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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독이 되는 관계 (61/89)


61. 독이 되는 관계
2023.04.30.



“서, 설마 태상 씨한테 얘기 들으신 건가요?”

“그래요. 그 녀석이 이런 일로 날 찾는 법이 없는데…… 아주 바득바득 이를 갈더군요. 다정 양을 못마땅해했다면서.”

차 회장이 허허 웃으며 기쁜 듯 말했다. 무언가 요구하는 법이 없는 태상의 변화가 내심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그, 그런…….”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그와 달리 다정은 부끄러운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러면 마치 제가 뒤에서 태상을 조종한 것 같지 않은가.

다른 건 몰라도 이 팔불출 성격은 꼭 고쳐 놓아야지. 다정은 손을 꼭 말아쥐며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내가 대신 미안해요. 또 내가 대신 혼냈으니 걱정하지 말고.”

“호, 혼을 내다니요…….”

다정이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무리 태상과 척을 지고 있다고는 해도 시어머니 될 사람인데. 부담스러운 그의 언사에 다정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나저나 우리 태상이가 뭘 어떻게 잘 해주나?”

“네, 네……?”

“내 안 그래도 태상이가 소개시켜주는 걸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끝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그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바위처럼 크고 단단하던 차 회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의 노인은 그저 흔한 ‘손주 바보’ 할아버지였다.

다정이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소리가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똑똑.

열린 문 사이로 수행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장님.”

“무슨 일인가?”

“그게…….”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말을 흐리자 차 회장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는 절도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차 회장의 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뭐? 그 녀석이 여길?”

“……?”

혼자만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는 다정이 조용히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가봐야겠네요.”

“네…….”

“조금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태상이 그 녀석이 지금 여길 와 있다네.”

“태상 씨가요?”

스탠바이에 유독 민감하게 굴더니 결국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당혹스럽긴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왠지 태상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굴 데리러 올 애가 아닌데 참, 허허허.”

“저한테도 아무 말 없었는데…… 놀라게 해 주려고 그랬나 봐요.”

손주의 다정한 면모가 마음에 들었는지 차 회장의 눈매가 또 한 번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다정도 예를 갖춰 따라 일어섰다.


“회사 생활 힘든 거 있으면 바로바로 얘기하고.”

차 회장이 다정의 두 손을 조심히 감싸 쥐며 말했다.


“네.”

“태상이가 속 썩여도 이 할아비한테 먼저 말하고.”

“네…….”

“혹시라도 뭐, 헤어져야겠다는 그런 생각 같은 건 추호도 하지 말고. 응?”

“네, 네. 그럼요.”

이보다 기묘한 대화가 또 있을까.

첫만남부터 ‘헤어지지 말아라’라는 미션을 부여받은 다정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그리고 내가 왔다는 건 비밀로 좀 해줘요. 말도 없이 몰래 온 걸 알면 그 녀석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 거거든.”

“물론이죠. 비밀 지켜드릴게요.”

다정이 귀엽게 검지를 입가에 대며 말하자 노인의 얼굴이 또 화사하게 피었다.


“저…… 그리고 회장님, 다음부터는 그냥 ‘다정아’ 아니면 ‘아가’ 이렇게 불러주세요. 말씀도 편하게 하시고요.”

“그래도 될까?”

“그럼요.”

“그래, 그럼 다정아.”

“네.”

“너도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렴. 알겠니?”

“……네. 할아버지.”

다정은 갑자기 생긴 든든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큰 뒷배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

점심시간을 맞은 평일의 오피스 빌딩.

오늘은 또 뭘 먹나. 바쁘게 로비를 지나는 직원들의 얼굴에 같은 고민이 떠올랐다.

그 가운데 수빈은 홀로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해사한 미소를 잔뜩 머금은 그는 로비 한쪽에서 즐거운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그랗게 원을 그린 사람들은 모두 마케팅팀 직원들이었다.


“다들 저 없는 동안 승진을 많이도 하셨네요.”

“에이, 어차피 고속 엘리베이터 타실 분 앞에서 저희 승진이야 뭐, 병아리 걸음마 수준이죠.”

꽤 노골적인 농담이었지만 모두 하하 웃을 뿐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농담의 주체가 되는 수빈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를 떠나기 전, 그는 동료 직원들과 허물없는 관계를 유지하는 거로 유명했다.

사람들은 다가갈 틈이라곤 없는 태상과 다르다며 수빈을 따랐고, 수빈도 다가오는 직원들을 막지 않았다.


“저 이번에 뜬금없이 과장 된 거 아시죠? 다음 주부터 출근인데 싫어도 욕은 뒤에서만 해 주세요.”

수빈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어머, 그런 말은 술이라도 한잔 먹여 놓고 하셔야죠.”

“아니면 밥이라도?”

직원들이 꺄르르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한 번씩 쳤다. 수빈은 이에 지지 않고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과장되게 끄덕였다. 그러곤 로비 정문을 가리키며 밖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반복되는 구내식당 메뉴에 지쳐 있던 직원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비싼 거 먹어도 돼요?”

“어머, 김 대리님, 당연한 걸 뭘 물어요.”

다들 노골적인 농담을 한 마디씩 보태던 그때.

