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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하나가 된 두 사람 (53/89)


53. 하나가 된 두 사람
2023.04.02.



“네? 그게 무슨…… 서, 설마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그래서 그러시는 거예요?”

커다란 눈동자가 놀란 듯 흔들리자 갈 곳을 잃은 눈물이 뺨 위로 흘러넘쳤다.

태상은 턱 밑에 가만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동그란 궤적을 남기며 흐른 눈물이 기다란 손가락 위에 동그랗게 맺혔다.

그는 작은 물방울을 손가락 사이에서 짓이겼다. 다정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제 것인 것 마냥 아팠다.


“그런 게 아니야.”

짙은 눈동자가 물고 늘어지듯 다정을 바라봤다.


“그, 그럼요?”

“내가 너무 힘이 들어서.”

“…….”

“널 적당히, 참아가면서 좋아해야 하는 게. 그게 너무 힘이 들어.”

천천히 인내하며 다가가기엔 다정을 마음에 품은 시간이 너무 길었다.

사고가 있은 후, 태상은 줄곧 다정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저 죄책감이었다.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죄악감. 감당하기 힘든 무게에 태상은 다정을 원망하기도 했다. 왜 내 인생에 나타나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하지만 그런 마음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다정이 그리워졌다.

아무도 없는 제게 먼저 다가와 준 아이, 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어주던 아이. 생에 처음으로 느낀 따스함은 그 어떤 감정보다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나는 처음부터 네게 진심이었어.”

“이, 이 결혼에 진심이었다는 말씀이세요?”

“응. 아주…… 처음부터.”

태상이 허리를 깊게 숙이며 눈을 맞췄다. 매우 소중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눈동자가 아득하고 아련했다.


“왜, 왜요? 우린 그냥 우연히 만난 사이일 뿐인데……?”

“나한텐 아니야. 운명이었어.”

“…….”

“한결같이, 늘.”

태상은 먼 길을 돌아온 자신이 한심했다.

잠시만 곁에 있다 놓아줄 거라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제가 한다정을 참을 수 있을 리 없는데.

그냥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1분도 낭비하지 않고 처음부터.


“계약 같은 거 없이, 날 진심으로 봐 줘.”

 

 

***

‘희망원’

낡은 간판이 수빈을 맞이했다.

수빈은 보육원 초입에 차를 멈춰 세웠다. 문을 열고 내리자 굵은 빗방울이 머리 위로 툭툭 떨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화번호라도 알아두는 건데.

뒤늦은 후회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천천히 올라왔다. 수빈은 운동장 안쪽에 있는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그때,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수빈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운동장 한가운데 덩그러니 멈춰진 세단. 왠지 낯익은 느낌에 자세히 살펴보는데 부사장실에서 사용하는 차량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순간, 수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여기, 지금.

다정이 너로 인해 상처받은 지금, 네가 여기 있는 건가. 태상의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그에겐 다정을 위로할 자격 같은 게 없다. 수빈은 그렇게 생각하며 바삐 발을 놀렸다.

중앙 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양옆으로 뻗은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는 우선 가까운 쪽에 있는 복도로 방향을 잡았다.

통로에는 화장실이며 식당 같은 잡다한 시설들이 늘어서 있었다.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안을 살피는데 어디에도 다정의 모습은 없었다.

발끝을 돌리려는 그때.


“저도…….”

어디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읊조리는 것 같기도 한 음성. 빗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어쩐지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수빈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활짝 열린 창밖으로 펼쳐진 화단이 보였다.

수빈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그 앞으로 다가갔다.


“저, 저도 태상 씨가 좋아요.”

“…….”

한 글자, 한 글자가 귓가에 아프게 박혔다.

수빈은 뻣뻣하게 굳어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다정이 서 있었다. 태상의 옷을 걸친 채 수줍게 웃고 있는 다정이.

태상은 다정을 단번에 끌어당겨 품 안에 넣었다. 다정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수빈은 두 눈을 꽉 감았다.

별똥별이 눈에 떨어지면 이런 느낌일까.

보는 건 너무 예쁜데 두 눈이 너무 아팠다.

그는 조용히 창가에서 떨어져 나왔다. 막다른 복도 끝에 등을 기대는데 서늘한 기운이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손이 천천히 가슴께로 향했다. 안쪽 어딘가가 굉장히 쓰리고 허전한 느낌이었다. 그는 시선을 툭 떨군 채 천천히 입을 뗐다.


“……한다정, 너마저 나를 떠나는구나.”

 

 

***

영유아들을 위해 마련된 1층의 아가방. 맡고 있는 아이들이 없어 지금은 빈방이나 다름없었다.

다정은 깨끗한 수건 한 장을 가지고 방문을 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상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거로 좀 닦으세요.”

재킷을 제게 건네준 덕분에 태상은 조금 젖어 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새 옷을 입혀주고 싶었지만 아이들만 사는 이곳에 태상에게 맞는 옷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다정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봤다.


