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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미련 ‘차태상탱이’ (64/89)


64. 미련 ‘차태상탱이’
2023.05.11.


‘대성 일보’라는 문구를 확인한 태상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혼사가 틀어진 이후, 대성그룹은 태상의 일거수일투족에 트집을 잡았다. 물론, 그럴 때마다 태상과 효성은 너그럽게 이해를 하며 넘어갔다.

먼저 혼사를 깬 건 태상이었으니 분심을 이해 못 할 것도 없었다.

또한, 대성도 어디까지나 가볍게 찌르는 듯한 기사를 흘릴 뿐이지 결코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건 서로 척을 져서 좋을 게 없고, 양가 회장님의 사이가 깊은 이유에서였다.

한 마디로, 적당히 분심을 표현하고 또 받아주는 느낌이었달까.

하지만 요즘 대성에서 나오는 기사는 결이 조금 달랐다. 일방적이고 감정적이었다.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했고.

출처는 아무래도 그 사람이겠지.

태상은 능력도 없으면서 감정적이기만 한 대성의 장남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답답하던 가슴이 더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또 대성이네요.”

김 비서가 백미러로 눈치만 살피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생각에 잠긴 듯 태상은 아무 말이 없었다.

신호가 바뀌고 차가 부드럽게 출발하는데.


“김 비서님.”

태상이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며 짧은 침묵을 깼다.


“네. 말씀하십시오.”

“일단 기사 출처부터 확인해 주십시오. 기자 이름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인물까지요.”

“네.”

“그리고 우리는 언급된 내용 중 사실인 게 하나라도 있는지, 지금부터 철저히 검토합니다. 하청 업체, 협력 업체 할 거 없습니다. 업무 스케줄, 단가, 노동력. 우리 회사 운영에 들어가는 건 땀 한 방울도 빼놓지 말고 자료로 정리해 올리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미리 열어두었던 메모장에 태상의 말을 빠짐없이 옮겨 적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비상 대책 회의 소집하세요. 회사로 차 돌립니다.”

“네.”

차가 유턴을 하면서 눈앞의 풍경이 한번 휙 바뀌었다, 태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다정이 있는 곳이 점점 멀어져만 갔다.


 

***

포털 사이트 검색어가 죄다 ‘에어 코리아’로 도배가 될 즈음.

뒤늦게 기사를 접한 다정은 놀라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확한 자료까지 첨부한 글은 하나같이 악의적인 의도가 명백했다.

분노와 답답함, 그리고 걱정이 동시에 치솟았다. 다정은 바삐 통화 연결 화면을 불러왔다.

연결 버튼을 누르려는데 순간, 손끝이 멈췄다.


‘바쁘겠지…….’

전화는커녕 문자 하나 확인할 시간도 없을 것이다.

다정은 핸드폰을 가만히 바라보다 메시지 창을 불러왔다.


‘기사 봤어요. 괜찮아요? 바쁘면 무리해서 올 거 없어요. 영진이는 오늘 아니라 다음에 봐도 되니까.’

태상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다정은 눈매를 축 늘인 채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때, 수빈이 곁으로 다가와 고개를 쑥 낮췄다.


“무슨 일 있어?”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양손에 든 그는 호기심과 걱정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 아…… 별일은 아니고요. 아까 말씀하신 그 사고요, 기사로 났더라고요.”

다정이 조금 전에 보던 뉴스 페이지로 화면을 바꾼 뒤, 핸드폰을 가볍게 기울여 보였다.


“음…… 바쁘겠네.”

수빈이 묘하게 눈썹을 찡그리며 주어 없는 말을 던졌다. 그러곤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다정 쪽으로 쭉 내밀었다.

조금 전, 분명 철벽을 쳐도 단단히 쳤는데 그는 기가 죽기는커녕 이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뻔뻔하달까, 태평하달까. 다정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달달한 향이 나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때, 영진이 이쪽으로 가볍게 뛰어왔다.


“누나, 나 리허설 하러 간다.”

“그래. 연습 잘해. 이따 공연 때 보러 갈게.”

“응. 알았어. 근데…….”

영진이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였다. 다정은 어쩐지 그 뒤에 숨겨진 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근데 형은 왜 안 와?”

“그게…….”

“형?”

옆에서 커피를 홀짝이던 수빈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누나 남자친구요. 오늘 제 공연 보러 오기로 했거든요.”

“…….”

수빈이 커피 컵을 느릿하게 입에서 뗐다. 머금은 숨을 가볍게 내뱉는 게 어쩐지 한숨을 쉬는 것 같았다.

다정은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영진아,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누나 남자친구 오늘 못 올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영진은 늘 보이는 담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눈을 똑바로 못 마주치는 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닌 듯싶었다.

순간, 미안하고 아쉬운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영진은 무대에 앉으면 객석이 정말 잘 보인다고 늘 말해왔다. 사람들은 무대만 잘 보인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무대에서도 관객들이 정말 잘 보인다고.

분명, 단란한 가족들 사이에 혼자 앉아 있는 제 모습이 신경 쓰였을 거다. 다정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내가 대신 같이 가줄게.”

어색하게 대화의 틈이 벌어지는데 수빈이 그 자리를 가볍게 꿰찼다.


“네?”

“객석은 한 명이라도 더 많이 차는 게 좋잖아, 안 그래?”

그가 영진 쪽을 바라보며 가볍게 물었다. 영진은 말간 그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럼요. 그럼 수빈 형이 보러 와 주세요.”

“그래. 그럴게.”

