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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그녀를 향한 그의 조련(2) (58/89)


58. 그녀를 향한 그의 조련(2)
2023.04.20.


다정은 커다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태상처럼 스스럼없이 욕망을 표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태상이 천천히 손을 끌어당겼다.


“…….”

제 손임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움직이는 모습이 꽤 기묘했다.

다정은 그의 이마 위에 멈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 몸보다 조금 높은 온도, 단단하고 높은 뼈대. 피부 위에 닿은 낯선 감각에 손끝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태상은 작은 손을 부드럽게 그러쥔 채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다.

이마에서 콧대, 콧대에서 다시 콧날로. 눈으로만 알고 있는 그의 얼굴 위에 감각이 덧씌워졌다. 무채색이던 스케치에 점점 색이 입혀지는 것 같았다.


“아…….”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를 손으로 익히는데 손끝이 입술에 다다랐다. 뜨겁고 말랑한 살점이 주는 느낌은 지금까지와 너무 달랐다.

다정은 허둥거리며 손을 뒤로 뺐다. 그러자 그가 설핏 웃으며 손을 놓아 주었다.

다정은 뜨거워진 손을 맞잡고 조물조물 문질렀다. 감각을 진정시키려 한 행동인데 낯선 부드러움은 오히려 점점 더 선명해지기만 했다.


“조, 좋다고 다 만지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둘 사이에 작게 울렸다.


“난 그래. 그러니까 내 앞에선 참지 않아도 돼.”

“참다뇨…….”

“다가오고 싶으면 다가오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결국 그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태상의 눈동자가 유난히 깊고 진지했다. 다정은 빨려들 듯한 두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어요. ……안 참을게요.”

그 말이 정답이었는지, 태상의 입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

실패라 여겼던 봉골레 파스타는 태상의 손끝에서 그럭저럭 먹을 만하게 다시 태어났다.

그는 소금을 넣는 대신 향신료를 첨가했고, 오일을 듬뿍 넣어 빠르게 볶아냈다. 요리 실력과 별개로, 문제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 자체가 뛰어난 것 같았다.

싱싱한 샐러드를 곁들인 파스타, 그리고 샴페인. 함께 만든 첫 식사는 꽤 훌륭했다.

태상은 식사를 마치고 케이크를 꺼냈다. 크게 자른 조각 하나가 다정의 접시 위로 올라왔다.


“맛있을 거야. 김 비서님 안목은 믿을 만하니까.”

“네.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그가 케이크를 준비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다정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눈치 없이 파티를 망친 건 아니니까.

다정은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를 푹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빵과 크림이 흔적도 없이 뭉개지는데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감돌았다.


“진짜 맛있네요.”

다정이 포크를 입에 문 채 눈매를 반달처럼 휘었다.


“많이 먹어. 다 네 거야.”

“태상 씨도 좀…….”

그에게도 권해보려는데 식탁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슬쩍 곁눈질하자 영진에게서 온 메시지가 보였다. 다정은 확인하지 않고 다시 태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상 씨도 좀 드세요.”

“난 괜찮아.”

그가 고개를 짧게 가로저으며 핸드폰을 바라봤다.


“메시지, 온 것 같은데.”

“아…… 동생이에요. 나중에 해도 돼요.”

영진이 무슨 얘기를 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예술제에 태상이 오기로 했냐며 확인을 하는 거겠지.

아직 묻지도 않았는데 답장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정은 동생의 문자를 모른 척하며 포크를 들었다.

다시 디저트에 집중하려는데.


“…….”

한번 머릿속에 들어온 생각을 쫓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딸기를 쿡쿡 찌르고만 있는데 태상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동생도 이런 걸 좋아하나?”

“아, 아뇨……. 영진이는 단 거 별로 안 좋아해서.”

“…….”

태상은 가만히 다정의 얼굴을 살폈다. 담담한 표정에서 읽히는 건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느낄 수 있었다.

또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는 걸.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걸.

생각에 잠긴 태상의 눈동자가 조용히 침몰했다.

이번에도 조금 끌어당겨 줄까, 아니면…….

순간,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어렸다.


“영진 군은 국내로 대학을 진학할 계획인가?”

묻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기다리기로 한 사람의 여유였다.


“네. 한국대 생각하고 있어요. 거기 교수님들 중에 존경하는 분들이 많대요.”

“한국대면 실기와 필기 모두 중요하겠네.”

“다행히 둘 다 잘해요. 얄미울 만큼.”

태상은 그 후로도 영진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피아노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있는 게 증명되고도 남는 질문이었다.


“저기…… 태상 씨, 혹시 피아노 공연 자주 보러 다녀요?”

“자주 가지.”

태상이 눈썹을 살짝 움찔하며 말했다.

동굴 앞을 헤매기를 한참, 살금살금 걸어 나오는 사슴의 발끝을 목격한 느낌이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동생과 저를 만나게 하고 싶어 한다는 걸.

태상은 느긋한 투로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피아노를 좋아하셔서 자주 가.”

밀어냈다가.


“아…… 그렇구나.”

“나도 좋아하고.”

다시 끌어당겼다.


“그, 그럼, 혹시 다음 주에 저랑 공연 하나 보러 가실래요?”

