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서로를 향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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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로를 향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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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서로를 향한 마음
2023.04.09.
“응, 영진아.”
「누나.」
오랜만에 듣는 동생의 목소리는 여전히 경쾌했다. 다정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고 화장대 앞 의자에 앉았다.
“왜?”
「누나, 연애해?」
“뭐? 왜,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오늘 애들이 그러던데? 누나가 어떤 되게 잘생긴 형 차 타고 보육원 앞에 지나가더라고.」
“어, 아, 그게…….”
다정은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태상과 결혼을 하기로 했을 때부터 영진에게 그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쑥스럽고 어색해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던 터였다.
허물없이 자란 사이라 어려움 따위는 없을 것 같았는데. 다정은 차오르는 민망함에 목덜미 긁적였다.
「그 사람이지, 우리 보육원 부지 사들인 사람.」
“응…….”
「누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거겠네?」
“아마…….”
「그럼 그날 처음 본 사이는 아닐 거고, 전부터 알던 사람?」
“그렇지…….”
피아노만 잘 치면 됐지, 왜 머리까지 좋고 난리인지. 예리한 동생의 질문에 다정은 굼벵이처럼 느릿하게 답을 했다.
「누구야?」
“그게…….”
생각해 보면 태상과의 관계가 진짜가 된 지금이야말로 말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 문득 스치는 생각에 다정의 목소리가 한결 가벼워졌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
다정은 ‘부사장님’이라는 단어를 최대한 친근하게 바꿨다.
「흐음. 그래?」
“응. 그래.”
「누나.」
“왜?”
「우리 학교 예술제, 이번 주 토요일이야.」
영진의 학교에서는 ‘한여름의 예술제’라는 이름으로 매년 전시회와 연주회를 개최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예고답게 기품 있으면서 답답한 행사였다.
“알아, 안 그래도 가려고 했어. 근데 뜬금없이 그건…….”
조곤조곤 말을 잇던 다정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휘발되어 날아갔다.
“야, 안 돼. 바쁜 사람이야.”
「바쁜 사람은 데이트 안 하나? 기다릴게.」
“영진아, 야, 한영진!”
동생의 이름을 연신 불러 보았지만 들려오는 건 매정한 통화 종료음뿐이었다.
“하아…….”
다정의 입에서 기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태상과 영진을 만나게 한다니. 안 될 건 없지만 마음이 괜히 답답했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사이인데 가족을 소개해도 괜찮은 걸까. 태상이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계약이 아닌 진짜 관계가 되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신경 쓰이는 것투성이였다.
다정은 고개를 들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가족…….”
멍하니 생각나는 단어를 읊는데 묵직한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눌렀다.
철부지 고등학생인 영진도 저를 걱정하며 태상을 직접 보겠다고 하는데, 태상의 가족들은 오죽할까.
태상을 끔찍이도 아낀다는 회장님, 하나밖에 없다는 동생.
기대치에 못 미치는 저를 보며 어떤 시선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기운이 쭉 빠졌다.
다정은 눈꼬리를 축 늘였다. 그때, 핸드폰이 손 안에서 다시 짧게 울렸다.
혹시 영진이 마음을 고쳐먹은 건가 싶어 시선이 빠르게 내려갔다.
‘짐은 다 풀었어?’
태상이 보낸 문자였다. 곁에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타이밍을 잘 맞추는지. 시무룩했던 기분이 절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네. 방금 다 풀었어요.’
‘어느 방으로 골랐어?’
2층 끝 방이라고 메시지를 쓰던 다정이 빠르게 문자를 지웠다.
“……뭐라고 할 텐데.”
집을 나서기 전, 태상은 가장 크고 좋은 방을 고르라고 했다.
다정은 그러겠다고 말하곤 결국, 2층 가장 끝 방을 골랐다. 1층은 온전히 다 태상에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는 일터에서 언제나 완전무결해 보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부사장이라는 위치가, 어깨를 누르는 책임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다정은 그런 그에게 숨통이 트일 수 있는 공간을 남겨주고 싶었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온전한 혼자만의 공간을.
답장을 쓰는 다정의 손가락이 다시 바빠졌다.
‘제일 좋은 방 골랐어요. 저녁에 와서 보세요.’
***
효성 재단 이사장실.
태상은 하던 일을 멈추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고작 물건일 뿐인데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부드러웠고, 슬쩍 올라간 입꼬리 역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김 비서는 그런 태상이 당혹스러웠다.
성난 짐승처럼 달려들어 차키를 빼앗던 게 바로 오늘 아침인데. 녹아내릴 듯한 얼굴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당장 효성 재단 이사장실로 와 주십시오. 올 때 본부장 비서실 인사 기록 전부 다 가져오시고요.’
죽도록 전화를 할 땐 받지도 않더니 뜬금없이 연락을 해서 한다는 소리가 저거였다.
김 비서는 태상이 말한 파일을 준비해 재단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태상은 이미 서류 더미에 파묻힌 후였다. 숫자가 빼곡히 적힌 거로 보아 재무제표인 것 같았다.
