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너에게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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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너에게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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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너에게 향하는 길
2023.03.30.
***
-띠, 띠띠띠.
낯선 현관문 키패드를 누르는 명옥의 손길이 자연스러웠다. 엄연히 주거침입에 해당하는 행동이었지만 죄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수빈이 어렸을 땐 그냥 여분의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되었다. 하지만 따로 나가 살고 있는 지금은 업체를 통해 매번 비밀번호를 알아내야 했다.
명옥은 그게 조금 귀찮았다.
문을 열자 집안에서 유화 물감 냄새가 훅 끼쳤다. 그녀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거실 한쪽에서 붓질을 하고 있는 수빈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문 소리를 들었을 텐데 쳐다도 보지 않는 게 무언의 시위라도 하는 것 같았다.
“수빈아.”
“…….”
“차수빈.”
수빈은 캔버스 위에 인물화를 그리고 있었다.
사람은 잘 그리지 않는데 웬일로. 명옥은 형태만 잡힌 긴 머리의 여자를 잠시 들여다보다 이내 창가로 향했다.
“냄새 나게 왜 집에서 이런 걸 해.”
명옥이 창문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작업실 하나 구해줘?”
“왜? 작업실 얻어주고 거기도 마음대로 들어오려고?”
수빈이 붓질을 멈추지 않으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차라리 화를 내면 좋으련만 체념한 듯한 태도가 답답하기만 했다.
하긴, 수빈 아빠가 성정이 유약하긴 했지.
수빈을 보고 있으면 그 남자의 모습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차라리 닮을 거면 날 닮지. 명옥은 착잡한 시선으로 수빈을 바라봤다.
“그림이나 그리고 있겠다고 출근 미루겠다고 한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수빈이 붓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같은 자세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지, 가볍게 목을 꺾는데 뚝뚝 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는 누나 일 도와주기로 했어. 예술 고등학교 사진부 애들 감독? 코치? 뭐, 그런 거.”
“고작 그런 거나 하겠다고…….”
명옥의 어깨가 풍선 바람 빠지듯 스르르 내려갔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야. 학교 축제에 걸릴 작품 봐주는 거거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내빈객들이 많이 오시잖아.”
수빈이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명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소파로 향했다. 너저분하게 펼쳐진 화보집이며 그림 도구 몇 개를 치우자 겨우 앉을 자리가 생겼다.
“너, 여기 좀 앉아봐.”
“거긴 앉는 데 아닌데.”
“소파가 앉는 데가 아니면 뭐야.”
“받침대.”
수빈은 손에 묻은 물감을 수건으로 닦아내더니, 작은 천 조각을 소파 위로 툭 던졌다. 그러곤 거실 구석에 있는 스툴을 끌고 와 명옥의 맞은편에 앉았다.
꽤 다리가 긴 스툴이 수빈이 앉자 마치 장식용 의자처럼 작게 보였다.
그는 허벅지 사이 공간에 두 손을 겹쳐 놓으며 상체를 나른하게 숙였다. 넓은 어깨가 양옆으로 솟아오르며 얇은 셔츠 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USB는 버렸다니까.”
수빈이 태평한 투로 말했다.
기승전결도 없는 대화 방식이었지만 명옥은 오히려 이게 더 반가웠다. 빙빙 돌려가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버리긴. 너 그 녹음 파일 내용, 들은 거지?”
“맞아. 들었어. 그런데 별 내용 없더라고.”
“…….”
명옥은 느릿하게 수빈의 얼굴을 훑었다.
도대체 왜 거짓말을 하는 건지. 숨겨진 이유를 알아야 움직일 수 있는 건데 지금으로서는 답이 보이질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명옥은 조금 거칠게 낚시를 해 보기로 했다.
“그 여자애도 다 인정한 마당에 네가 뭐라고 그걸 숨겨?”
“……그게 무슨 얘기야?”
“조금 전에 내 앞에서 다 인정했어. 태상이한테 돈 받으려고 하는 가짜 결혼이라고. 보육원 출신이라는데, 그래서 그런지 뻔뻔하더라.”
“…….”
순간, 수빈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명옥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옥이, 다정을.
수빈은 명옥이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생 그녀의 모진 말을 견디며 살아온 장본인이니까.
다정이 저와 같은 시간을 견뎠을 거라 생각하니 어쩐지 심장이 쪼개지는 것처럼 아팠다.
“수, 수빈아?”
“찾아갔었어?”
“어…… 그게…….”
이런 표정은 좋지 않은데.
잘못 건드렸음을 직감한 명옥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데 그동안 수빈의 얼굴은 한층 더 냉랭해졌다.
“가서 뭐라고 했어.”
“응? 뭐, 별말 안 했어. 그냥 이것저것 물어봤지. 어떻게 만났냐…….”
“거짓말.”
수빈이 읊조리듯 작게 말했다. 들릴 듯 말 듯 한 낮은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명옥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그의 입술을 바라봤다.
“출신에 배경에, 들먹거릴 수 있는 거 다 들먹거리면서 사람 깎아내렸겠지. 돈 없고 능력 없으면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사람이 엄마니까.”
“수빈아,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현실적으로…….”
“엄마.”
“……응?”
“다정이 건드리지 마.”
선포하듯 내리꽂히는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항상 생글거리는 표정을 하고 있는 수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명옥은 멍한 얼굴로 눈만 겨우 깜빡거렸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은데 다정이는 안 돼. 절대로, 안 돼.”
“다정이라니……? 너 그 애랑 아는…….”
명옥이 의아한 목소리를 냈지만 수빈은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대로 뒤로 돌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거칠게 몰아붙였을까, 혼자 울고 있지는 않을까. 다정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다급한 그의 발끝이 향하는 곳은 레지던스 지하 주차장이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세단을 향해 뛰었다.
