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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그녀를 향한 그의 조련(1) (57/89)


57. 그녀를 향한 그의 조련(1)
2023.04.16.


명옥이 순식간에 눈빛을 달리했다.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를 발견한 듯싶었다.


“무슨 대화 말입니까?”

“말레이시아에서…….”

“그러니까,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옷을 사주고, 그다음에 뭐.”

태상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빨라진 말과 위압적인 구두 소리가 동시에 명옥의 숨통을 조였다.


“그, 그러니까…….”

“뭐냐, 이겁니까. 그다음이.”

그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물었다. 느릿한 움직임에 맞춰 명옥의 얼굴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뻣뻣이 굳어졌다.


“있지도 않은 카드를 가지고 노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혹시 있다고 해도 상관없고.”

태상은 비서진들을 통해 그날 명옥의 행적을 좇고 있었다.

누구에게 어떤 사주를 했는지, 뭘 꾸미려 들었는지. 다정을 불안하게 하는 거라면 그 어떤 싹도 남겨둘 수 없었다. 그런 끔찍한 일은 한 번 겪는 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니까.

서늘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명옥은 입만 뻐끔거리며 멍하니 태상을 올려다봤다.

그때, 겹겹이 쌓인 침묵을 뚫고 그녀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태상은 천천히 허리를 바로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라보는 시선은 그대로 유지하며 다리만 움직이는 게, 마치 사냥감을 대하는 늑대 같았다.


“받아보시죠. 회장님일 텐데.”

회장님이라는 한 마디에 명옥의 얼굴이 움찔했다.


“……너 설마 회장님한테도 다녀왔니? 네가? 차태상이?”

명옥이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효성 3세라는 수식어 때문인지 태상은 차 회장의 도움을 받는 걸 극도로 꺼렸다.

어릴 때부터 모든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 했고, 회사 일과 관련해서도 절대 그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이 아침에 벌써 회장실까지 다녀왔다니. 명옥은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냥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게 아니었다.

정말,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가씨는.


“얼른 받으시죠. 화가 많이 나셨던데.”

태상은 그 말 한마디만 남겨둔 채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쾅, 닫히는 집무실 문이 마치 사형 선고를 알리는 신호음 같았다.

명옥은 떨리는 시선으로 핸드폰을 바라봤다. 역시 발신인은 차 회장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태상의 결혼과 관련된 일. 대쪽 같은 성미의 차 회장이 얼마나 화를 낼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 여보세…….”

「너 도대체 밖에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게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왔다.


「나도 아까워서 한 번 못 만나본 손주 며느리다. 그런 아이를 네가 뭐라고 먼저 만나!」

“저, 저는 그저 우연히…….”

「벌써부터 시어머니 노릇을 했다지? 우리 귀한 아가 눈에서 눈물을 뽑아내면서!」

“……죄송합니다. 아버님.”

「긴말할 거 없다! 지금 당장 들어와, 당장!」

 

 

***

하늘이 제법 어둡게 물든 오후.

인덕션 앞에 선 다정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노려봤다.


“하라는 대로 했는데…….”

처음 만들어본 봉골레 파스타는 처참함의 향연이었다. 면이 푹 퍼져서 식감은 흐물흐물했고, 재료마다 간이 다 다르게 배어 짠지, 싱거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역시 동영상 하나만 믿고 처음 해보는 요리를 하는 게 아니었다.


“하아…….”

나름대로 이유 있는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밀려드는 후회는 어쩔 수 없었다. 다정은 후회막심한 얼굴로 지난밤을 회상했다.

어젯밤, 다정은 책을 읽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뒤척이다 잠에서 깼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고, 방 불은 꺼져 있었다.

태상이 다녀간 게 분명한 것 같은데.

함께 지내는 첫날밤을 졸면서 보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정은 까치발을 들고 조심히 1층으로 내려왔다. 고요한 침묵만 감도는 거실 안, 태상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화려한 색감의 무언가가 다정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건…….

식탁 위에 놓인 봉투는 딱 봐도 와인이나 샴페인을 담는데 쓰는 쇼핑백이었다. 잠시 멈춰 있던 다정은 다급히 냉장고를 열었다.

역시나.

그 안에는 못 보던 샴페인과 케이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니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후, 다정은 태상이 출근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새벽같이 이른 시간, 1층에서 소리가 나자 다정은 강아지 마냥 쪼르르 달려 내려갔다. 그러곤 저녁에 샴페인과 어울리는 맛있는 요리를 해주겠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왜 그랬니…….”

처참한 봉골레 앞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푹 쉬어졌다. 다정은 오늘 아침의 제 자신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배달을 시켜야 하나.

확신 없는 손길이 핸드폰으로 향했다. 일단 확인이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배달 앱을 켜는데 주변 맛집들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이런 게 진짜 봉골레지…….

다정은 손님이 올린 후기 사진 하나를 멍하니 들여다봤다. 괜히 답답한 마음만 더해진 기분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어.”

“……!”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꽉 들어찼다.

다정은 화들짝 놀라 뒤로 돌았다. 등 뒤에는 샤워를 마치고 나온 태상이 서 있었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젖어 있었고 몸에서 은은한 보디 워시 냄새가 풍겼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정은 재빨리 핸드폰을 등 뒤로 숨겼다.