갑자기 일정에도 없던 회계 감사라도 할 작정인 건지. 그가 무엇을 찾아 이 방대한 기록을 다 뒤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김 비서님.”
“네.”
태상의 부름에 그가 느슨하던 허리에 힘을 바짝 주고 섰다.
“재단 기부금 사용 내역, 작년 하반기 것도 준비해 주셔야겠습니다.”
“안 그래도 부탁하실 것 같아서 미리 뽑아 놨습니다.”
김 비서가 커다란 책상 끄트머리에 보고서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일부러 테이크아웃 샌드위치 옆에 내려둔 건데 태상은 거침없이 서류만 집어 들었다.
김 비서의 눈에 걱정이 썰물처럼 차올랐다.
“부사장님, 식사라도 좀 하시면서 보시죠.”
“네…….”
그가 숫자 더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기계적으로 답했다. 김 비서는 깊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점심, 안 드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녁 먹으면 됩니다.”
“이 서류를 다 보려면 저녁이 아니라 내일 아침도 못 드실 겁니다.”
“저녁, 늦더라도 챙겨 먹을 겁니다. 집에 가서요.”
“집에……요?”
김 비서가 눈동자를 크게 키우며 물었다.
업무 차 태상의 집에 방문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텅 빈 냉장고며, 손때를 전혀 타지 않은 부엌. 그는 집에서 밥이라는 걸 먹는 사람이 아니었다.
김 비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설마 밥 대신 와인을 드실 생각은 아니시죠? 집에 먹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먹을 거…….”
태상이 펜을 우뚝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얼굴 위로 나른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많습니다. 엄청.”
“…….”
“그러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먼저 퇴근하시죠. 원래대로라면 오늘 일찍 들어가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 태상은 비서들을 일찍 퇴근시켜 주곤 했다.
입국 당일은 업무 일정을 그리 바쁘게 잡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사실 이건 잦은 야근에 시달리는 비서실 직원들을 위한 태상의 배려였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일에 매달리길래 오늘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줄로 알았는데. 김 비서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다시 되물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네.”
“……그럼 염치불구하고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의리 없이 먼저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지만 딸아이의 생일인 오늘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김 비서는 죄송스러운 마음을 꾹 누른 채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그리고…….”
태상이 포스트잇 위에 무언가를 적어 건넸다.
“내일 출근은 이곳으로 해 주십시오. 시간은 이르면 이를수록 좋습니다.”
“…….”
종로에 위치한 화랑 두 곳. 처음 보는 이름이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태상이 오늘 하루 서류 더미에서 찾아낸 결과물이라는 걸.
“도착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김 비서가 작은 종이를 슈트 안 주머니에 넣으며 짧게 답했다. 태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류 위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무심한 듯 한 마디를 흘렸다.
“집에 가는 길에 케이크 사 가는 거 잊지 마시고요.”
“…….”
김 비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분명 작년 이맘 때 즈음, 휴가를 내며 딸아이 생일이라고 말한 게 전부인 것 같은데.
“기억하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숫자에 대한 기억력이 좋은 것뿐입니다. 어서 가 보시죠. 더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
기다리느라 애가 타는 사람, 빨리 가야 해서 애가 타는 사람. 태상은 보통 그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의 그는 달랐다. 마치 둘 다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설마.
허공을 떠돌던 작은 퍼즐들이 서서히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김 비서는 바람이 빠지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이 단순한 걸 이제야 깨닫다니, 최측근 비서라는 타이틀을 반납해야 할 것 같았다.
그는 입술을 부드럽게 휘며 허리를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내일 뵙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온 그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하늘이 캄캄해진 시간.
마지막 서류 한 장을 넘긴 태상이 드디어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중요한 사안만 본다고 본 건데도 벌써 하루해가 다 저물어 버렸다.
그냥 종일 다정의 곁에 있고 싶었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와야 했다.
다정을 지키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많은 걸 가지고 있어야, 저를 끌어내리려는 사람들로부터 다정을 보호할 수 있었다.
태상은 조용하고 철저하게 반격의 준비를 마쳤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게 끝나진 않겠지만 적어도 확실히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건드려도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태상은 빠른 손놀림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출발한다는 말을 하려고 메시지 창을 불러오는데 다정과 주고받은 대화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정원에 예쁜 꽃나무가 참 많네요.’
‘식재료를 배달 시켰는데 정말 빨리 왔어요.’
‘늦어도 되니까 천천히 오세요.’
읽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태상은 손끝으로 다정이 보낸 글자를 가만히 쓸었다.
순간, 생경한 마음 하나가 솟아났다. 그는 핸드폰을 재킷 안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표정도 귀여울 것 같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위로 번지는 놀란 표정이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이런 어린아이 같은 생각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상은 픽 하고 웃음을 흘리며 성큼성큼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닫고 나서는데 낯선 물건이 태상의 시선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