“그래도 많이 안 젖어서 다행이에요.”

“그러게.”

그렇게 말한 태상이 수건으로 다정의 머리를 감쌌다.


“이, 이건 태상 씨 쓰라고 가지고 온 거예요. 저는 얼마 안 젖었다고요. 벌써 닦아내기도 했고.”

“그래도 아직 조금 젖었어.”

그가 머리를 조심스레 문지르며 말했다. 사락사락, 수건이 좌우로 움직일 때마다 귓가에 부드러운 마찰음이 고였다.

다정은 양보하는 셈치고 가만히 제 머리를 내어주었다. 하지만 그가 타월로 머리카락까지 닦아내려 하자 더는 참고 있을 수가 없었다.

이 긴 머리를 다 말리려면 한참이 걸려도 부족한데. 다정은 빠르게 수건을 빼앗았다.


“이젠 태상 씨 차례예요.”

그렇게 말하곤 한참 높이 있는 태상의 머리 위에 손을 척 얹었다. 답답함과 걱정이 어우러진 탓인지 그를 향한 손길에 스스럼이 없었다.


“저 챙기는 거 반만 좀 본인을 챙겨 봐요.”

다정이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했다. 태상은 나른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난 너를 챙길래.”

“아니, 그러니까…….”

“마음에 안 들어도 어쩔 수 없어.”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모습을 또렷이 드러냈다.


“그게 더 좋으니까.”

“…….”

태상과 이렇게 눈높이가 맞았던 적이 있었나.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는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다정은 저도 모르게 주춤하며 손을 뗐다.

그러자 어림없다는 듯, 태상이 작은 손을 머리 위에 다시 꼭 붙여 놓았다.


“아직 덜 말랐어.”

다정은 말문이 턱 막혔다.

연인이 되기로 한 지 오 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는 마치 이렇게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하긴.


‘저도 태상 씨가 좋아요.’

 
고백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허리를 으스러질 듯 끌어안은 남자다. 애초에 돌아가는 법 따위는 배운 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기다릴게. 네 마음이 내 것과 같아질 때까지.’

 
직진밖에 모르는 그가 천천히 다가오겠다고 한 거였다.


“얼른 닦아줘.”

빗방울처럼 똑 떨어진 목소리에 다정은 작게 움찔했다.

분명 천천히 관계를 진전시키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 말은 머리 말리기엔 해당이 되지 않는 듯했다.


“알겠어요.”

다정이 느릿한 손길로 다시 그의 머리를 매만졌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러운 듯 부드럽게 입술을 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흡사 말 잘 듣는 커다란 강아지를 씻기는 기분이었다. 다정은 들리지 않게 작게 웃으며 꼼꼼히 물기를 닦아냈다.


“다 했어요. 셔츠는 닦아 봤자니까 찝찝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다정이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쓱 넘겨 올리며 말했다. 이마를 훤히 드러내자 태상은 다시 평소의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얼굴을 다 드러낸 편이 더 멋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정은 속으로 그런 감상을 남기며 걸음을 옮겼다. 발끝이 향하는 곳은 구석에 놓인 세탁 바구니였다.


“그럼 이제 가지.”

수건을 툭 던져 넣는데 태상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네.”

다정은 잠시 멈칫하다 느리게 입을 뗐다.

서울로 가자는 그의 말은 현실로 돌아가자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은 너무나 달콤한데, 둘만의 완벽한 공간인데.

등 뒤를 받쳐주던 폭신한 구름이 다 꺼져버린 느낌이었다.


“가기 싫은 거야?”

“……조금 그렇기도 해요.”

다정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상의 편에 설지, 제 편에 설지 결정하라며 위협하던 명옥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태상은 다정의 어깨를 다독이듯 꼭 감싸 쥐었다.


“나한테 말해 줄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가 꾹 참아왔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내뱉었다. 혹여 다정이 또 눈물을 흘릴까 두려워 차마 묻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천천히, 전부 다.”

“그, 그게…….”

다정은 명옥이 처음 보육원에 도착한 순간부터 떠날 때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자세히 말했다.

태상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언뜻 보면 평온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턱이 꽉 맞물렸고, 눈매는 점점 서늘해졌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치미는 분노를 참아냈다.

이윽고 다정의 말이 끝나자 태상은 작은 어깨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다신 이런 일 겪게 하지 않을게.”

그의 말은 다짐 같기도 했고 사과 같기도 했다.


“태상 씨……”

“그 여자가 네게 접근하리라는 거, 예상했어야 했는데.”

“태상 씨 잘못 아니에요.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이렇게 된 거지.”

“그렇지 않아.”

가슴 안쪽에서부터 퍼 올린 듯 묵직한 목소리였다. 다정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 살짝 고개를 들었다.

확신에 찬 얼굴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파일 같은 건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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