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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내 여자를 건드리면 (56/89)


56. 내 여자를 건드리면
2023.04.13.


민트색 박스와 기다란 종이 쇼핑백 하나. 낯선 물건은 비서진들이 사용하는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상자 위에는 ‘부사장님께’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김 비서님의 필체인데.

익숙한 글씨를 알아본 태상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는 눈썹을 살짝 좁힌 채 책상으로 다가갔다. 정체불명의 상자를 열자 보냉 포장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상자 안에 든 건 빨간 딸기가 콕콕 박힌 케이크였다.

안 어울리게 왜 이런 걸.

몽글몽글한 생크림을 한껏 노려보던 태상이 빠르게 포스트잇을 뜯었다. 무언가 설명이 있기를 바라며 종이를 돌려보는데 짧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늦게 들어갈 때는 원래 이런 거 사가지고 들어가는 겁니다.’


“…….”

피식.

태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얼빠진 듯한 웃음이 제 입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그는 상자를 조심히 닫고 옆에 놓인 종이 쇼핑백을 열어 보았다. 안에 든 건 보기만 해도 달콤한 맛이 느껴지는 샴페인이었다.

그저 빨리 가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김 비서님…….”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배려에 다정과의 저녁이 한층 더 달콤해질 것 같았다.

태상은 쇼핑백과 케이크를 양손에 들고 기분 좋게 발을 놀렸다. 김 비서에게는 아무래도 특진 혹은 포상 휴가를 내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주차장으로 향한 그는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조수석에 놓았다.

빨리 가고 싶기는 한데, 케이크는 흔들리면 안 될 것 같고.

액셀을 밟는 내내 그의 눈동자가 자꾸만 옆 좌석으로 향했다. 도로와 케이크를 번갈아보기를 수십 차례, 널찍한 주차 공간에 차가 멈춰 섰다.

-띠리릭.

적막한 집 안에 도어 록 소리가 울렸다.

빨리 온다고 왔지만 어느새 일곱 시가 다 되어 갔다.

태상은 케이크와 샴페인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다정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조용한 집 안 어디에서도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설마…….’

설마 다시 집으로 돌아간 건 아닐까.

1층을 다 둘러보았는데도 다정이 보이지 않자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태상은 조금 빨라진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굳이 2층을 골랐을 리가 없는데. 여기에라도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한 발, 한 발 움직일 때마다 상반된 생각이 정신없이 교차했다. 태상은 긴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하아…….”

2층에 복도에 다다르자 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이 있다.

순간, 또 다시 바보 같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뭘 그렇게 걱정한 건지. 짐까지 다 가지고 나온 사람이 어디 갈 리도 없는데.

태상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래도 뇌의 모든 용량이 다정을 향해 쓰여 논리적 사고라는 게 불가능해진 것 같았다.


“한다정.”

방 밖에서 작게 이름을 부르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심히 문을 열자 안에서 부드러운 불빛이 쏟아져 나왔다.

다정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었다. 옆에 책 한 권이 펼쳐져 있는 게 아무래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

태상은 천천히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정의 이마를 가리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자 얼굴 위에 어리던 그림자가 깨끗이 가셨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주위를 살짝 둘러봤다. 화장품이며 옷가지, 가방. 자주 쓰는 물건들이 군데군데 눈에 들어왔다.

다정의 손때가 탔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사소한 물건들 하나하나가 전부 귀엽게 보였다.


‘이 방…….’

순간, 부드럽게 미소 짓던 태상의 미간이 빠르게 좁혀졌다.

이 방은 분명 이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이었다. 2층 끝자락에 위치해 오가기가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아…….”

태상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애초에 예상을 했어야 했다. 다정이 크고 좋은 걸 넙죽 고를 리가 없다는 걸.

집에서 나가기 전에 제일 크고 좋은 방으로 골라주고 나갔어야 했는데.

저를 향한 배려라는 걸 잘 알면서도 어쩐지 마음이 아팠다. 태상은 시선을 들어올려 가만히 다정을 들여다봤다.

이렇게 배려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데.

늦게 온다고 불평하고, 좋은 걸 마음대로 가지고. 그렇게 마음껏 너를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태상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네가 너를 스스로 드러내게 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채 다정을 들여다보는데, 다정은 잠든 아기처럼 고른 숨을 내쉴 뿐이었다.

제게는 이렇게 큰 숙제를 안겨주고 곤히 자는 모습이라니. 태상은 동그란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벌이야.”

작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울렸다.

태상은 불을 끄고 천천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하면 다정이 더 편하게 여길 수 있을까. 이곳을 그리고 저를.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학생처럼 그의 얼굴이 고민으로 물들었다.



***

‘외부 일정’이라는 핑계로 하루 자리를 비운 다음 날.

명옥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여유롭게 집무실로 향했다.

부드럽게 손잡이가 돌아가고 문이 열리는데.


“…….”

순간,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었다.

