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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내 꺼 (54/89)


54. 내 꺼
2023.04.06.



“네? 그게 무슨…….”

“녹음된 내용이 있었으면 벌써 회장님께 달려갔을 여자야. 직접 밝혀달라니, 허튼 수작에 지나지 않아.”

“그 말은…….”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널 협박한 거야.”

태상은 거짓과 진실을 자연스레 섞는 것이 명옥의 특기라고 말했다. 오랫동안 겪어온 사람들만 알아차릴 수 있는 교묘한 수법이라고.

다정은 천천히 그녀와의 대화를 되짚어 봤다.


‘다…… 들었다고요?’


‘네. 전부 다. 그날 대화가 모두 녹음된 이 파일로.’

 
그러고 보니 명옥이 그날 일에 대해 언급한 건 그 말 한 마디가 다였다.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 내내 공격적으로 저를 몰아부친 것치고, 거기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 알고 있기는 한데, 확실한 물증은 없었던 건가.

다정은 그제야 상황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동시에 속았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졌고.


“생각해 보니까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닌데…….”

“넌 그냥 너무 겁이 났던 거야.”

“…….”

그 말대로였다.

제가 한 말 때문에 태상이 다치지는 않을까 겁이 났고, 의심 같은 건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다정은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동시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완전히 떨치지는 못했다.


“속은 거라도 좋으니까 파일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어요.”

“걱정하지 마. 만약 있다고 해도 널 다시 위협하게 두지는 않아.”

태상이 단단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젠 내가 널 지켜.”

그가 다정을 있는 힘껏 끌어안으며 말했다.

다정은 너른 품 안에서 옅은 떨림을 토해냈다. 아주 희미한 느낌일 뿐인데. 태상은 그 잔잔한 떨림이 마치 살갗을 베는 것처럼 아팠다.

내게 가장 연약한 것을 다치게 했으니, 너의 가장 소중한 걸 망가뜨려 주어야겠지.

그가 눈을 예리하게 치뜨며 허공을 노려봤다. 애달프던 눈동자는 어느새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태상이 타고 온 세단은 운동장 초입에 버려진 듯 주차되어 있었다.

다정은 우산을 접어서 정리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완전히 등을 기대고 앉자 서늘한 가죽의 느낌이 등 뒤로 전해졌다.

다정은 퍼져 있는 치맛자락을 연신 끌어모았다. 생활관 안에서 수건으로 닦고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물기를 머금은 옷자락이 신경 쓰였다.


“젖어도 괜찮아.”

“안 돼요. 가죽이잖아요.”

다정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모아 쥔 채 말했다.


“춥지는 않아?”

“네. 괜찮아요.”

일일이 다 확인하고 챙기는 게 피곤하지도 않은지 태상은 그 후로도 다정의 행동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폈다.

호텔 컨시어지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다정이 혀를 내두르게 될 즈음 차가 보육원 앞 큰길을 빠져나왔다.


“배는 고프지 않고?”

“그거…… 매번 그만 좀 물어보시면 안 돼요?”

“많이 울었잖아.”

“얼마 안 울었어요.”

다정은 저도 모르게 볼 언저리를 쓸었다. 그러자 태상이 팔을 뻗어 자그마한 손을 빠르게 빼앗아 왔다.

그 날렵함이 마치 옷자락에서 손이 떨어져 나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

다정은 그의 손에 폭 감긴 제 손을 가만히 바라봤다. 서로의 진심을 나눠 가지고 잡는 손은 평소보다 훨씬 따뜻했다.


“춥네.”

“……네?”

“손, 이렇게 차가운데.”

“아…….”

에어컨 바람이 조금 싸늘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추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태상이 손을 꼭 쥐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온도를 조절하려는 듯, 그가 다정의 손을 다시 무릎 위에 올렸다.


“그냥…….”

“……?”

“그냥…… 조, 조금만 높이면 된다고요.”

그냥 손을 잡고 있는 게 더 좋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다정은 하고 싶었던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말아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랬다.

천천히 다가오겠다며, 제 마음의 크기가 너무 크다고 말하는 태상 앞에서 선뜻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사실은 저도 정말, 정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왜.

잠시 고민하던 다정은 그저 수줍음 많은 제 성격을 탓했다.


“짐은 간단하게 챙겨. 어차피 웬만한 건 다 준비되어 있으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에 생각이 잠시 끊겼다.


“네. 어차피 비행 갈 때 쓰는 트롤리만 챙기면 돼요.”

생활관을 나서기 전, 태상은 한 가지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여자를 여기서 만난 게 우연일 리 없어. 분명 집에서부터 너를 감시하는 눈이 있었을 거야.’

 
다정도 오늘 일이 완벽한 우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감시라니. 그저 제가 쉬는 날을 확인하고 보육원을 방문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하루 종일 저를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등 뒤로 소름이 돋아났다.


‘우리 집으로 가자. 거기라면 안전해.’


‘같이…… 살자는 말씀이세요?’


‘그게 싫다면 경호원을 붙여줄 수도 있어.’


‘아, 아니에요. 그런 건 오히려 더 불편할 것 같아요. 그리고…….’