누군가 음량 버튼을 조절이라도 한 것처럼, 웅성거리던 로비가 서서히 조용해졌다.

주위를 감싸던 울림이 잦아들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본능적으로 목소리 크기를 줄였고, 슬쩍슬쩍 주위를 살폈다.

이윽고 술렁이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그 끝에는 검은 슈트로 몸을 감싼 태상이 있었다.

빠르게 내디디는 큼직한 걸음, 조금 피곤한 듯 보이는 날렵한 얼굴, 그 안에서 날렵하게 번뜩이는 눈동자.

뒤로 수행원들을 잔뜩 이끈 태상은 마치 큰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기사 같았다. 그가 묵직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이 물살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로비 한쪽 구석에 선 수빈은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누가 봐도 이 공간의 주인공은 태상이었다.

저는 그저 그의 곁에서 살아가는 들러리에 불과하겠지.


 
냉혹한 현실을 피부로 느끼는데 중얼거리는 듯한 말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부사장님 역시 분위기 장난 아니다…….”

조금 전까지 비싼 걸 사달라며 조르던 김 대리였다.

수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주먹을 꼭 말아쥔 채였지만 이제는 손바닥이 아프지도 않았다.


“우리 형, 역시 멋있죠?”

“아, 네. 저희는 자주 뵐 일이 없어서 볼 때마다 넋을 놓는 것 같아요.”

헤벌쭉 벌어진 입이며 말투가 그제야 민망했는지, 김 대리가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아뇨. 매일 보는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언제 봐도 멋있어요.”

수빈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저는 멋진 형 만난 김에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어야겠네요. 죄송해요, 여러분.”

수빈은 직원들의 원성을 뒤로하고 빠르게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가 태상의 근처로 향하자 수행원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아, 벌써 제 얼굴도 잊으셨나?”

태상을 감싸고 있던 무리가 뒤에서부터 차례로 고개를 돌렸다. 물결의 파문 같은 움직임은 곧 태상에게까지 닿았다.

그는 얼굴을 굳힌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에서 이미 누구인지 짐작을 한 듯싶었다.


“형, 오랜만.”

수빈이 멀찍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형’이라는 그 말에 검은 양복의 무리가 양옆으로 스르르 갈라졌다. 수빈은 태상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닿기 딱 일 보 직전, 최종 보스를 지키는 문지기처럼 김 비서가 수빈의 앞을 가로막았다.


“회사입니다. 언행에 신경을 써 주시죠.”

많은 뜻을 함축하고 있는 그의 말에 수빈이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비키라는 듯 턱을 가볍게 까딱였다.

무례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지만 맑게 머금은 미소 때문에 그렇지만도 않게 보였다.

김 비서는 무거운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들 형에 대한 충성심이 장난이 아니네?”

“……무슨 일이야.”

“난 직원들 얼굴이나 볼까 하고 왔지. 다음 주부터 나도 출근이잖아.”

“벌써 본 것 같은데.”

태상이 수빈이 서 있던 쪽을 시선으로 훑으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가 봐.”

“그럴 수야 있나. 오랜만에 형을 만났는데. 점심, 아직이지?”

“먹을 생각 없어.”

“바쁜 사람일수록 끼니를 잘 챙겨야 하는 거야.”

“…….”

“……라고 우리 엄마가 늘 그래.”

수빈이 살살 웃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는 태상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쳤다. 앞을 선점한 그는 시선을 힐끗 돌리며 입을 열었다.


“가자. 내가 밥 살게. 형 좋아하는…… 아니, 부사장님 좋아하시는 메뉴로.”

태상의 눈썹이 서서히 좁혀졌다.

수빈은 제가 이끌어낸 반응을 만족스럽게 바라봤다. 그는 잘나고 대단한 차태상이 흔들리는 게 좋았다.

그가 흔들릴수록 저와 비슷한 사람이 되는 거였으니까. 만만하고 평범하게 볼 수 있으니까.

수빈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척척 걸음을 옮겼다.

***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텔 최상층 레스토랑. 오너 일가의 방문으로 효성 호텔은 갑자기 분주해졌다.

주방에서는 두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를 탈탈 털어 맞춤 요리를 준비했고, 홀에서는 테이블 배치를 전부 바꿔 프라이빗한 공간을 연출했다.


“얼굴 좀 풀어. 뭐가 그렇게 심각해?”

수빈이 생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우리 계열사 자주 다녀?”

“다닐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아, 직원들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수빈이 알 만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자주 오는 건 아니야. 오늘은 그냥…… 여기가 바로 옆이니까, 그래서 온 거야.”

특권의식 같은 건 다 내려놓은 지 오래인데. 저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아이러니해, 수빈은 짧게 웃었다.


“결혼한다며.”

그가 냅킨을 무릎 위에 정갈히 펼치며 물었다.


“맞아.”

“왜?”

“…….”

태상은 입가로 가져가던 물잔을 다시 내려놓았다.

어차피 처음부터 식사를 마칠 생각은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더 빨리 자리를 뜨게 될 것 같았다.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어울리지도 않게 그런 걸 왜 하느냐고.”

“쓸데없는 참견이야.”

“관심이라고 해 줘.”

“너…….”

태상이 테이블 위로 가볍게 몸을 숙이며 말했다. 낮게 깔린 시선이며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분위기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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