태상은 아무도 없는 집무실을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차지한 소파 상석, 꽉 누르듯 교차하고 꼰 다리.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그저 앉아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위압감이 흘러넘쳤다.

명옥은 공기 중에 스민 긴장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음을 옮겼다.


“주인도 없는 곳에 멋대로 드나들다니 부사장님 성격이 많이 변하셨네?”

명옥이 곁으로 다가가자 태상이 그제야 느긋하게 턱을 치켜세웠다. 까만 눈동자가 무서울 만큼 차분했다.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내가 없는 사이에 내 것을 건드려놓고.”

“…….”

역시 태상에게 붙은 건가. 멍청하기는.

마음이 어쩌고 운운할 때부터 물러 터졌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태상에게 고해바칠 줄은 몰랐다.

명옥은 책상 위에 핸드백과 커피를 올려놓고 사무용 의자에 앉았다. 소파에 자리를 잡아도 됐지만 태상과 최대한 거리를 띄우고 싶었다.


“희망원 얘기를 하는 거라면…….”

그녀가 컴퓨터 전원을 켜면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재단 업무차 들른 것뿐이야.”

“그런 쉬운 변명이 통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

“어림없죠.”

태상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부장님은 오늘부로 재단에서 직위 해제됐습니다. 앞으로 재단 일에는 관여하지 마십시오.”

그가 뚜벅뚜벅 걸어오며 말했다. 서늘한 얼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냉기가 흘러넘쳤다.

명옥은 지지 않고 눈을 치켜떴다.


“누구 마음대로?”

“잊으신 모양인데 효성 재단 이사장은 접니다.”

“…….”

“그깟 자리 하나,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없앨 수 있죠.”

명옥은 속으로 이를 바드득 갈았다.

안 그래도 이사장 자리를 놓친 게 두고두고 아쉬웠는데 재단에서 이렇게 쫓겨나게 될 줄은 몰랐다.

어금니가 절로 꽉 물리는데 묵직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또 재단 소유의 창고도 언제든지 열어볼 수도 있고.”

“그, 그게 무슨 소리니?”

짧은 순간 명옥의 입꼬리가 움찔하며 경련했다.

태상이 그걸 알 리가 없는데. 분명 완벽하게 처리했는데.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다.


“전부 다 확인했습니다. 종로구에 위치한 화랑 두 군데.”

“……!”

“그간 재단 명의로 미술품 낙찰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명목은 소득 격차로 인한 문화 사각지대 해소, 무료 전시회 개최.”

단조롭게 울리는 목소리가 마치 법정에서 울리는 판결문 같았다. 명옥은 떨리는 눈동자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그, 그래. 효성 갤러리. 내가 요새 좀 바빠서 아직 실천에는 못 옮겼지만 곧 오픈할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제가 대신 해드렸습니다.”

“……뭐?”

“화랑에서 찾은 미술품 전부, 국립 미술관에 기증 절차 밟고 있습니다.”

“야, 차태상!”

명옥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미술품들은 언젠가 수빈에게 물려주려고 모아놓은 거였다. 재단 기부금에 사비를 보태 매년 조금씩 사 모은 건데.

곳간을 한 번에 털려버린 명옥은 주먹을 쥔 채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지금 그깟 여자애 하나 건드렸다고 이러는 거야? 내가 그걸 다 어떻게 모았는……!”

“그깟 여자애.”

태상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꽉 누르며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내가 그깟 여자애한테 얼마나 미쳐 있는지 알면 그런 소리를 안 할 텐데.”

“도, 도대체 걔가 뭐라고…….”

“궁금하면 한 번 더 건드려 보시죠.”

“…….”

“그땐 당신이 가진 모든 걸 다 쓸어버릴 테니까.”

태상이 고개를 삐딱하게 틀며 말했다. 힘이 꽉 들어간 턱이며 높게 솟은 어깨가 더없이 위압적이었다.


“……차, 차태상, 너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

태상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는 눈매에 어울리지 않는 비뚜름한 입술, 거기다 꽤 흥분되어 보이는 눈동자까지.

평생 감정이라고는 내보일 줄 모르는 태상이었는데. 무섭게 돌변한 그의 얼굴에서 읽히는 건 제 것을 향한 짙은 소유욕이었다.

명옥은 허탈하게 웃으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건드려선 안 되는 걸 건드린 것 같았다.


“참고로 비서진들 모두 교체 되었으니 그렇게 아십시오.”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그가 가볍게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비서를…… 뭐 어째?”

“다 바뀌었다고요.”

“네가 무슨 자격으로!”

“제가 교체한 게 아닙니다. 어디 좋은 데 스카우트라도 되셨는지 다들 오늘부로 사표를 내신다고 하네요.”

“…….”

“새로 교체되신 분들은 모두 부사장실에서 근무하던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쥐새끼 마냥 남의 대화 엿듣을 생각하지 말고, 내 여자 근처에서 얼쩡거리지도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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