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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애착 베개 (59/89)


59. 애착 베개
2023.04.23.


다정이 시선을 곧게 맞추며 물었다. 하지만 태상은 잡은 손에 살짝 힘을 실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 다 감당할 수 있어요.”

여전히 못 미더워하는 듯한 태도에 다정의 눈빛이 조금 단단해졌다. 태상은 기꺼우면서 안타까운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봤다.


“그런 말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너는 알까.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긴긴 시간 간절했던 그리움. 태상이 품고 있는 마음은 하나같이 크고 무거웠다. 밑바닥이 없는 그 감정을 알게 되면 다정은 전처럼 웃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삼켜야 했다. 혀끝을 맴도는 말도, 터질 것 같은 감정도.

지금은 그저 다정이 견딜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씩만 마음을 밀어 넣어야 했다.

태상은 자그마한 손을 당겨 제 입가로 가져왔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붉은 입술이 반지가 들어간 손마디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느리게. 그는 하얀 손가락을 입술로 꾹꾹 눌렀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숨결이 다 새겨질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다정은 발끝에 힘을 꾹 주고 버텼다. 뜨겁다 못해 데일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견뎠다.


“저, 저도 태상 씨 많이 좋아한단 말이에요.”

저도 모르게 조금 억울한 목소리가 나왔다.


“정말, 많이 좋아한다고요…….”

그 말이 신호탄이었을까. 드리워진 눈꺼풀이 느릿하게 위로 올라왔다. 그 안에 담긴 검은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뜨거웠다.


“한다정…….”

눅진하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시선을 깊게 얽은 채 천천히 손을 끌어당겼다.


“잘 들어.”

작은 손이 멈춘 건 단단한 가슴 위였다.

쿵- 쿵- 쿵-.

그가 손을 꾹 누르자 손바닥 위로 우람한 박동이 폭주했다. 가슴을 찢고 나올 것 같은 거센 움직임이었다.

사랑해.

언어를 대신한 그의 몸짓이 그렇게 말했다. 다정은 떨리는 눈동자로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

소중해 견딜 수 없다는 듯한 눈빛이 고스란히 쏟아져 내렸다.

순간, 울컥 치미는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휘몰아쳤다. 다정은 그의 품속으로 뛰어들 듯 몸을 던졌다.

그러자 손끝에서만 느껴지던 쿵쾅거림이 가슴 위로 전해졌다. 뼛속은 물론이고 머릿속까지 쿵쿵 울리는 것 같았다.

다정은 그 느낌이 무섭기보다 편안했다.


“……내가 진 거죠?”

누가 더 많이 좋아하는지가 경쟁의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어땠을까. 아마 매일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았을까.

다정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눈이 저절로 감기는 게 행복에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맞아. 네가 진 거야.”

공기가 제법 섞였는지, 귓가에 울리는 그의 음성이 가벼웠다.


“알겠어요. 안 가르쳐줘도 괜찮아요, 이 안에 뭐가 들었는지.”

“…….”

“근데 다음엔 내가 이길 거예요. 오늘은 졌어도…… 내일도 있고, 또 모레도 있으니까.”

“하,”

태상이 즐거운 듯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허리를 감싼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온도며, 향기. 작은 움직거림까지. 그는 모든 감각이 다정으로 꽉 찰 때까지 끌어당겼다.

이젠 더 이상 붙을 데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그가 커다란 손으로 동그란 뒤통수를 꽉 감쌌다.

고개를 완전히 숙여 작은 몸을 완전히 가두듯 안자, 그제야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어림도 없어.”

태상이 속삭이듯 말했다.

그는 눈을 감고 다정을 느꼈다. 보드라운 감각이 온몸을 감싸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제 품 안으로 달려든 다정을 놓아줄 수가 없음을.


 

***

조용한 사무실 안.

커피에서 올라오는 하얀 김이 아지랑이처럼 살랑거렸다. 적잖이 매혹적인 움직임이었지만 태상은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화면 속 스케줄 공지 프로그램이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는 급한 업무도 다 내려놓고 다정의 운항 스케줄만 바라보고 있었다. 스탠바이가 예정된 오늘. 다정은 언제, 어디로든 불려갈 수 있는 5분 대기조에 해당했다.

태상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만약 장거리 비행에 불려가기라도 한다면 최소 나흘을 보지 못할 텐데.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불판 위에서 심장이 달달 볶이는 것만 같았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고작 일주일, 벌써부터 다정 없는 삶이 그려지지 않았다.


“하아…….”

연신 새로 고침을 하는 것도 피곤했는지 그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스케줄을 확인하는 데에는 이 프로그램만 한 게 없다며,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두면 편리하다고. 비밀번호를 알려주던 다정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결코 이런 한심한 모습을 바라고 알려준 게 아니었을 텐데.

이성적인 머리와 달리 제멋대로인 손이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새로 고침을 하려는데 무겁게 닫혀 있던 문이 스르르 열렸다.


“똑, 똑. 날라리 환자님, 진찰 왔습니다.”

“…….”

입으로 하는 노크가 꽤 뻔뻔했다. 문틈으로 고개를 내민 남자는 슬쩍 웃으며 미끄러지듯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태상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앉으라 소리도 안 하냐?”

“앉아. 너네 집에서.”