배달 앱을 보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안 그래도 맛없는 파스타를 그가 더 맛없다고 느낄 것 같았다.

지어낸 웃음 덕에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

태상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다정의 얼굴을 바라봤다.

분명 배달 음식 메뉴가 보였던 것 같은데.

대답을 피하는 표정이며 행동이 영 어색했다. 그는 느릿한 시선으로 작은 얼굴을 훑었다. 역시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했다.

태상은 고민에 잠겼다.

거리를 둘 때일까, 아니면 조금 친해질 타이밍일까. 생각 끝에 그는 다정을 살짝 끌어당기기로 했다. 이제는 아주 조금 더 가까워져도 될 것 같았으니까.


“파스타, 맛있겠네.”

태상이 가볍게 미소를 띠며 인덕션 앞에 나란히 섰다.


“처음 만들어 본 거라 그냥 그래요. 좀 짜고…… 아니, 좀 싱겁게 됐다고 해야 하나?”

“간을 다시 봐야겠네.”

“보긴 여러 번 봤는데…….”

여러 번 본 정도가 아니라 사실 정말 질리게 봤다. 다정은 고개를 기울이며 말끝을 살짝 흐렸다.


“내가 볼게.”

“아, 그럴래요? 그게 낫겠다.”

요리를 만들면서 너무 많이 먹은 저보다 태상의 미각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다정은 기쁜 마음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어쩌면 그가 먹어보고 적당한 해결책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

젓가락을 돌려 그에게 내미는데 태상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눈만 깜빡거리며 올려다보자 그가 눈동자를 내려 파스타를 힐끗 쳐다봤다.

설마 먹여달라는 뜻인가.

다정은 놀란 얼굴로 멍하니 태상을 바라봤다. 제가 아는 태상은 이런 표현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눈만 깜빡거리자 그가 재촉하듯 젓가락을 프라이팬 쪽으로 밀었다.


“알겠어요.”

다정은 작게 웃으며 파스타 면을 집었다.

요즘 들어 그의 뻔뻔한 면을 꽤 자주 마주하는 것 같았다.

분명 제 앞에서만 보이는 행동이겠지. 아마도 저를 편하게 해 주려고.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의 일면에 마음이 조금 몽글몽글해졌다.

다정은 프라이팬 중앙에 젓가락을 넣고 몇 번 휘휘 돌렸다. 손목을 감는 속도에 맞춰 면이 솜사탕처럼 감겼다.

젓가락을 들어 올리고 후, 하고 불자 열기가 허공으로 하얗게 날아갔다. 다정은 다른 한 손으로 아래를 받치며 파스타를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자요.”

태상이 허리를 살짝 숙이며 고개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는 제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뿐 입을 벌리지 않았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아마도 뺨. 다정은 안 그래도 달아오른 두 볼이 신경 쓰여 견딜 수 없었다.

열기가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지는데 태상의 입가에 즐거운 듯한 미소가 어렸다.


“어, 얼른 드세요.”

가만히 젓가락을 들고 있던 다정이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태상은 작은 손을 감싸 쥐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붉은 입술이 스르르 벌어지며 젓가락 끝을 가볍게 물었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는지 다정이 손을 작게 움찔했다.


“맛있어.”

태상이 그렇게 말하며 다정의 손을 느릿하게 놓아주었다.


“정말요? 그냥 하는 말…… 아, 묻었다.”

다정이 문득 말을 멈췄다.

끝까지 제대로 감기지 않은 면발이 있었는지 그의 입가에 올리브 오일이 조금 묻어 있었다.

별거 아니긴 하지만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뜨겁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다정은 조리대 위에 있던 리넨 타월을 집어 들어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살짝 찍어내며 닦아내는데 그의 입술이 느릿하게 휘었다.


“…….”

의아함에 손이 우뚝 멈췄다.

기쁜 건가.

닦아준다는 자상한 행위가 기쁜 건지, 아니면 제 손길이 좋은 건지. 정확히 뭐가 좋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올렸다. 순간, 숨이 빠르게 멎었다.

웃고 있었다. 위험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

다정은 손을 멈춘 채 멍하니 굳어졌다.


“…….”

“그렇게 쳐다보는 건, 내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뜻인가.”

“다, 당연히…….”

“당연히……?”

뒤에 숨겨진 말을 뻔히 알면서 그가 나직이 캐물었다.

다정은 입술을 한번 말아 물었다, 떼며 작게 웅얼거렸다.


“당연히 마음에 들죠, 너무.”

끌로 깎아 놓은 듯한 눈매며 오뚝한 콧날, 붉은 기운을 머금은 도톰한 입술.

이런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다정은 굳이 수줍은 말을 하게 만드는 그가 조금 얄미웠다.


“그럼 만져 봐.”

괜히 시선을 딴 데로 돌리는데 그가 당혹스러운 말을 했다.

마음에 들면 만지는 거라니.

순간, 어제 차에서 했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좋은 건 손을 대는 거다. 그 단순하고 직선적인 욕망이 태상에게는 너무 당연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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