“공연…….”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작은 사슴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왔다.

다가온 포획의 시간. 태상은 입꼬리를 늘이며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다정이 처음으로 하는 데이트 신청에는 아무래도 축배가 필요할 것 같았다.


“네. 동생네 학교에서 매년 예술제를 하는데, 다음 주에 혹시 시간 되시면…….”

“시간 돼. 같이 가지.”

“어…… 아직 언제인지 말 안 했는데요?”

“…….”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전략적 사고는 취미이자 특기라고 자부했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참을성이 훌쩍 날아가 버렸다.

태상은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주에 꽤 일정이 한가해서.”

“아…… 그렇구나.”

“그래서, 언제지?”

“다음 주 토요일이요. 학부모님들이나 주변 학교 학생들도 오는 큰 축제인데 볼 게 제법 많아요. 피아노 공연도 꽤 수준 있고요.”

“기대되네.”

“그렇죠?”

“피아노 말고 영진이를 보는 게.”

“아…….”

담담한 그의 목소리가 다정의 가슴에 깊은 파문을 남겼다.

매년 혼자 가던 축제는 기념사진을 찍을 때마다 여백이 참 많이도 남았더랬다.

올해는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 한쪽이 벌써부터 따스해졌다. 다정은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영진이가 괜히 틱틱거려도 이해해주세요. 누나 남자친구 처음 만나는 거라 괜히 깐깐하게 굴 거예요.”

“그럼…….”

스치듯 가벼운 웃음이 공기 중에 스몄다.


“빈손으로 갈 수는 없겠네.”

“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사 오지 마세요.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에요.”

다정이 화들짝 놀라 두 손을 파닥거렸다. 태상은 바쁘게 움직이는 손 하나를 낚아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어. 이미 샀거든.”

 

***

널찍한 방 중앙에 선 다정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커다란 침대와 협탁,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나이트 스탠드. 심플한 디자인의 가구가 가득한 이곳은 1층 끝에 위치한 침실이었다.


“여긴…… 갑자기 왜요?”

영진이를 주려고 무언가를 샀다더니 뜬금없이 침실에는 왜.

큰 눈을 조용히 깜빡이는데 태상이 시선을 깊게 얽었다. 노란 불빛 아래 그의 검은 눈동자가 매혹적으로 빛났다.


“여기 있거든.”

“……?”

“내가 사 놓은 게.”

태상이 침착한 걸음을 협탁 쪽으로 옮겼다. 그는 손잡이를 가볍게 잡아당겨 서랍을 열었다. 그러자 텅 빈 작은 공간 안에서 작은 상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지르르한 윤이 흐르는 가죽 케이스. 순간, 다정의 얼굴이 놀란 듯 굳어졌다.


“그, 그거…….”

“나중에 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

“너를 빈손으로 가게 할 순 없어서.”

태상이 반지 케이스를 담백하게 집어 들며 말했다. 다정은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봤다. 천천히 걸어온 그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상자를 어루만지듯 열었다.


“아…….”

우산 끝에 매달린 빗방울이 아닐까.

반지 위에 박힌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바라보며 다정은 문득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전부터 주고 싶었어. 결혼을 하자고 했던 그날부터.”

태상은 밴드 부분을 잡고 반지를 살며시 빼냈다. 그러자 섬세하게 커팅된 보석 표면이 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네 손만큼 예쁘진 않지만…….”

태상이 다정의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끼워 주고 싶어.”

서늘한 밴드가 손가락을 서서히 쓸고 지나갔다. 손마디 끝까지 들어온 반지는 맞춤처럼 딱 맞았다.


 
다정은 낯선 제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누군가에게 반지라는 선물을 받아본 것도, 이렇게 소중히 품어온 마음을 받아본 것도. 전부 다 처음이었다.


“너, 너무 예뻐요…… 태상 씨가 직접 고른 거예요?”

“당연하지. 너에게 줄 건데.”

그가 포근한 목소리로 말하며 다정의 머리를 살짝 쓸어넘겼다.

손끝이며 시선에서 애틋함이 물방울처럼 흘러내렸다. 이 순간, 그의 모든 신체 부위는 오로지 다정을 황홀하게 만들려고 존재하는 것 같았다.

다정은 몽롱하게 그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사람처럼 눈매를 움찔했다.


“나, 나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는데…… 반지는 원래 같이 끼는 거잖아요. 난 이런 줄도 모르고…….”

“괜찮아. 내가 먼저 시작한 거니까.”

“태상 씨…….”

“나 혼자, 멋대로. 너를 마음에 품은 거니까.”

“……”

반짝이는 빛 때문에 눈이 시리도록 아픈데 오히려 가슴은 따뜻했다.

다정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조금 침울해졌다. 인내심이 있는 남자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많이 아프고 쓸쓸했을 것 같았다.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주고 싶다고. 반지도, 마음도…….”

“널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어.”

놀란 듯한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그런 이유로 마음을 숨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는 언제나 늘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저보다 한발 앞서 있었다.


“태상 씨는 처음부터 제게 진심이었다고 했죠?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

“알고 싶어요. 언제부터…… 어떤 마음을 품어 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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