“아휴…… 내가 미친놈이지. 이런 거 뭐가 예쁘다고.”

“잘 아네.”

태상이 느릿하게 입술을 휘며 말했다.

한쪽 입꼬리만 들어 올린 삐딱한 미소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는지, 남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새 왜 자꾸 빼먹냐.”

그가 소파 중앙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말했다.


“병원 체질이 아니라.”

“네가 언제는 체질이라서 왔어?”

“아마.”

가끔 보는 친구이자, 자주 보는 환자. 정신과 전문의인 현오에게 태상은 그런 존재였다.

현오와 태상은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랐고 심지어 초, 중, 고, 대학까지 같이 나왔다.

태상의 말을 빌리자면 쓸데없이 긴 시간. 그 긴 시간 동안 현오는 한결같이 태상의 곁을 지켰다.


“약 없으면 잠도 못 자는 놈이 허세는.”

“약 없이도 잘 자. 요즘은.”

태상이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 그가 현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반지르르한 가죽 소파가 뿌드득, 소리를 내며 아래로 움푹 꺼졌다.


“요새 정말 어떻게 된 거야? 진료는 왜 빼먹는 건데? 결혼한다는 얘기는 또 뭐고.”

현오가 엉덩이를 바싹 당겨 앉으며 물었다. 잔뜩 기울어진 상체에서 관심과 호기심이 철철 흘렀다.


“말이 안 되나?”

“당연하지. 네가 자진해서 결혼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

주치의로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 그를 지켜봐 온 친구로서 하는 말이었다.

어린 시절, 태상은 무심한 듯하면서도 배려심이 있는 아이였다.

표현이 조금 부족하다고나 할까. 감정을 드러내는 게 조금 서툴러서 그렇지 마음씨는 따스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중학교 1학년, 그 사건이 있고 난 후 그는 완전히 변했다.

친구들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홀로 자신을 고립시켰다. 철저하게 혼자가 된 그는 마치 내면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현오는 그런 그가 항상 마음이 쓰였다.

친구를 향한 걱정, 전부터 품어온 동경심.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많은 감정이 하나로 뭉쳤던 것 같다.


“내가 자진해서 하는 결혼 맞아.”

태상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뭐? 너 진짜 갑자기 다 낫기라도 한 거야?”

“아마.”

“아마라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냐. 너…… 설마 그동안 나 말고 다른 의사 만났어? 그거 배신, 아니, 바람이다?”

“끔찍한 소리.”

태상이 노골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아니야? 그럼 뭔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전문의가 지지고 볶았는데도 안 된 걸 혼자 무슨 수로 해결했냐고.”

배신감과 허탈함, 거기다 현실 부정까지.

현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들을 태상에게 들이밀었다. 태상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생각에 잠긴 듯, 그의 눈동자가 천천히 옆으로 흘렀다.


“……애착 베개.”

“뭐?”

“애착 베개. 그거 하나 들여놨더니 다 해결됐어.”

그렇게 말하는 태상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며칠 전, 다정은 1층 침실에서 태상과 함께 영화를 봤다.

비행을 다녀와 피곤했는지 깜빡 잠이 들기를 몇 번. 결국, 다정은 태상의 어깨에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그날을 기점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다정은 미세하게 남아 있던 경계심을 완전히 풀었고, 태상의 곁에서 훨씬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행동했다.

하루는 늦도록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를 품에 안은 채 잠이 들었다. 또 어느 날은 와인 한 잔을 나눠 마시다 그대로 베개에 머리를 기댔고.

어느덧,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찾았다. 태상은 당연한 듯 온기를 나누며 잠드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물론,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는 게 다정인 건 미치도록 좋았고.


“그러니까…… 고작 베개 하나로 문제가 다 해결이 됐다고?”

이유도 모르는 미소를 보고 있기 답답했는지 현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응.”

“잠 잘 자고?”

“응.”

“꿈 더 안 꾸고?”

“거의.”

“…….”

전문의로서 갈고 닦은 명성이 한 방에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현오는 숨을 천천히 고르며 잘난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여자 옆에서도 괜찮아? 몸에 닿아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무슨 대답이 그래.”

“…….”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태상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그만의 간결한 신호였다.

익숙한 표정 앞에 현오는 남은 질문을 조용히 삼켰다. 대신 특유의 유쾌한 빈정거림을 내놓기는 했지만.


“나도 좀 보자. 그 잘난 애착 베개.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내가 못 한 걸 한 번에 해 내는지.”

“안 돼. 내 꺼거든.”

태상이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으며 말했다. 부드럽게 휘는 눈매 속에서 새카만 눈동자가 즐거운 듯 반짝였다.

현오는 입을 멍하니 벌린 채 그 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상의 껍질을 빌려 쓴 무언가가 제 앞에 앉아 있는 게 분명했다.


“그, 그래. 치사해서 안 본다. 아무튼, 나야 잘 됐지. 제일 골치 아픈 환자 더 안 봐도 되니까…….”

하는 말과 달리 현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를 낫게 해주겠다는 열망 하나로 달려온 지난 세월이 허무해서였다.


“너무 자존심 상해하진 마. 그 베개가 특별한 거니까.”

“자존심이 상하긴, 누가? 분명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갑자기…….”

-똑똑.

부드러운 노크 소리 뒤로 김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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