‘…….’


‘제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 태상 씨가 불안하잖아요. 또 저도…… 태상 곁에 있는 게 제일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요.’

 
말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그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커져 버린 마음을 그의 다양한 모습으로 채우고 싶었다. 바쁜 태상의 시간을 1분이라도 더 가져오고 싶었고.

진짜 이유는 이렇게나 부끄럽고, 제멋대로였다.

긴장한 표정에서 그런 속마음이 들키지는 않을까. 다정은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느새 가늘어진 빗줄기가 차창을 톡톡 두드렸다.


“무슨 생각해.”

애써 태연한 척을 하는데 태상이 그 짧은 변화를 감지했다.


“별 생각 안 했어요. 그냥…… 오랜만에 비 오니까 좋다, 그런 생각?”

“비 오는 날이 좋아?”

태상이 다시 다정의 손을 끌어다가 잡으며 물었다.


“네. 냄새도 좋고 소리도 좋잖아요. 태상 씨는요?”

“나는…….”

그가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말했다. 느릿하게 이어지는 말투와 손길이 비슷한 속도로 다른 감각을 채워 나갔다.

그때, 차가 신호에 맞춰 서서히 멈춰 섰다.

태상은 고개를 완전히 돌린 채 나직이 말을 이었다.


“나는 그냥 한다정이 좋아.”

“그게 뭐예요.”

뭐라고 한 마디 해 주려는데 그가 굵은 손마디를 마저 밀어 넣으며 깍지를 끼웠다. 그러자 손가락 사이가 쫙 벌어지며 부채처럼 펼쳐졌다.

오리 발바닥 같네.

작게 미소를 짓자 눈꼬리가 물결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

태상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뚫어질 듯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고, 안 그래도 꽉 잡은 운전대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머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시선이 자꾸만 조수석 쪽으로 향했다. 다정이 만들어낸 작은 물결은 태상의 가슴에서 커다란 파도가 되었다.

그 위를 힘없이 떠다니기를 한참, 그가 결국 갓길에 차를 세웠다.


“……왜 멈춰요?”

의아한 표정으로 밖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목 뒤로 커다란 손 하나가 밀고 들어왔다.

다정은 놀라 퍼뜩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한껏 가까워진 그의 검은 눈동자가 코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태, 태상 씨……?”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 다정은 떨리는 목소리를 조심히 내뱉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으면…….”

“……?”

“나보고 운전을 어떻게 하라는 거지.”

태상이 손끝으로 눈꼬리를 훑으며 말했다. 곡선을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이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 그럼 웃지 말아요?”

“아니.”

“그럼…… 무표정?”

어려운 질문의 답을 찾느라 다정의 눈동자가 작게 일그러졌다.


“아니, 웃어.”

“너무 뻔뻔하잖아요.”

다정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새까만 눈동자가 눈매를 따라 흐르듯 움직였다.

그저 조금 웃은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집중해서 바라보다니. 수줍은 기분에 사로잡힌 다정은 부드럽게 시선을 떨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태상이 눈꼬리 위에 입술을 눌렀다. 뜨거운 체온이 얇은 피부 위로 빠르게 번졌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눈을 꼭 감았다.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데 태상은 그 느낌마저 고스란히 머금었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유치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들은 눈으로만 보라고 해도 말을 안 듣고 손을 댄다고. 보기에 좋은 건 꼭 만져보고, 그 위에 이름을 새기고, 결국엔 집에까지 가져간다고.

뜨거운 입술 아래 놓인 다정은 문득 태상이 바로 그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면 서울까진 버티겠지.”

한참만에 고개를 뗀 태상이 말했다. 다정은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창 쪽으로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어쩌지…….’

그는 이전에도 거침없는 남자이긴 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선이 없어진 지금, 태상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고 강하게 직진을 해왔다.

다정은 들뛰는 가슴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앞으로 그의 대담함에 따라가려면 심장을 좀 더 강하게 단련시켜야 할 것 같았다.

***

해가 잘 들어 선택한 2층의 작은 방.

다정은 짐을 정리하다 말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멀찍이 떨어진 단독 주택 몇 채와 그 사이에 마련된 작은 공원. 넓은 부지를 이런 식으로도 쓸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태상이 말한 ‘우리 집’은 프라이빗함과 고급스러움으로 무장한 한남동의 전원주택 단지였다.

입구부터 강도 높은 보안 시스템이 적용되는 이곳은 외부인이 접근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저를 이곳에 데려다주고 난 후, 태상은 다시 집을 나섰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늦지 않게 돌아올게.’

 
분명 명옥과 관련된 일일 텐데.

다정은 그러지 말라고, 저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단 한 번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명옥은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와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 태상.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있었을지는 쉽게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래서 더더욱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명옥과 관련된 일은 그에게도 민감한 부분일 것이며, 경영권 방어라는 현실적 측면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기 때문에.

지켜볼 수도, 나설 수도 없는 상황 속, 다정은 조심히 다녀오라며 웃어 보였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데 화장대 위에 놓아둔 핸드폰이 가볍게 울렸다.

다가가 액정을 확인하자 의외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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