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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꿈도 꾸지 마 (62/89)


62. 꿈도 꾸지 마
2023.05.04.



“한국을 떠날 때 다 그만둔 거 아니었나? 나를 향한 관심이며 흥미.”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뭘 배우는지, 뭘 먹는지, 뭘 가졌는지. 태상의 모든 것은 곧, 수빈의 관심 대상이었다.

수빈은 태상이 배우는 걸 따라 배웠고, 그가 좋아하는 걸 마치 처음부터 제가 좋아했던 것처럼 굴었다.

하지만 결국엔 흥미 없는 척, 질린 척, 온갖 척을 하며 ‘형은 역시 대단하네.’라며 속 편하게 물러났다.

지금처럼 생긋, 예쁘게 웃어 보이며.

태상은 그런 수빈이 안쓰러웠다가, 피곤했다가, 또 어느 때는 버거웠다.


“그래, 맞아. 다 그만뒀지. 깔끔하게 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좀 생겨서 말이야.”

“사정.”

태상이 가볍게 목을 축이며 인내심을 끌어모았다. 그러곤 왼쪽 손목을 살짝 틀어 손목에 감긴 시계를 보여주었다.

시간이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

그 모습은 본 수빈은 그저 한번 싱긋 웃어 보였다.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형, 난 형이 누구와 결혼을 하든 별 상관은 없는데…… 다정이랑 하는 건 안 되겠어.”

“……뭐?”

순간, 태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다정의 이름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때 형 도망쳤잖아. 다정이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비겁하게.”

“…….”

그 누구에게도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얘기한 적 없었다. 현오를 제외하고는 다른 의사들에게도, 심지어 할아버지에게도.

태상은 저도 모르게 떨리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겨우 아문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느낌이었다.


“너…… 네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줄 알기나 해?”

“당연히 알지. 그날 다정이 구한 게 난데.”

“네가…… 구했다고?”

일순, 태상의 눈매가 날카롭게 뜨였다. 다정을 구한 건 분명 그곳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는 사람일 텐데. 그의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수위 아저씨랑 같이 들어가서 데리고 나온 거야. 형이 그날 일로 충격 받은 걸 아니까 아무 얘기 안 했던 거고.”

“…….”

“다정이가…… 다정이가 그랬어. 여기 나 말고 어떤 오빠 한 명이 더 있었는데 자기 버리고 도망쳤다고.”

수빈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거짓말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그날, 그곳에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형도 그날 여기저기 다쳤잖아. 자기도 병원 가야 하면서 창피해서 따라오지도 못하고…… 한심하게 또 도망이나 치고. 나 다 봤어.”

태상은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허리춤이 욱신욱신한 게 벌어진 상처 사이로 오래된 기억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멀리서 다정을 다시 봤을 때, 태상은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감사했다. 나 대신 저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아픈 것도 잊고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발끝이 우뚝 멈췄다.

나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을까. 책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 그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창피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무서워서였다. 다정의 동그란 두 눈을 마주하기 무서워서.

태상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뒷걸음질을 쳤다. 절뚝거리며 몸을 숨기는 모습이 마치 집을 잃은 달팽이처럼 비참했다.


“형도 다 기억하지?”

“…….”

“그러니까 욕심내지 말라고.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 차태상이라도 다정이는 아니니까.”

수빈이 냅킨을 접으며 말했다.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런 온갖 척을 하느라 행동이 느릿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식사는 다음에 하자.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오붓하게 밥 먹을 사이는 아닌 것 같네.”

의자를 뒤로 밀어내려는데.


“그래도.”

소름 끼치게 낮은 목소리가 수빈의 발목을 잡았다.


“……?”

“욕심이 난다면.”

“……뭐?”

“그래도 가질 거라면?”

태상은 어느덧 평소와 같은 서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 괜찮아서였다.

다정이 저를 원망했다는 말을 듣는 것도. 비참했던 제 자신을 떠올리는 것도. 다정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이 정도 고통쯤은 다 견딜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아픈 게 더 좋을 것 같기도 했다. 다정의 곁에서 아픈 게, 공허했던 지난날보다 훨씬 나으니까.

태상은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수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까만 눈동자가 위험한 빛으로 일렁였다.


“세상 모든 걸 가질 거고, 한다정도 내가 가져.”

“…….”

“그때처럼 도망치지 않아.”

압도적인 분위기가 공기 중을 가득 채웠다. 수빈은 불안한 듯 눈동자를 떨면서도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형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내가 빼앗을 거라고.”

“차수빈…….”

태상이 인내하듯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테이블을 빙 돌아온 그는 턱 끝을 묵직하게 내리며 수빈을 바라봤다.


“내가 가진 그 어떤 걸 탐내도 좋은데.”

날이 선 눈빛이 그의 목덜미를 예리하게 찍어 눌렀다.


“한다정은 안 돼.”

“…….”

“그러니까, 마음 같은 거 품지도 마.”

