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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든든한 내 편 (60/89)


60. 든든한 내 편
2023.04.27.


그는 현오의 방문을 알지 못했는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조금 뒤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멋대로 쳐들어온 건데요. 들어오세요.”

현오는 마치 제 사무실인 양 김 비서를 초대했다.

김 비서는 태상의 가벼운 눈짓을 확인한 후,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럼 중요한 사안만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내일로 예정되어 있던 정책소통 간담회입니다만…….”

단조로운 목소리가 집무실 안에 나직이 울렸다. 김 비서는 태블릿 PC를 빠르게 훑으며 이번 주 스케줄을 정리했다.

늘 그렇듯 바늘 하나 들어갈 데 없이 빽빽한 업무 일정이었다.


“……해당 사안은 한성 항공에 따로 자료 요청해놓은 상태입니다. 이상입니다.”

탁, 태블릿 PC 커버를 덮은 김 비서가 다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과장을 조금 섞어 완벽한 브리핑이라고 생각했는데. 가만히 듣고 있는 태상의 표정이 어딘지 석연치 않았다.

무언가 빼먹은 일이 있었던가. 김 비서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김 비서님.”

“네.”

묵직한 부름에 김 비서가 재빠르게 답했다.


“이번 주 토요일, 스케줄 조정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 네. 그거라면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 반드시 참석해야 하는 일정만 오전으로 배치했고 나머지는 전부 취소했습니다. 학교 도착하시면 1시쯤 될 겁니다.”

“학교?”

가만히 듣고 있던 현오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김 비서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채 가볍게 입꼬리만 올렸다.


“그럼 두 분 대화 나누십시오. 저는 나가보겠습니다.”

대답을 회피하는 게 어쩐지 더 수상했다. 현오는 태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돌처럼 단단한 그의 얼굴에서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

천하의 차태상이 업무를 뒷전으로 한다.

현오는 멀어지는 김 비서를 바라보며 속으로 작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그에게 물어야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았다.



***

인천공항 근처에 위치한 에어 코리아 타워.

다정은 매서운 눈으로 시계를 노려봤다.

스탠바이가 끝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약 삼십 분.

아무 비행에도 안 불리고 이대로 집에 가면 태상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 그런 원대한 꿈에 부풀어서인지 얼마 안 남은 시간이 느리게만 흘러갔다.

저도 모르게 힐끔, 또 시간을 확인하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승무원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운항본부에서 발행하는 사보 ‘하늘길’이 놓여 있었다.


‘이거라도 읽으면…….’

마음을 딴 데로 돌리고 싶었던 다정은 가뿐하게 사보를 집어 들었다. 책장을 넘기자 얇은 잡지가 손안에서 촤르륵 넘어갔다.


“어…….”

아무렇게나 대충 펼친 건데. 잡지와 마음이 하나가 되기라도 한 건지, 태상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장식된 페이지가 열렸다.

다정은 굵직한 제목을 먼저 읽었다.

‘차태상 부사장, 사내 소통 강화를 위한 세미나로 화합을 도모하다.’


“사내 소통……?”

무언가 짐작되는 바가 있는 것도 같았다. 다정은 눈동자를 빠르게 움직였다.

「직장 내 괴롭힘 및 성희롱, 모욕적 발언을 예방하기 위한 이번 세미나는 차태상 부사장이 직접 안건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동료 직원과의 화합 여부를 인사 고과의 중요한 축으로 삼을 것이라 전하며…….」

정말 그가 직접 나설 줄은 몰랐는데. 다 바로잡을 거라던 태상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아끼는 여자를 상처 주지 말아 달라며 사람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돌아서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체계를 만들어 놓았고.

외면할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철저한 포위망. 섬세하면서 강직한 업무 처리 방식은 평상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와 또 한 번 사랑에 빠진다는 게 바로 이런 순간일까. 다정은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잡지를 소중히 품에 안았다.

순간, 마음속에서 나쁜 생각 하나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다들 핸드폰 보느라 바쁘지……?’

다정은 주변을 한번 살피고 사보를 가방 속으로 밀어 넣었다.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며 지퍼를 닫는데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한다정 씨.”

“네, 네?”

이래서 나쁜 짓을 하면서 살면 안 되는 거구나. 다정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이등병도 울고 갈 만큼 각이 잘 잡힌 양복, 말끔히 넘긴 머리며 미세하게 나는 향수 냄새. 윗사람과 일하는 직장인 특유의 깔끔함이 느껴졌다.


“잠시 저와 함께 가 주시겠습니까?”

“어디를 가는데요……?”

“한다정 씨를 꼭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인지 선뜻 대답을 하기가 어려웠다.