몇 시에 시작하는지, 연주하는 학생들은 어떤 친구들인지. 가볍게 설명을 마친 영진은 이따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굳이 안 오셔도 되는데.”

영진이가 자리를 뜬 후, 다정이 수빈을 향해 말했다.


“나 피아노 공연 보는 거 좋아해. 그리고 다정이가 바람맞는 건 못 보겠고.”

바람을 맞았다는 말 때문이지 왠지 가슴이 시린 것 같았다. 일 때문에 바쁜 사람이고 최선을 다해 주었으니 전혀 아쉽지 않은데.


“바람맞은 건…….”

뭐라 변명을 하려는 그때, 손안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하자 태상이 보낸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갈게.’

짧은 한 마디가 다였다. 설명 한 자락 없는.

다정은 두 글자밖에 안 되는 문장을 빤히 들여다봤다. 너무 짧아서, 너무 확신에 차 있어서 오히려 마음이 불안했다.


“저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요.”

다정은 허공에 던지듯 말을 하고 빠르게 복도로 나갔다.

지금쯤 여기 오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지. 약속을 지키려고 미친 사람처럼 굴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복도 구석에 다다른 다정은 재빨리 핸드폰 연락처 목록을 뒤졌다.

‘김 비서님’

다정은 낯선 이름을 찾아 통화 연결 버튼을 눌렀다.

보육원 일로 통화를 할지도 몰라 은혜에게 받아놓은 것인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여보세요?」

연결음이 한참 동안 울린 후에야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안녕하세요. 저 한다정입니다.”

「아, 네…….」

잠깐의 정적 후 그가 의아한 듯 느리게 답했다.


“혹시 지금 통화 괜찮으실까요? 가능하면 태상 씨 없는 곳에서.”

「없는…… 크, 크흠.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구두 굽 소리, 문 여닫히는 소리. 일련의 소음이 뒷배경으로 깔리더니 이내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오전에 난 기사 때문에요. 태상 씨…… 많이 바쁜가요?”

「아, 그거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악의적인 보도일 뿐 사실에 근거한 게 아니니까요.」

그의 대답은 친절했지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아니, 답을 피하는 것으로 이미 완벽한 답변이 되었으려나.

다정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오겠다고 많이 무리하고 있나요?”

「…….」

차마 거짓말은 못 하겠는지 김 비서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괜찮아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네. 사실 지금 상황이 좋지는 않습니다. 기사의 출처를 찾고 있기는 한데, 후속 기사가 줄줄이 터지는 바람에…….」

“…….”

「부사장님께서는 지금 거의 미친…….」

그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잠시 멈췄다.


「거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일에 몰두해 계십니다. 옆에서 말 걸기도 무서울 정도로요. 만약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저에게 대신 거신 거라면 제가…….」

“아,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정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그냥 궁금해서 한번 걸어 본 거예요. 제가 전화했다고, 태상 씨한테는 말하지 말아 주세요.”

김 비서가 의아한 듯 뜸을 들였지만 이내 알겠노라 답을 주었다. 다정은 예의 바른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마쳤다.


“하아…… 이 미련한 거짓말쟁이.”

다정은 어깨를 축 늘인 채 혼자 중얼거렸다.

억지로 무리해가며 약속을 지키는 걸 도대체 누가 반긴다고.

미련한 그의 태도가, 짧기만 한 그의 대답이 얄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다정은 걱정스러움이 잔뜩 묻어난 얼굴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태상 씨, 영진이가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공연에는 못 나가게 됐어요. 저는 같이 병원 갔다가 집으로 갈 테니까 학교에는 오지 마세요.’

거짓말을 하는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태상은 누구보다 짊어진 게 많은 사람이었다. 동시에 어떤 힘든 내색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원래 그런 성격이다, 그렇게 살아온 거니 어쩔 수 없다. 다정은 그렇게 편히 생각하고 싶지 않아다. 태상의 곁에서 그의 짐을 나눠 들고 싶었다.

다정의 손끝이 전송 버튼으로 향했다.

***

다정은 수빈과 함께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곳곳에 설치된 조형물, 수준 높은 그림 전시. 학교 안은 아름다운 것들로 가득했지만 다정의 마음은 영 즐겁지 못했다.

아직도 바쁘겠지, 오늘 하루 힘들겠지.

태상에 대한 걱정이 몽글몽글 차올라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다정은 그렇게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학교 안을 돌아다녔다.

어느덧 공연을 앞둔 시간.

대공연장 입구에 도착한 다정은 입구에 놓인 팸플릿을 들어 올렸다. 작은 종이 위에는 연주자 학생들의 이름과 곡명, 그리고 순서가 적혀 있었다.


“영진이는 맨 마지막 순서네?”

“네. 보통 그렇더라고요.”

“제일 잘 치나 보다.”

“그냥 학년이 높은 거예요.”

수빈의 장난에 다정이 입꼬리를 가볍게 끌어 올렸다.

예술제를 둘러보는 내내 그는 장난을 치거나 맛있는 간식을 사 오며 제 기분을 달래주었다. 그럴 이유도, 의무도 없는데. 다정은 미안한 마음에 애써 밝게 웃었다.


“들어갈까?”

“네.”

그때, 수빈의 주머니 안에서 가벼운 진동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더니 살짝 미간을 좁혔다.

보일 듯 말 듯한 미세한 변화였지만 다정은 그가 핸드폰 너머의 존재를 꺼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언뜻 스친 화면에서 ‘윤 여사님’이라는 발신인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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