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뻐꾸기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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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뻐꾸기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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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뻐꾸기의 운명
2023.05.07.
옛날 일을 떠올리는 다정의 얼굴에 어느새 조금 씁쓸한 기색이 어렸다.
“다정이는 충분히 좋은 누나야.”
수빈이 느닷없이 말했다. 표정을 통해 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동생 마음 쓸까 봐 거짓말도 하고, 쉬는 날 여기까지 오고. 다정이 충분히 좋은 누나라고.”
“……그냥 그래요.”
괜히 걱정을 시킨 것 같아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다정은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빈이 고개를 쑥 내밀며 경쾌한 목소리를 냈다.
“근데 내 사진 안 궁금해?”
“사진이요? 수빈 오빠도 여기에 사진을 걸었어요?”
그의 분위기에 동화된 다정은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강당을 한번 둘러봤다.
“응. 원래는 잘 안 주는데 부탁받아서 하나 줬어. 아는 누나가 여기 학교 선생님이거든.”
“아…… 그랬구나. 어떤 거예요? 보여주세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긴 다리를 척척 움직여 강당 중앙으로 향했다.
그가 멈춰 선 곳에는 커다란 사진 하나가 전시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무드 조명과 대비되는 화려한 색감의 사진이었다. 다정은 천천히 다가가 사진을 감상했다.
일상적인 자연의 풍경을 담아내고 싶었던 걸까.
사진 속에는 새끼에게 먹이를 먹이는 어미 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찍는 데 고생하셨겠어요. 나무도 꽤 높아 보이는데.”
“응. 높기도 높은데 그것보다 경계하지 않게 다가가는 게 힘들어.”
“무슨 새예요?”
“붉은 머리 오목눈이 새랑 뻐꾸기.”
다정은 그의 말이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먹이를 주는 새와 받아먹는 새의 종류가 다르다니.
눈을 깜빡이며 사진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수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들어본 적 없어? 남의 둥지에 알 낳는 새?”
“아…… 맞다. 뻐꾸기가 그렇지.”
어디선가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둥지 주인은 그것도 모르고 새끼를 열심히 키운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별 멍청한 동물도 다 있구나, 했는데 사진으로 보니 어쩐지 마음이 좀 짠했다.
“먹이 구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어미 새가 좀 불쌍하네요.”
“불쌍하지.”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 때문일까, 다정은 저도 모르게 뻐꾸기를 변명하는 말을 하게 됐다.
“그래도 한 마리 더 키우는 정도야 뭐, 어미 새도 할 만하지 않을까요?”
“글쎄…… 그게 그럴까?”
“……?”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수빈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뻐꾸기는 태어나자마자 옆에 있는 알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 결국, 다 떨어뜨려서 죽게 만들어.”
“네? 그냥 같이 살면 되지 굳이 죽인다고요? 왜요?”
다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어미 새를 독차지하려고.”
“아…….”
“……라고 학자들은 말하는데 내 생각은 좀 달라. 내가 보기에 얘는 아마 아는 것 같아.”
“뭘요?”
“자기가 진짜 새끼가 아니라는 걸. 그러니까 다른 형제들을 밀어내는 거지. 비교당해서 버려지지 않으려고.”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생각도 못 해본 관점이었다. 이런 게 예술가의 감수성이라는 걸까. 다정은 그의 옆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수빈 오빠는 저 뻐꾸기가 불쌍한 거예요?”
“아니, 안 불쌍하지. 천하의 역적인데.”
그가 어딘지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
“뭐요?”
“쟤도 참 힘들 거라는 거. 어미 새한테 들킬까 전전긍긍하고, 옆에 있는 형제들 미워하고…… 밉긴 한데 힘들겠다 싶어.”
“…….”
다정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생각에 잠겼다. 가만히 그의 말을 곱씹어 보는데 수빈이 갑자기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그렇다고.”
“네…….”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감추고 싶은 것이 있을 때마다 이 남자는 이렇게 웃는다는 걸.
영진을 향한 제 상처를 가려줬으니 이번엔 제 차례이지 않을까.
다정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사진은 언제부터 찍으신 거예요?”
“중학교 때. 피아노 그만두고 심심했는데 우연히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거든. 나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피아노에 사진까지, 진짜 예술가네요. 근데, 피아노는 왜 그만두셨어요?”
“아, 그게…… 난 사실 피아노엔 별 흥미가 없었어.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워낙 좋아하셔서 다들 필수 과목처럼 배워야 했던 것뿐이야.”
수빈은 아무렇지 않게 개인적인 이야기를 술술 풀었다. 아무리 단순한 질문을 던져도 그가 답에 살을 잔뜩 붙여 돌려주다 보니 대화가 굉장히 풍성해졌다.
단답만 하는 누구와는 참 다르구나.
순간, 예상치 못했던 생각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자기 얘기라면 앞, 뒤를 다 잘라 먹는 게 취미인 남자. 무뚝뚝하고 표현이 많지 않은 남자. 하지만 말이 짧은 만큼 뭐든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자.
다정은 문득 떠오른 태상의 생각에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생각해?”