다정이 곤란한 듯 답을 아끼자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보탰다.


“회장님께서 와 계십니다.”

“회, 회장님이요……?”

“네. 효성 그룹의 회장님, 차태상 부사장님의 조부님 되십니다.”

남자가 다정도 뻔히 아는 사실을 조목조목 읊었다. 다정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만 깜빡거렸다.

명옥에게 그렇게 데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또 벌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부터 앞섰다.


“만나서 해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같이 가 주시죠.”

겁먹은 기색을 읽었는지 남자가 다소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정을 안심시켰다.


“네, 네…….”

놀란 기색을 겨우 수습한 다정은 겨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기다리는 사람의 정체를 안 이상 꾸물거리며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다정은 남자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회장님에 대해 아는 바를 떠올려 봤다.

재계를 주름잡는 대쪽 같은 성품의 소유자라고 들었던 것 같다. 아무리 이익이 큰 사업도 국익과 반대되면 하지 않는다고 들은 것 같고.

떨리는 마음을 애써 다잡는데 어느새 사무실이 모여 있는 오피스 동에 도착했다. 응접실 앞에 멈춰 선 남자는 들어가 보라는 듯 문을 살짝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어서 와요.”

응접실 안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선 다정은 시선을 조금 내리깐 채 부드럽게 허리를 접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다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이리 와 앉아요.”

앞자리를 권하는 차 회장의 손길에 다정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 치마를 단정히 쓸며 소파에 앉는데 온화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내가 누군지는 따로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네. 물론입니다.”

다정은 그렇게 답하며 천천히 시선을 올렸다. 차 회장은 사진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강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짙은 쌍꺼풀이며 굵은 콧대. 선이 굵은 이목구비 때문인지 어르신들이 가지는 특유의 인자함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무례함도 잊고 빤히 들여다보는데 어느 순간 태상의 얼굴이 그에게서 겹쳐 보였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다정은 시선을 살짝 내리며 다시 입을 뗐다.


“먼저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응…… 아니, 아니. 죄송할 건 없지요. 사과는 갑자기 찾아온 내가 해야지.”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이해해주니 고마워요. 태상이 짝이 될 사람이 우리 회사에 있다니 내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네.”

다정은 담백하게 답을 마쳤다.

부드러운 말투이기는 했지만 그가 저를 향해 품고 있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일단은 태도에 신중을 기하는 편이 좋았다.


“태상이가 아가씨에게는 잘 해주나요?”

“네. 아주 잘해줍니다.”

“그래요? 이미 알고 있겠지만 손주 녀석은 여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몸이 닿는 건 더더욱.”

차 회장이 근심 어린 투로 말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제 곁에서는 괜찮거든요.”

“정말…… 인가요?”

순간, 주름진 노인의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의심이라기보다는 그저 믿기 어렵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네. 저와 함께 있을 때는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래. 그것참 인연이야.”

그는 만면에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기꺼운 것 같았고 안심하는 듯 보였다.

못마땅하다는 눈초리, 무언가 노리는 게 있는 거 아니냐는 추궁. 저도 모르게 그런 것들을 상상했던 다정은 주름진 노인의 미소 앞에서 송구스러움을 느꼈다.


“양친께서는 작고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았겠어요.”

차 회장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그런데 저보단 동생이 더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너무 어렸거든요.”

“동생이 어렸으면 누나도 어렸겠지.”

“…….”

제 고통은 언제나 뒷전인 못된 습관을 차 회장이 부드럽게 꾸짖었다. 별거 아닌 한 마디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다정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 태상이도 가족이 많지 않은데. 이래저래 쓸쓸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차 회장은 마치 아들 부부가 먼저 세상을 뜬 것이 제 잘못인 양 말했다. 먼저 보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다정은 그의 말을 공손히 막았다.


“태상이, 많이 외롭게 컸어요. 엄마는 얼굴도 못 봤고 아빠는 갓난쟁이 때 갔으니.”

“…….”

“그러니까 두루두루 많이 이해해 줘요. 모나게 굴어도, 어설프게 굴어도.”

“네.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차 회장이 한숨을 가볍게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모나게 구는 엄마도 조금만 이해해주고.”

“엄마…… 아, 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한 다정이 재빨리 답을 내놓았다. 이제 보니 차 회장은 태상이 아니라 제가 걱정이 되어 여기까지 온 것 같았다.


“맘고생이 심했다지요?”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고개는 물론 손까지 써서 내젓는데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옥이 저를 찾아온 것까지야 알 수 있다 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모를 텐데. 특히 제가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까지는…….

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다정은 눈동자를 커다랗게 키우고 차 회장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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