태상은 씹어 뱉듯 한 마디를 남긴 채 단호히 몸을 돌렸다.

뒷말은 듣지 않겠다고, 들을 필요도 없다고. 단호한 뒷모습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수빈은 멀어지는 그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모든 걸 알게 되면 결국 상처받는 건 다정이야. 다정이 생각은 안 해?”

탁, 태상이 발끝을 멈추자 차가운 마찰음이 울렸다. 그는 고개만 슬쩍 돌린 채 수빈을 바라봤다.


“상관없어. 이제는 내가 아프게 안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한 태상이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기적이래도, 모순이라고 해도,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숨어버린 그날부터 이 마음은 그렇게 자라나 버렸으므로.

태상은 날이 선 눈에 다시 한번 힘을 주며 다리를 움직였다. 이제 어차피 돌이킬 수 없었다.


 

***

영진의 학교에서 예술제가 열리는 날.

교문을 통과하는 다정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태상이 오후에 있을 영진의 공연에 참석하기로 한 것 때문이었다.

합병이다, 노선 확충이다, 태상은 요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때문에 다정은 그가 못 올지도 모른다며 자신을 미리 실망시켰고.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없는 시간을 만들어 냈다. 출근 시간을 조금 더 당겼고, 제가 비행을 가고 없는 날에는 기꺼이 야근을 했다.

다정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기는데 어느새 본관에 다다라 있었다.


‘소강당이라고 했지……?’

영진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사진부 친구들의 전시회에 가 있을 거라고 했다. 안내도에서 소강당의 위치를 확인한 다정은 가볍게 발끝을 돌렸다.


‘선아 사진전’

강당 안에는 엇비슷한 체구의 남학생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모여 있었다.

다 같은 옷을 입고 있어 동생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멀찍이 사복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어……?”

아무렇게나 걸쳐 입은 긴 팔 흰색 셔츠, 마른 듯하면서 다부진 팔이며 연한 갈색 머리카락.

왠지 낯이 익었다. 다정은 남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 어깨 위로 가벼운 두드림이 느껴졌다.


“누나.”

“어, 영진아.”

고개를 돌리자 교복 안에 흰색 티셔츠를 받쳐 입은 영진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키가 더 컸는지 이제는 고개를 꽤 많이 치켜들어야 했다.


“일찍 왔네?”

“응. 축제 구경 좀 하려고.”

“별로 볼 건 없는데.”

“그럼 왜 불렀는데.”

다정이 괜히 퉁퉁대며 장난을 거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다정아.”

“……?”

다정은 고개를 옆으로 퍼뜩 돌렸다. 그러자 해사하게 웃고 있는 수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수빈 오빠, 여긴 어쩐 일이세요?”

어쩐지 익숙한 뒷모습이다 했더니. 다정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음…… 어쩌다 보니?”

“네? 여기 학생 중에 아는 사람 있으세요?”

“아니.”

여전히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고개가 절로 기우는데 영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나,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야?”

“선생님?”

“응. 이 형, 사진부 임시 고문이야. 애들 축제 준비 도와주고 사진 찍는 거도 봐주고 그랬어.”

“아…… 사진부.”

설명을 듣고 나니 수빈의 등장이 그제야 이해됐다. 다정은 자꾸만 겹치는 수빈과의 인연에 속으로 작게 놀랐다.


“근데 누나는 선생님 어떻게 알아?”

“어? 어, 그게…….”

수빈의 존재를 설명하려면 그날의 사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동생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일이었다.

다정은 어색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적당한 말을 찾았다.

그때, 수빈이 기세 좋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처음 만났어. 손님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친해졌네?”

“비행기요? 아, 맞다. 선생님 미국에서 들어왔다고 했지.”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 설명에 다정이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때, 한 남학생이 땀에 젖은 셔츠를 잡아 흔들며 영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야, 우리 액자 옮기는 거 좀 도와줘.”

“너네 아직도 그러고 있냐? 하여튼…… 누나, 잠깐만.”

“응. 그래. 얼른 가 봐.”

영진은 금방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친구들의 곁으로 뛰어갔다. 동생이 사라진 후, 다정은 뻘쭘한 시선으로 수빈을 올려봤다.


“대신 대답해 주셔서 감사해요.”

“곤란해 보이길래. 영진이가 그때 말한 동생이지?”

“네. 맞아요.”

다정이 어색하게 손을 맞잡으며 말을 이었다.


“……그때 일 생각나게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 못 하고 있었어요.”

“그럴 것 같았어.”

“감사해요…….”

영진에게 그날의 사고는 목에 걸린 가시와 같았다.

피아노 콩쿠르가 있었던 그날, 다정은 부산스러운 부모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꼭 동생에게 부모님을 뺏긴 것만 같아서 질투가 났다.

결국, 다정은 만만한 영진에게 화풀이를 했고, 영진도 울면서 짜증을 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 동생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누나 같은 거 필요 없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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