그러자 수빈이 바로 제 생각 속으로 침투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관심이 옮겨가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듯했다.
“네? 아…… 그냥 수빈 오빠는 말을 참 친근하게 하는 사람이구나 싶어서요.”
적당히 둘러대며 다정이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나? 맞아. 나 되게 친근해. 그러니까 앞으로도 자주 보자.”
“……?”
자주 보자는 표현에 다정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왜? 이상해?”
“조금……요. 밑도, 끝도 없이 자주 보자니, 그런 말 보통 잘 안 하잖아요.”
다정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사람마다 성격은 제각각이고 친해지는 방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접근 방식은 어딘지 좀 이상했다.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또 스스로를 너무 무방비하게 드러내는 것 같기도 했다.
“매일같이 보자는 소리는 아니야. 그냥 걱정될 때 가끔?”
“걱정……요?”
수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응. 얼마 전에 네가 너무, 너무 걱정이 돼서 괜찮은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었거든? 근데 생각해 보니까 난 네 전화번호도 모르더라.”
“제 걱정을 왜 하셨는데요?”
“…….”
묻는 말에 답을 잘만 하던 수빈이 처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시선을 떨구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었다.
“지난주에 비 오는 날, 공항에서 사고가 있었잖아. 뉴스로 보는데 네 생각이 나더라고.”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인천공항에서 가벼운 사고가 있었다. 지상에서 이동 중이던 비행기 두 대의 날개와 꼬리가 부딪친 사고가.
뉴스에서 같은 장면이 연신 보도되었고, 태상도 그와 관련해서 몇 통의 보고 전화를 받았었다.
하지만 인명 피해는 전혀 없는 가벼운 접촉사고였는데. 다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거 사람 아무도 안 탄 빈 비행기라고 뉴스에 나왔는데 못 보셨어요?”
“아…… 그랬나?”
수빈이 씩 한번 웃더니 마저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날 네가 괜찮은지 보고 싶었어. 근데 전화번호를 몰라서 못 했고.”
“…….”
다정은 망설였다. 전화번호쯤이야 사실 별거 아니기도 하고, 수빈은 제게 은인 같은 사람이었다.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는데.
하지만…….
“어? 그거 거절하려는 표정인데? 그럼 나 좀 치사해져야 하는데.”
“치사……요?”
“다정이는 내가 발견 못 했으면 아마 진짜 크게 다쳤을 거야.”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정은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 그건 진짜 치사해요.”
“자, 그러니까 어서.”
언제 꺼냈는지, 수빈이 핸드폰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다정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받아들었다. 이해되는 발상은 아니었지만 은혜를 이런 식으로 보답 받고 싶다면 말릴 수야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역시 또 태상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
무의식중에 오른손을 올리던 다정은 빠르게 손을 바꿨다.
왼손을 들어 핸드폰을 받자 수빈의 표정이 순간 빠르게 굳었다.
밝은 조명 아래 빛나는 커다란 다이아몬드. 손을 무겁게 짓누르는 반지는 이 사람이 결코 혼자가 아님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다정은 가뿐하게 미소를 머금은 채 핸드폰을 어깨높이로 올렸다. 액정을 두드릴 때마다 투명한 빛이 예쁘게 반짝거렸다.
“자, 여기요.”
수빈은 쓰게 웃으며 핸드폰을 받아들었다.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충분한 대화를 나눈 것 같았다.
당신도 알지 않느냐고, 제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묶여 있다는 걸.
***
학교로 향하는 차 안, 시계를 바라보는 태상의 눈동자에 초조함이 어렸다.
급하게 결재해야 하는 서류, 참석해야 하는 회의. 모든 일정을 깔끔하게 다 마쳤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는 허벅지를 빠듯하게 교차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기다리고 있을 다정이 떠올라 마음이 자꾸만 급해졌다.
그때, 김 비서와 태상의 핸드폰이 동시에 울렸다. 이런 경우는 보통 좋은 일일 수가 없다.
태상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빠르게 핸드폰을 꺼냈다.
비서실에서 전해온 메시지였다. 링크를 열자 기사 헤드라인이 빠르게 눈을 사로잡았다.
‘그저 실수인 줄만 알았던 항공기 접촉사고, 사실은 인재? 항공업 관계자의 증언이 에어 코리아의 민낯을 밝히다.’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는 에어 코리아가 하청 업체에 무리한 업무를 떠넘기면서 발생한 재해에 대하여 논하고 있었다.
‘모든 항공기는 지상 이동 시 견인 차량에 의해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이건 보통 하청 업체에 일을 맡기거든요? 근데 장비는 노후 됐지, 시간은 촉박하지, 이런 상황이면…….’
인터뷰를 시작으로 이어진 기사는 에어 코리아의 ‘하청 업체 단가 후려치기’까지 이야기를 끌고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글 후반부에는 모든 사건이 태상의 부임 시기와 맞물린다며 은근히 책임론을 거론하기까지 했다.
“하아…….”
출처는 어딘지 안 봐도 뻔하겠지.
태상이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스크롤을 아래로 내렸다.
역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