴 일까지.
수빈은 그 길로 전화를 끊고 공연장을 나섰다. 태상이 관련된 이상 일이 좋게 마무리될 리는 없다.
“차태상은 어디까지 아는 것 같아?”
수빈이 여전히 머리를 기댄 채 물었다.
「아직 기자들을 파고 있는 거로 봐서 많이는 아니야. 근데 끈질기게 공통점을 찾는 게, 뒤에 누가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아.」
명옥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난 선재 걔가 이럴 줄은 몰랐다. 자기만 믿으라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나만 차태상한테 던져주고 자기는 쏙 빠지려는 모양이야.」
선재는 미연의 오빠이자, 대성 그룹의 장남이었다.
대성 기획에서 마케팅팀 팀장을 맡고 있는 그는, 어릴 때부터 태상과 밥 먹듯이 비교를 당하며 자랐다. 언사가 혹독하기로 유명한 그의 할아버지로부터였다.
자존심이 유달리 센 선재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태상을 향해 비틀린 분노를 품어왔다.
명옥은 그런 그와 손을 잡고 기사를 내보낸 것이다.
“그러게 왜 선재 형이랑 일을 벌였어.”
「왜긴. 세상 사람들이 다 좋아하는 차태상, 같이 찍어 내릴 사람 찾는 게 쉬운 줄 알아?」
“하아…….”
수빈은 갑갑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미연이 일도 있고 해서, 분명 우리 편이 되어 줄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올 줄이야…….」
혼담이 깨진 후, 선재는 태상을 향해 화를 폭발시킬 기회를 찾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린 명옥이 먼저 선재에게 접근한 것이고.
“선재 형이 뭐라는데?”
「뭐라하긴. 전화해도 받지도 않아. 근데 여기저기서 슬슬 내 얘기가 흘러나오는 게 애초부터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던 것 같아.」
“선재 형답네.”
선재는 태상의 의심이 제게 향하는 것을 우려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이를 갈면서도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던 것이고.
하지만 명옥이라는 눈속임이 있는 지금, 그는 일을 벌이고도 용의 선상에서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다.
한 마디로 손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랄까.
혼자 일을 벌일 능력도 없고, 간사하기는 이를 데 없는 선재다웠다.
「내부자 고발이니 어쩌니 벌써부터 그런 얘기가 나오고 있어. 태상이가 나한테 오는 건 시간문제야.」
“…….”
「그러니까 네가 얼른 미연이 만나 봐. 미연이라면 기사 덮어줄 거고, 그럼 태상이도 더는 못 움직여. 자꾸 파면 할아버님들 심기 불편해지실 거 뻔하니까.」
여전히 상황 파악 하나는 빠른 명옥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네가 나서서 미연이한테 부탁하면 형 챙기는 것 같아서 그림도 보기 좋겠다. 나중에 얘기 돌아서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 테니까, 그것도 잘됐고.」
수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차 회장은 이런 식으로 굽히고, 빌어서 얻어내는 결과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뺏고, 무너뜨려서 쟁취하는 것에 가치를 두었지.
「수빈아, 너 듣고 있어?」
“듣고 있어. 가고 있고.”
수빈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너, 미연이한테 말 잘 해. 우리가 관여됐다는 거 티 내지 말고, 그냥 태상이한테 안 좋은 기사가 난 게 안타깝다는 듯이……」
“끊어.”
「얘, 수빈아, 차수…….」
핸드폰을 조수석으로 던진 수빈은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앞 유리 너머로 꽃다발을 든 사람들이 보였다. 하나, 둘. 그 수를 헤아리던 수빈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대공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