그러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송 비서가 의아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고 나왔다.
명옥의 옆을 보좌한 지 오래된 그는 성실하면서 입이 무거운 직원이었다.
“본부장님께서는…….”
“오늘 본부장님 모시고 어디 갔다 왔습니까.”
수빈이 그의 말을 거칠게 자르며 대뜸 물었다.
“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송 비서가 레지던스 입구 쪽을 힐끔거리며 말했다.
“어디…… 아니, 됐습니다.”
수빈은 반쯤 열린 운전석 문을 마저 열고 몸을 던지듯 차에 올라탔다. 이런 사소한 말다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 수빈 도련님! 문 열어 주십시오!”
밖에서 송 비서가 연신 핸들을 당겼지만 잠금이 설정된 차 문이 열릴 리 없었다. 수빈은 서둘러 내비게이션 기록을 확인했다.
‘희망보육원.’
수빈은 냅다 액셀을 밟았다.
***
먹구름이 잔뜩 몰려온 오후, 다정은 생활관 뒤뜰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국화같이 생긴 저건 금불초랬나.
원장 아빠가 소중히 가꾼 꽃밭은 다정이 위로를 받고 싶을 때마다 찾아오는 곳이었다.
친구들과 싸웠을 때도, 동생이 말을 안 들을 때도. 알록달록한 색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아지는 것만 같았다.
오늘도 그런 기대를 걸고 찾아왔건만. 안타깝게도 울적한 마음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
명옥은 제가 했던 말을 태상에게 불리하게 사용할 것이다.
협박, 아니면 폭로? 제 손으로 태상을 위험 속으로 몰아넣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어느새 목 뒤가 먹먹해졌다. 눈앞까지 뿌옇게 번지는 게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뭘 잘했다고. 흐르기 전에 닦아내려 손을 들어 올리는데 굵직한 물방울이 그 위로 툭 떨어졌다.
“……?”
의아한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한가롭게 우울해할 틈도 안 주는구나.
다정은 머리 위를 손으로 대충 가렸다. 드문드문 떨어지는 정도이긴 했지만 빗방울이 제법 굵은 게 맞고 있으면 꽤 젖을 것 같았다.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난 그때.
“하아, 하아…….”
어디선가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헐떡이는 호흡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고.
그럴 리가 없는데.
태상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게다가 그가 벌써 도착했다고 해도 혼자 이곳을 찾지는 못했을 텐데.
다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건물 모퉁이를 막 돌아선 태상이 눈에 들어왔다.
“태, 태상 씨…….”
등에 날개가 돋지 않는 이상, 공항에서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다. 다정은 멍한 얼굴로 그를 들여다봤다.
“하아, 하…… 한다정.”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당기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그의 얼굴은 한 마디로 낯설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 땀으로 범벅이 된 목덜미. 게다가 쥐어뜯듯 당겨진 넥타이까지. 단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의 모습은 새롭고 당혹스러웠다.
“하아, 하…… 전화, 왜 안 가지고 나왔어.”
그가 잔뜩 붉어진 입술로 말했다.
“아, 죄송해요. 어차피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해서…….”
멍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빗방울이 점점 거세졌다. 투둑투둑, 어깨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게 했다.
태상은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재킷 단추를 풀었다. 그가 어깨를 크게 휘두르듯 움직이자 한 몸 같았던 슈트가 부드럽게 벗겨져 나왔다.
재킷을 든 태상 손이 다정의 등 뒤로 향했다. 그는 다정의 머리 위에 재킷을 두르고 조심스레 옷깃을 여몄다. 폭발할 듯 들썩이는 가슴에 비하면 부드럽기 그지없는 움직임이었다.
다정은 그의 손길에 맞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물기와 모래로 엉망이 된 그의 구두가 시야에 들어왔다.
도대체 얼마나 뛰어다닌 건지. 답답하고 미안한 마음이 울컥 치솟았다.
“그냥 안에서 기다리지 왜 이렇게 헤매고 다녔어요.”
“기다릴 수가 없어서. 확인을…… 확인을 해야 해서.”
“아…….”
다정은 간신히 올린 고개를 다시 떨궜다.
이젠 정말 어떻게 된 건지 사실대로 말할 시간이었다.
그가 크게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절로 줄어들었다.
“미, 미안해요. 어머니께서 벌써 다 알아버리셨어요. 제가 말레이시아 호텔에서 했던 말을…….”
“내가 확인하고 싶은 건 너야.”
“네?”
“……괜찮아?”
태상이 동그란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다정은 움찔하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엉망으로 긁힌 듯한 그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저, 저는 괜찮아요.”
“그럼 됐어. 아무 걱정 하지 마.”
그 말이 오히려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다정은 꾹 참았던 눈물을 토해냈다.
“어떻게 그래요. 태상 씨 입장이 곤란해질지도 모르는데.”
“…….”
“저…… 이 결혼, 태상 씨한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하겠다고 한 거예요. 가족 같은 우리 보육원 식구들 지켜준 게 고마워서. 그런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폐만 끼치고 있으니…….”
느릿하게 말하던 다정이 순간 무언가 깨달은 듯 퍼뜩 눈동자를 키웠다.
“지, 지금이라도 파혼을 했다고 할까요? 제가 일방적으로 파혼을 요구했다고…….”
“한다정.”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이성인지, 자제력인지. 혹은 또 다른 무언가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감정이 활화산처럼 폭발했고, 열감기라도 든 것처럼 머릿속이 뜨끈했다.
태상은 한껏 위험해진 눈동자로 다정을 바라봤다.
“우리 관계를 진짜로 만들래?”